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풍요와, 안정적인 상황과 나를 사랑해 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아니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나는 가끔 그 가운데에서 순수한 고독을 느낀다.
우선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독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건강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정신적인 홀로서기가 가능해야 나이로만 성인이 아닌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성숙한 인간이라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상태여야 한다.
외로움과 고독은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전혀 다른 것이다. 외로움은 채워져야 하는 것이라면, 고독은 즐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외로움은 누군가와의 대화, 혹은 교감을 원하는 욕구로부터 시작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들고, 우정을 쌓다 보면 이런 ‘정서적 교류’에 대한 욕구는 채워진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과해서 조금 쉬어야 할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누군가가 나에게 연락을 해 오길 바라는 쓸쓸한 날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는 본인의 성향을 잘 파악하여 그에 맞는 바운더리를 정해 스스로 잘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면 충분히 관리할 만한 욕구다.
그러나 고독은 다르다. 고독은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이 부모던, 가족이던, 친구던, 연인이던, 혹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건 간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느 정도 서로 비슷 비슷한 모양새로 살아가기에 이 욕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외로움을 채우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로 일정 수준까지는 채워진다. 운이 좋아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영혼의 단짝이나 소울메이트를 만난다면 99퍼센트까지도 채워질 수 있다. 그러나 남은 1퍼센트는 채워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이며, 채워져서는 안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100퍼센트 이해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원히 고독하지만 그와 동시에 바로 거기에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각자만의 고유성이 존재한다.
이 세상에 나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있다고 해도 나는 무섭다. 당연하게도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내가 내 모든 생각과 감정이 정당하게 이해받을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기에 두렵다. 그러나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도 무섭다.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나의 고유성과 독립성이 그때에도 과연 성립할까, 하는 의문이 나를 스멀스멀 괴롭힌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내 인생에 존재한다면 나는 완전히 독립적인 한 개체의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과하게 그 사람에게 의존하지는 않을까? 게다가 그 사람과 실수로 헤어지거나, 멀어지거나, 아니면 최악으로 그 사람이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기라도 한다면, 나는 고독이 존재하는 삶으로 다시 돌아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결국 나는 우리가 이 간극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며, 그리고 남과 다른 그 독특한 지점을 기특하게 여겨주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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