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받은 선물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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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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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의 산문

일주일에 한 번 짧은 산문!

S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에서 난 긴장하고 있었다. 거의 20년 만의 만남이었다. 옛날에는 편했더라도 이젠 본 지 너무 오래됐는데 괜찮을지. 난 어색함에 사로잡히는 사람이지 깨는 사람은 아니다. 무안한 분위기에 서로 난처하면 어쩌지. 만남을 끝맺을 타이밍도 잡기 어려우면 어떡하나.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S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성격도 좋아 인기가 많았다. 난 툭하면 안절부절 못하는 애였고 S는 항상 느긋한 애였다. 그런데도 희미하게 통하는 데가 있어서 졸업 전까진 나름 가까웠다. 내가 다른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멀어졌는데 굳이 따로 연락해서 만날 사이까진 아니었던 것 같다. 길가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는 할 수 있는 정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소식이 끊겼다.

서른을 갓 넘겼을 때 또다른 중학교 친구 H가 세상을 떠났다. 졸업 후 S를 처음으로 만난 건 H의 장례식장에서였다. S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내가 올리는 사진을 잘 보고 있다며 어떤 카메라를 쓰는지 물어보았다. 발인을 마치고 헤어지면서는 「한번 보자」는 인사를 나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놀랍게도 그 「한번 보자」가 현실이 되어, S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걱정이 무색하게 S는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갈 줄 아는 어른이 돼 있었다. 함께 쌀국수를 먹으며 근황을 나눴다. 나와는 너무 다른 길을 가고 있는 S의 삶이 신기했다. 그는 체육 입시 학원 선생님이었는데 요즘 중학생들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 얘기했다.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갔고 끝을 맺기도 자연스러웠다. 이만 가야겠다고 말한 뒤 일어나려는데 S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급한 거 아니면 어디 좀 잠깐 가자고. 영문을 모르고 따라간 곳은 웬 캠핑용품점이었다. 그러고보니 S는 캠핑을 즐긴다고 했었다. 근데 나를 왜?

「캠핑의자 맘에 드는거 두개만 골라」

「어?」

「제수씨랑 피크닉갈 때 있으면 좋아」

손사래치는 나를 이겨내고 S는 내게 캠핑의자 두 개를 쥐어줬다. 20만 원 돈이었다.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아니 다신 만날 일이 없을 수도 있는, 20년 만에 만난 나에게 가볍지 않은 선물을 줬다는 게 좀 충격이었다. 마땅히 선물을 줄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S는 내게 선물을 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느낄 기분을 예상했을까? 분명 S에게도 좋은 점이 있는 일이긴 했다. 나는 S를 고마운 존재로 기억할테니까. 하지만 그런 즉각적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가치 때문에 거금을 썼단 말인가. 캠핑의자를 양 손 가득 안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난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고민했다.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자연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S가 보답을 바라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내게 빚을 지운 것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이네」 집에 도착해 자초지종을 들은 지원이 말했다. 「그러게. 진짜 좋은 사람이야」 나는 답했다. 그때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맥락 없고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선물을 해보자고 생각했으나, 많은 다짐이 그렇듯 얼마 못 가 흐지부지 잊혀지고 말았다. 살다보면 그랬다. 겨우겨우 하루 일을 해치우고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 축하할 일이 없다면 선물을 떠올리기는 어려웠다.

S에 대한 얘기는, 우리 집에서 잊을만하면 튀어나왔다. 베란다에 배치해 놓은 S가 선물한 캠핑 의자에 앉을 때, 올림픽 공원으로 피크닉을 나갈 때 그 의자를 챙기면서, 「S가 이걸 선물해준 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 등의 말을 종종 했다.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나는 중학생 S 특유의 느긋함을 떠올렸다. 모두가 긴장했던 체육대회 축구 경기 직전에도 농담을 던지거나 기분이 상할만한 일도 여유있게 대처한 모습이었다. 캠핑 의자가 필요한 순간은 모두 쫓기는 일이 없는, 평온함이 가득한 순간 뿐이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

반면 내게, 여유란 아주 가끔씩 찾아오는 거였다. 너무 가끔씩만 와서, 어쩔 때는 여유가 생겨도 그걸 어떻게 다뤄야할지 몰라 쩔쩔매기도 했다. 안 해도 되는 선물을 굳이 하는 마음은 느긋한 사람에게나 찾아오는 거라, 내겐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느긋한 마음 안에는 타인이 들어올 자리가 충분한데, 내 마음 안에는 그런 공간이 너무 적은 것 같았으니까.

딱 한 번 있었다. 타인에게 생일도 아닌데 선물을 한 적이. 상대와 내가 친한 사이도 아니었으나 그에게 일어난 어떤 상실 때문에 며칠을 불편한 생각하다 카톡으로 선물을 보냈다. 연민은 아니었다. 상실이란 내가 제대로 겪어본 무엇이고, 나는 그것이 만드는 맘 속 구멍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고, 그 깊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위안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생긴 마음이었던 것 같다. 순식간에 그런 감정이 들었고 내 마음 속에 상대에 대해 생각할 공간이 생겼던 것이다.

S가 느긋한 건 성격이기도 했겠지만, 어쩌면 그 느긋함의 밑바닥엔 타인에게도 나만큼의 거대한 세계가 있다는 걸 아는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S가 H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올린 사진을 기억하고 말을 걸어온 것도, 「한번 보자」는 말을 진짜로 지킨 것도 그래서인게 아닐까. 그런 사람의 마음 속에는 타인이 많고, 비로소 안 해도 되는 선물을 할 마음까지 생기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캠핑의자를 볼 때마다 S를 떠올린다. 어쩌면 S는 그날을 별로 대단하게 기억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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