어쨌든, 사랑하니까

어쩌다, 한국여행_우나별

자유를 찾아 헤매던 어떤 부인의 이야기

2024.05.14 | 조회 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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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요일들

우리들의 이상적인 시간 기록 일지

한국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번거롭게도 한국에 꼭 입국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번거롭게’라고 썼지만 사실 나는 ‘감사하게’라고 읽고 있다.) 따라서 나는 이토록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기 위해 혼자 한국에 입국했다. 아이들을 낳고 7년 만에 처음으로 가져보는 장기 휴가다. 한국 관공서의 일 처리 속도는 안 그래도 요즘 대한의 딸이라 자청하는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마음 졸이며 2주를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달려간 곳에서의 일 처리는 단숨에 마무리되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깐 고민을 했다. 이제 막차를(다음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가야 할까? 이렇게 빨리 해결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마치 오늘 아침 부산에서 첫차를 타고 올라와 이제 막 서울에서 볼일을 마친 사람처럼 막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일정보다 좀 더 일찍 돌아가는 비행 편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나를 말린다. 그들 주장에 따르면 이것은 하늘이 너 좀 쉬라고 주신 특별 휴가란다. 내가 뭘 또 그렇게 힘들게 살았다고 휴가냐 싶었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목소리의 울림이 나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그냥 쉬어!’

감사하게 아이들도 아빠랑 잘 지내는 눈치다. 한 번도 아이들과 홀로 남겨져본 적이 없는 남편은 이번 기회에 나에게 무엇인가를 증명해 보이려 마음을 먹은 듯했다. 무척 흔쾌히 일정대로 지내다가 오라는 것이다. 온 우주가 이렇게 나를 지지해 주고 있으니 그럼 나도 ‘에헴. 한 번 쉬어 볼까?’ 싶은 마음이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처음으로 길게 집을 비우는 일정이라서 독일을 떠나기 전부터 이것저것 챙길 것들이 많았다. 공항버스를 타러 가기 20분 전까지 주방에서 지지고, 볶고, 뭔가를 무치면서 음식을 하고, 불고기까지 재워놓느라 정작 한국에 가져갈 짐은 10분 만에 대충 여행 가방에 구겨 넣고 집을 나섰다. 공항버스 앞에서 ‘엄마~~’를 부르짖으며 오열을 하던 아이들을 뒤로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좌석에 앉자마자 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무슨 전쟁통에 헤어지는 부모와 자식도 아니고, 나도 버스 안에서 청승맞게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 때마침 스멀스멀 올라오는 손에 밴 불고기 양념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든다. 공항에 도착해 손을 여러 번 씻었는데도, 마늘 양념 냄새는 생각보다 잘 안 없어졌다. 그제야 대충 빗어 올린 머리도 보였다. 임시방편으로 면세점을 구경하며 향수를 뿌려본다. 정말 나는 뼛속까지 아줌마가 된 것 같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엔 나도 우아하게 공항 라운지에 앉아있다가 비행기에 탑승했었는데.. 내 차림새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면세점에서 가족들에게 전할 작고 독일스러운(?) 기념품들을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오느라 가방 속에 정말 속옷과 양말 그리고 잠옷만 담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빈손으로 친정에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참 요란스럽게 떠나는 엄마의 휴가는 이토록 도입단계가 길다.

아이들 없이 한국에 왔다고 오래전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루에 약속을 두 탕, 세 탕 뛸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나는 너무나 격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와 직장에 메어있는 삶이 내 삶뿐이겠는가? 다들 사는 게 바빴다. 아이들이 있을 때는 없는 기운까지 모아서 전국을 차를 몰아 순방했지만, 아이들이 없으니 멀리 나다닐 기운도 없었다. 가끔 회사 점심시간이 되면 짠 나타나 점심과 커피만 하고 사라지는 점심 요정이나 몇 번 해볼 뿐이다.

