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왜 사서 고생이니? (염려스러운)"
"뭔 일을 그리 만들고 사니? (애처로운)"
"사는 게 달리 재미가 없니? (진심 궁금한)"
가끔 듣기도 하고, 이런 뉘앙스의 '레이저빔(꽃게 꽃게)' 눈총을 난사 당하기도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사서 일을 만드는 편이니 맞는 말씀이다. 나이에 걸맞게 남들 사는 것처럼 사는 방법도 잘 모른다. 능력도 없다. 설령 능력이 된다 해도 그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생애 주기랑 맞지 않은 삶을 사는 중이라(마흔이 다 되어 결혼이란 걸 했고, 자녀가 없다) 삶의 패턴이 남들과 다르다. 패턴이 달라 함께 느끼는 재미가 다를 가능성이 크다. 따지고 보니 반 이상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고생스럽지만은 않다. 물론 무슨 일이든 몸으로 부대끼는 힘겨움이 없다면 거짓말일 테다. 벌여놓은 일들을 한꺼번에 수습(?) 하자면 따라오는 수고로움은 정해진 수순이다. 하지만 이 자발적 수고를 불사하고도 놓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마음이다. 긴가민가 싶은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수많은 답을 제치고 결정에 도달케 한 건 '마음'이었다. 고민이 절정에 다다르면 쏟아붓던 긴장과 몰입의 끈을 탁 놓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팽팽한 끈을 놓는 순간, 꼼짝도 않던 몸은 순식간에 앞서 나간다. 더러 아찔하거나 짜릿하다. 결국 몸이 기억하는 '순간적 아찔함과 짜릿함에 대한 그리움'이 여기까지 오게 한 거다. '마음'이다. 고작 '마음' 하나 믿고 온 셈이다. 너무 무모했던가.
2023년, 한 해도 조촐한 무모함으로 마무리했다. 타인의 시선으로는 아슬하게 보일 무모함이, 자신에게는 그 어떤 창과 방패보다 든든한 보호기제였음을 안다. 새해가 밝았다. 우리 모두는 다시 고민한다. 지난 시간 자신을 지켰던 것들이 건재한 지에 대해서 말이다. 무사히 날 먹여 살렸던 안전한 시간을 2024년에도 연장시키기 위해선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다시 마음의 촉수를 세우고 묻는다. 살기 위해선 죽어야만 했다. 길게 따져 묻기 전에 고요하게 마음에 안착한 키워드는 다름 아닌 '데드라인(Deadline)'이었다. 이는 엄마가 먼 길 떠나면서 격하게 알려준 귀한 유언이기도 했다. '사람은 죽는다'라는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거스를 수도 없는 자연의 이치였는데, 난 무지하고 모자라 사랑하는 엄마를 잃고서야 알았다. 책으로 배운 숱한 것들은 삶으로 부대껴 배우는 것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선물같이 주어진 2024년, 나는 나에게 '데드라인'을 선물했다. 데드라인의 어원을 살펴보니 선물과는 판이해 섬뜩하다. 미국 남북 전쟁 다시, 포로 수용 공간이 부족해 선을 긋고 넘어오면 총을 난사했다는... 사선死線, 데드라인.
다른 이를 죽이기 위해서 그었던 그 선을, 날 살리기 위해서 다시 긋는다. 날 살렸던 명분이 함께 할 동무들에게 전해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음은 기필코 전달될 거라 믿으며 2024년 첫인사를 전한다.
"여러분(<이상한 요일들>필진), 오늘이 데드라인인 거 아시죠? 매주 화요일입니다"😉
🌈2024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많은 '이상한 날'들을 설레며 시작합니다. 그 무엇보다 무탈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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