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에 한겨울 공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살짝 망설였지만 뜻밖의 큰 감동을 선물해 준 대전 시립 교향악단의 송년 음악회 이야기는 꼭 하고 싶어서요.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이 좋아서 대중음악과 클래식, 국악, 뮤지컬과 무용 등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공연을 자주 보러 가는 편인데 그중에서 클래식 공연은 연주자에 대한 정보나 곡에 대한 공부가 얕다 보니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타플레이어의 공연이 아닌 경우는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친한 언니에게 보러 갈 만한 좋은 공연이 있는지 여쭤보고 보러 가요. 그러면 거의 실패가 없더라구요. 2023년 12월 14일 대전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 대전 시립 교향악단의 송년 음악회도 그 언니의 추천으로 보러 간 공연이었죠.
우리나라 교향악단 중 'KBS 교향악단' 외에 단독 공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대전 시립 교향악단의 연주 실력이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 수준인지 알 수 없었고 우리나라 클래식 연주자들의 수준이 최근 10년간 매우 높아졌다 해도 '지방 교향악단의 실력이 좋아봐야 얼마나 좋겠냐'하는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믿을만한 사람의 추천이었다 해도 3만원이라는 저렴한 티켓값이 아니었다면 바쁜 연말에 그 공연을 보러 가진 않았을 거예요.
물론 티켓값 외에도 그 공연이 저의 구미를 당긴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했어요. 바로 연주 목록이었는데요, 제가 사랑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과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그리고 라벨의 <볼레로>를 한 공연에서 모두 연주한다고 하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더라구요. 세 곡 모두 그중 한 곡만 연주한다고 해도 보러 가고 싶을 정도로 애정하는 레퍼토리였으니까요.
특히 그중에서도 제 인생 곡이라고 할만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알게 된 곡이예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초가을 어느 날 울적한 마음을 달랠 데를 찾아 기숙사 음악감상실에 들렀다가 카라얀의 지휘와 리히터의 피아노 연주가 담긴 LP판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요 그 음반에 그 곡이 있었던 거죠. 그때까지 카라얀은 알아도 라흐마니노프는 잘 몰랐기 때문에 그 음반을 선택해서 듣게 된 건 순전히 카라얀 때문이었는데 그날 저는 이런 훌륭한 작곡가를 몰랐던 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그 곡만 세 번 반복해서 들었답니다. 지금도 그날의 빗소리와 음악실 안의 공기와 분위기가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은 제게 잊지 못할 큰 감동을 선사한 곡이예요. 그래서 연주자에 상관없이 이 곡을 연주하는 공연은 항상 제 흥미를 끌죠.
사실 공연이 있던 날 대전에는 추적추적 많은 비가 내렸답니다. 눈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한겨울에 비를 뚫고 밤 공연을 보러 가자니 집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살짝 짜증이 났어요. 송년음악회 분위기를 제대로 즐기려고 평소 잘 입지 않는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까지 챙겨 신어서 더 그랬죠. 하지만 비 오는 날에 라흐마니노프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또 금방 기분이 나아지긴 하더군요. 아름다운 추억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으니까요.
택시를 타고 대전 예술의 전당 앞에 내려 걸어 올라가니 송년 음악회답게 공연장 앞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가 연말 분위기를 한껏 살리고 있어서 기분은 좀 더 좋아졌어요.
1부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한 협연자는 박종해 피아니스트였는데 매우 특별하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젊은 연주자의 패기로 힘 있는 연주를 들려주더군요. 앵콜 곡도 정성스럽게 준비해왔구요.
사실 저는 곡이 연주되는 내내 탄탄하고 풍성하게 피아노 멜로디를 받쳐주는 대전 시향의 연주 실력에 많이 놀랐어요. 객원 연주자들로 많이 채워서 그런지 음량도 공연장을 꽈 채울 정도로 충분히 컸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이 없었구요. 덕분에 오랜만에 공연장에서 최애곡을 들으며 추억에 잠기는 행복감을 제대로 만끽했죠.
이날 지휘를 맡으신 분은 2023년 5월에 대전시향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여자경 씨였어요. 마에스트라가 이끄는 공연을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지휘 퍼포먼스까지 포함해 시종일관 눈과 귀가 즐거운 공연을 만들어주시더군요. 덕분에 관심 있는 지휘자가 한 명 더 생겼네요.
현대음악가의 곡은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고전 음악가들의 곡들보다 악기 구성이 훨씬 다채로워서 잘 연주되면 소름 돋는 감동을 선사하지만 연주가 조금만 흐트러져도 불협화음처럼 들려서 불안한데 대전시향은 그날 2부에서 연주된 두 곡도 모두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완성도로 들려주어서 저는 한 번 더 놀랐답니다.
라벨의 <볼레로>도 그렇지만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는 타악기의 비중이 큰 곡이어서 연주가 끝난 후 '이 곡은 무조건 공연장에 와서 들어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발레곡이라서 스토리를 따라 음악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었는데 연주를 듣는 내내 언젠가는 <불새> 발레 공연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네요.
마지막으로 연주된 라벨의 <볼레로>는 들으면 누구나 아는 그 멜로디가 계속 반복되는 곡인데도 끝날 때까지 전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강약 조절이 잘 된 타악기 소리와 오케스트라의 세심한 연주가 어우러져 관객을 들었나 놨다 하더라구요. 연말 공연으로 이보다 더 좋은 레퍼토리는 없다 싶을 정도였죠.
앵콜 때 모든 연주자들이 산타 모자를 쓰고 크리스마스 캐럴 메들리를 들려주는 센스까지 송년음악회답게 끝까지 즐거움으로 꽉 채운 공연이 끝나고, 지방의 교향악단이라고 살짝 무시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 미안했던 저는 커튼콜 때 열성을 다해 기립박수를 쳤답니다. 공연을 추천해 준 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요. 그 언니도 레퍼토리가 좋아서 추천해본 건데 연주가 괜찮아서 다행이었다며 함께 즐거워했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앞으로는 우리나라에 있는 다른 작은 교향악단들의 공연들도 관심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매년 지방 곳곳에서 열리는 송년음악회 도장 깨기 같은 것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구요. 대전시향 덕에 보고 싶은 공연이 많아져서 사는 즐거움이 늘어났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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