아이들 없이 한국을 찾은 나를 위해 오래된 친구들이 시간을 내주었다. 어쩌면 이 녀석들은 내가 한국 오는 것을 핑계 삼아 함께 쉬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번엔 월차, 연차, 반차, 남편 찬스까지 싹싹 긁어모아 오랜 시간 못했던 1박2일 호캉스를 준비했다고 한다. 다들 사정은 비슷하다. 1박 2일 나오면서도 아이들 식사에 아이들 입을 옷 준비, 먹고 있는 약까지 빠지지 않게 챙겨두고 나와야 한다.

서울 촌년들의 서울 나들이는 벌써 도입부터 떠들썩하다. 엄마들의 나들이는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도입이 길고 본론이 짧으며 바로 결론으로 이어진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아이들과 남편들과 영상통화는 덤이고, 우리 서울시내 호캉스의 피날레는 남대문시장에서 해보는 아동복 쇼핑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들의 휴가답다.

아무튼 우리 여고 동창생들은 오랜만에 이렇게 서울 시내에 모였다. 오랜만이니까 우리는 힙하고 핫한 곳에서 삼시 세끼를 먹기로 했다. 그뿐인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하이볼도 함께 마셔보기로 했다. 서울 시내 호텔의 점심 뷔페에서 마감시간까지 앉아 먹고 마시며 수다를 떨어놓고, 또 냉커피 한 잔씩 사서 입에 물고 청계천을 걷는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이렇게 여유롭게 청계천을 걷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 한동안 우리는 딱 그 말만 반복했다.

“너무 좋다.”

그 누구도 아이들 하원 시간에 내 시간을 맞출 필요가 없다. 시간 맞춰 사무실에 들어가야 할 일도 없다. 그냥 천천히 그 길을 걸으며 ‘너무 좋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올해부터 유난히 꽃이 피는 봄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노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봄꽃 이야기에 신이 나서 한참을 떠드는 나를 바라보던 친구 하나가 물었다.

“혹시 너 꽃 사진도 찍었니?”

나의 대답은 예상한 대로다.

“당연하지!”

이번엔 다른 친구들까지 거든다.

“그건 우리가 나이 들어서 그래”

“원래 엄마들이 꽃 사진 많이 찍으시잖아”

“맞아! 걸으면서 계속 꽃 너무 이쁘다고 감탄하고”

“하, 우리가 정말 나이 들어서 그런 건가?!”

나는 내 안에 휘몰아치는 씁쓸한 감정을 치워내기가 힘들었다. 우리 아이들도 작은 들꽃에 열광하고 예쁜 색색의 꽃을 아름다워하는데.. 분명 우리도 그랬을 텐데, 언제부터 우리는 그걸 잊기 시작했을까? 왜 꼭 나이가 들어서야 자연의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왜 우린 이런 것들로 우리가 나이 들었음을 가늠하는 걸까? 바쁘게 살던 우리의 마음속에 여유라는 녀석이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오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만남보다 헤어짐에 더 익숙해져 가는 우리에게 계절이라는 녀석들은 항상 잊지 않고 다시 돌아와 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자연 속의 이 작은 꽃들이 우리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준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2차, 3차를 꿈꾸며 종류별로 맥주를 사서 숙소로 돌아온다. 하지만 한 번도 사 온 맥주를 다 마셔본 적은 없다. 12시가 되기 전부터 우리는 하나둘씩 드러눕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명분은 잠깐 쉬는 거다. 듣고 있을 테니 계속 말하라고 서로에게 당부하며 말이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친구들은 없다. 하루 이틀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우리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기에 술기운에도 우리는 마스크팩을 꼭 얼굴에 붙이고 눕는다. 마치 내가 정말 잠깐 쉬었던 거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20분이 지나면 다시 일어나 팩을 떼고 온갖 샘플 화장품을 얼굴에 단계별로 바른다. 그리고 정말 자러 간다. 딱히 외모를 특별하게 가꾸는 친구들도 아니지만 이상하게 집에서도 잘 안 하던 마스크팩과 스킨케어는 이렇게 놀러 올 때마다 꾸역꾸역 하고야 만다. 난 이런 것도 참 재밌다. 이제 한 명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마스크팩을 붙이면 슬슬 나머지 친구들도 주변 정리를 시작하게 된다.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이 서로 다른 길 걸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별 탈 없이 이렇게 비슷하게 나이 먹어가고 있다는 것도 참 신기하다. 그때 그 시절 우린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고 이렇게 친구가 되기로 한 걸까?

