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막내가 전역하면 복학할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으니 좀 먼 곳으로 해외여행을 보내보면 어떻겠느냐고 남편과 의논했었죠. 막내는 20학번이라 대학 입학과 동시에 코로나가 온 나라를 덮쳐 교문 한 번 못 넘어보고 집에만 있다가 입대했기에 우리 부부는 선배도 동기도 후배도 없는 막내가 복학하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지 내심 걱정이 많았답니다. 타고난 성격도 외향적인 편은 아니어서 더 짠했죠. 그래서 복학하기까지 남은 몇 달을 그저 집에서 놀고먹고 학원이나 다니면서 보내느니 스스로 계획해서 긴 여행을 다녀오면 견문도 넓어지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데 자신감도 붙고 할테니 여러가지로 의미있는 시간이 되겠다 생각한 거죠.
그런데 정작 아들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답니다. 자기는 여행을 가지 않겠대요. 특히 장거리 여행은 더 가기 싫대요. 미국도 유럽도 아프리카도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거예요. 더군다나 친구들이 다 학교를 다니거나 입대해서 당장은 같이 갈 친구도 없으니 그냥 집에서 푹 쉬고 싶다는 거죠. 우리 부부는 순간 매우 당황했답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혼자 여행을 가서 현지에서 만난 친구들과 따로 또 같이 자유롭게 여행을 즐긴다는데 우리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집과 군대에만 있었으니 나이만 MZ세대이지 그런 형태의 여행은 꿈도 꿔보지 않았던 거예요.
우리 부부는 본인이 원하지 않으니 보내지 않을 것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의논했습니다. 그래, 어짜피 돈도 많이 들텐데 안 간다면 우리는 땡큐지! 하기도 했지만 뭔가 자꾸 아쉬움이 남았어요. 여행으로 쌓은 경험들이 인생의 큰 재산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자유롭게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날들이 결코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 좋은 기회를 날리려는 아들이 안타까웠죠. 이미 자유 여행으로 해외를 몇 번 다녀온 큰 아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구요.
그렇다고 학교를 다니고 있는 형이 같이 갈 수도 없고 회사에 매여있는 아빠가 같이 갈 수도 없고 결국 남은 건 저 하나였죠. 아들과 단둘이 해외여행을 하게 된 사연은 대충 이렇답니다.
일단 여행 계획은 아들이 주도적으로 짜게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자유 여행의 경험이 전혀 없는 막내가 모든 것을 다 맡아서 진행하기에는 부담이 크니 경험이 좀 더 많은 제가 틈틈이 조언을 해주기로 하고 여행 두 달 전부터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유럽에 전혀 관심이 없다던 아들은 결국 유럽인 듯 유럽 아닌 유럽 같은 튀르키예를 여행지로 선정했습니다. 제가 일본이나 홍콩 같은 근거리는 안된다고 못 박았기에 고심 끝에 유럽에서 가장 가까운 튀르키예를 선택한 거죠. 물론, 볼 거리도 많고 먹을 거리도 많다는 것이 주된 선정이유였습니다만. 저도 튀르키예 여행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기에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행 최고 비수기라서 비용도 아끼고 사람들에 치이지 않아도 되는 11월 말에 떠나려다 보니 나이가 적지 않은 저로서는 초겨울 우기에 접어드는 튀르키예의 날씨가 무척 걱정이 되었답니다. 가족 마일리지를 탈탈 털어서 비행기표를 예매하기 직전까지 날씨가 걱정되니 스페인이나 미서부 혹은 호주로 여행지를 바꿔볼 생각은 없느냐 물어봤지만 아들의 대답은 NO! 였죠. 저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마일리지표를 살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어디냐, 이건 튀르키예를 가라는 신의 계시다, 발이 젖고 허리가 좀 쑤셔도 비 맞으며 여행하는 것도 낭만이지! 하면서 말이예요. 비행기표를 사고 나니 초겨울에 아들과 단둘이 장기로 여행을 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으로 밤잠을 설치던 저도 설레기 시작하더군요. 튀르키예 전역을 프로여행러가 아닌 우리끼리만 온전하게 자유 여행으로 다니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부담이 있는 것 같아 이스탄불 외 지역은 5박 6일짜리 현지 여행사 패키지 프로그램으로 돌기로 결정하고 나니 마음도 훨씬 홀가분해졌구요. 아들과 에어비앤비에 올라온 이스탄불의 좋은 숙소들을 둘러보며 고르는 것도 재미있고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의논하는 것도 좋았죠. 