친구들과 술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하다 보면 수많은 관계 속의 ‘나’ 자신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어찌 보면 복잡한 관계 속에 만들어진 ‘사회적 나’ 이전의 ‘나’를 더 잘 알아주는 친구들이기 때문에 더욱더 마음이 편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조지 오웰의 책 1984의 주인공 윈스턴은 그의 일기장에 ‘자유란 2 더하기 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적는다. 진실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날을 꿈꾸던 윈스턴은 인간들의 기억과 진실을 조작하는 당을 대표하는 오브라이언에게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이때 오브라이언이 “윈스턴, 가끔은 말이야, 2 더하기 2는 5야. 어떤 때는 3이 지. 어떤 때는 5도 되고 3도 돼.”라는 말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오브라언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바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책을 읽고 나서 흥미로운 계산을 한 번 해보았다. 우리 가족은 4명이다. 그중 나를 제외한 3명을 빼면 내가 남아야 한다. 즉, 4 빼기 3은 1이어야 한다. 그런데 분명 남아야 했을 내가 없어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우리 가족 안에서 녹아 없어져 버린 것 같은 느낌말이다. 자꾸만 4 빼기 3이 0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 따라서 2 더하기 2는 4라고 정의된 것을 우리는 마치 불변의 법칙이라고 믿고 살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읽다가 뜬금없이 없어져 버린 나를 찾으려 했다는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이 입을 모아 나 자신이 없어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열심히 지켜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내린 최종 결론은 종종 우리는 자유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따라 부인이라는 단어 앞에 붙은 ‘자유’라는 단어가 좀 더 특별하게 내 맘에 닿았다.

지난번 글에 나는 해외에 나와 지내다 보니 대한의 딸이 되어 간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면서 나이를 먹을수록 짙어지는 고국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막상 한국에 살 때는 보이지 않았던 한국이 오랜 시간 떠나 살면서 좀 더 선명하게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무엇이든 한 발짝 멀어져야 더 명확히 보인다. 책도 티브이로 그렇지 않은가? 원래 무엇이든 가까이에서 보면 잘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눈도 나빠지게 된다. 그래서 뭐든 좀 더 명확히 바라보고 싶다면 살짝 떨어져서 바라봐야 한다. 나를 애틋하게 바라봐 주는 사람이 꼭 타인일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자꾸 나를 찾겠다고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보겠다고 혼자 굴을 파고 안으로만 들어가려고 했던 시간들이 무의미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가끔 혼자 관계 밖으로 떨어져 나와 하는 여행도 필요할 것 같다.

내가 처한 관계 속에서 걸어 나와 잠시 외부인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면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과 먼지처럼 후~ 불어버리면 되는 사소한 걱정들이 좀 더 명확하게 구분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갖고 있는 많은 과업의 경중을 잠시 멈추어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나의 이 ‘번거로운’ 휴가는 생각지 못했던 선물을 내게 주었다. 객관적이고 직관적으로 지금의 나를 바라볼 수 있게 했던 이번 여행으로 조금은 더 애틋하게 나를 바라봐 줄 수 마법의 안경 하나를 찾은 느낌이다. 한국 여행이 어땠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담는 내 마음의 수용력이 조금은 업그레이드된 것 같다고 종종 말한다. 실로 그렇다. 나를 비롯한 나의 사람들이 이토록 애틋해 보일 수 없으니 말이다.

나의 사랑하는 고국도, 나를 에워싼 수많은 관계들도, 나 자신도 그렇다. 당연하게 한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들은 없다. 이렇게 가끔 한 발짝씩 밖으로 나와 안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4 빼기 3이 0이 되면 안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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