하지만 우리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까다로운 엄마의 눈높이에 맞춰 준비물이며 현지 교통편이며 가이드 프로그램이며 온갖 여행 리스트를 완성해가고 있던 중 갑자기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터져버린 겁니다. 지도상 이스라엘과 튀르키예가 바로 붙어있는 나라는 아니지만 튀르키예도 이슬람 국가이니 언제든 이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더라구요. 아들도 불안했나 봐요. 먼저 여행지를 바꿀까요 물어보더라구요. 그렇지만 이미 모든 예약이 끝났는데 갑자기 다 바꾼다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쉽게 결정하기 힘들었습니다. 불안하지만 그냥 가보자 하면서 하루 이틀 시간을 흘려보냈죠. 그러던 중 패키지 프로그램을 예약했던 현지 여행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모객이 안돼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으니 환불해 주겠다고요. 비수기에다 인접 국가에서 전쟁까지 터지니 모객이 안됐던 모양이에요. 결국 우리는 여행지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마일리지 표는 3만 원만 지불하면 다른 지역 마일리지 표로 변경할 수 있고 숙소도 가이드 프로그램도 모두 무료로 취소할 수 있는 것들로만 예약했기 때문에 금전적 손해는 크게 보지 않았다는 거죠.
계획했던 여행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우리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지인의 추천도 있었고 SNS를 살펴봐도 스페인은 11월 말도 여행하기에 날씨가 나쁘지 않다는 분위기여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일리지 표를 검색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원하는 날짜에 딱 2장이 남아있는 거예요. 스페인은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중 어느 한곳으로 입국해 다른 한곳으로 출국하는 것이 여행 일정 짜기에 좋은데 마침 바로셀로나로 들어가서 마드리드로 나오는 표를 구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기쁘던지요! 요즘 마일리지표 구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라서 떠나기로 한 날이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갈 수 있는 마일리지 표를 사게 되니 정말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나 싶었습니다. 아들도 그랬나 봐요. 뭔가 그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더 꼼꼼하고 빠르게 여행 계획을 잡아나가는데 제가 다 놀랄 정도였어요. 물론 앞서 튀르키예 여행 계획을 짜본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겠죠.
한마디 더 붙이자면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의논할 일이 많아지니 아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정말 많이 늘어났는데 그건 제게 의외의 수확이었습니다. 아들만 둘 키우다 보니 작은 사고라도 생길까 남들보다 더 엄하게 아이들을 키웠거든요. 그래서인지 막내는 사춘기 이후 부쩍 말수가 줄어들었죠. 자연스럽게 우리 둘이 오손도손 시시콜콜한 대화를 길게 나눌 기회도 줄어들었구요.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해봤지만 효과는 잠시 그때뿐 제게 막내는 오랫동안 어려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과 단둘이 여행 가는 것에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24시간 붙어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친한 친구끼리도 다투고 깨지기 일쑤인데 자기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막내와 10박 12일 낯선 땅에서 한 방을 같이 쓰며 여행할 생각을 하니 저는 답답해서 돌고 막내는 엄마의 잔소리에 돌지 않을까 걱정이었거든요. 그런데 튀르키예 여행이 엎어진 게 어떤 면에선 전화위복이 되었구나 싶었어요. 스페인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우리 사이엔 이미 약간의 동지애 같은 것이 생긴 것 같았달까요.
아무튼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아들과 단둘이 떠난 스페인 여행기 다음 주 수요일 바르셀로나편부터 시작합니다.
잊지 않고 함께해 주신다면 무척 반가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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