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이 휴가라는 게 딱히 즐겁지가 않았다. 떠나기 전엔 개운함이 있어야 하는데 찝찝함만 남아 있었다. 회사 일이 맘처럼 시원하게 풀리지 않아서 그런가. 퇴근길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고 선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지금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찾았다. 간만의 휴가를 하루 앞둔 금요일 저녁이었다. 그 마음이 복선이었을까.
집에 오니 지원이 날 반겼고 나는 저녁으로 뭘 먹겠냐고 물었다. 미용실 예약을 해뒀기에 그쪽으로 같이 가서 머리를 자른 뒤, 주변 맛집을 가자고 했다. 그래도 휴가를 하루 앞둔 금요일 저녁에 맛있는 저녁을 먹기로 하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갈 채비를 하는데 주방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주방으로 달려가는 몇 초 동안 몇 가지 상상을 했다. 비교적 안전한 상상이었다. 바퀴벌레가 나타났다거나 물을 엎질렀다거나. 첨벙 소리가 들렸다. 지원이 주방과 연결된 다용도실에 불을 켰다. 물이 발목 높이까지 차 있었다. 문턱을 넘어 집 안으로 물이 넘치기 직전이었다. 김치냉장고와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다용도실이 물바다가 됐다… 왜?
영하 16도였다. 원인을 찾으러 물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발이 얼어버릴 것 같았다. 손을 집어넣어 하수구 덮개를 들어내도 변화가 없었다. 젖은 물건들을 밖으로 빼냈다. 늘 정돈돼있는 우리 집 주방이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김치냉장고의 맨 아래 칸은 거의 물에 잠겨있고 슬리퍼는 동동 떠다니는, 홍수에 수해를 입은 듯한 아수라장을 보며 머리를 굴렸으나 아무런 배관 지식이 없는 내가 원인을 찾을리 없었다. 순간 섬뜩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디서 들었는데 윗집에 물이 차면 아랫집에 물이 샐 수가 있댔다. 아는 형네 집에 큰 불이 난 적이 있는데, 스프링쿨러가 작동해 아랫 층까지 다 젖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 형은 화재보험을 들어놔서 해결했다지만 나는, 보험은 들어놨나? 이런 경우에 적용되는 보험이란 게 있나? 다용도실에서 물을 틀 일은 없으니 윗층에서 내려온 물이 찬 것 같은데, 지금보다 더 차면 어떡하지? 거실까지 물바다가 되면 어쩌나. 살림이 다 물에 젖으면? 무엇보다 그 날 안에 해결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두려웠다.
다행히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올 수 있는 배관기사님이 있었다. 순식간에 온 집안이 버거운 장비들로 가득 찼다. 2시간이 지나고 기사님이 말했다. 「이거 일이 커질 수도 있겠는데요?」 최근 들은 말 중에 가장 청천벽력이었다. 나는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 안에 해결이 안 된다면 잠을 설치며 부정적인 상상의 나래를 끝없이 펼칠 내 모습을. 마음이 반 쯤은 주저앉은채로. 몸도 축 늘어진 채로.
천장이 막혀있어 배관을 확인할 수 없댔다. 더이상 작업은 불가능하고, 다음 날 오전에 아래층에서 작업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저 버거운 장비들을 아래층에 들고가서 이 난리를 피워야한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일어난 문제 때문에… 늦은 시간이라 아래층에 문자를 보냈다.
「이런 일이 있어서, 내일 댁에 가서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금방 답장이 왔다.
「잠깐 보시는 거죠? 윗층에서 생긴 문제 때문에 저희 집에서 작업해야 하는 건 아니죠?」
지금 보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인데, 당시 나는 이 문자에 덜컥 겁을 먹었다. 날이 서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머릿속에 내일 있(을 수도 있)을 갈등이 그려졌다. 머리가 아팠다. 타인과의 갈등은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거였다. 상대가 어떻게 대응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은 늘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아래층에 폐를 끼칠 수 밖에 없는데 그걸 어떻게 원만히 넘길까. 기적이 일어나서 아래층에 내려갈 필요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막힌 게 해결은 될까? 더 큰 문제면 어떡하지? 막 아파트 구조적 문제여서 완전히 들어내야하면 어쩌지? 아래층 뿐 아니라 다른 세대에도 피해가 가면 어떡하지. 우리가 아파트에서 가장 젊은 부부일텐데,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고 잡아먹으려 들지도 몰라… 늦은 시간까지 잠을 못 잤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한 일은 아래층에 기프티콘을 보내는 거였다. 무엇보다 아래집이 가장 신경 쓰였고, 기프티콘은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나름의 묘책이었다. 「저희 집 문제 때문에 주말에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최대한 빠르고 작게 끝내달라고 요청할게요. 작은 마음을 담은 선물을 보냅니다」
오전 열시, 예정보다 빠르게 기사님이 오셨다. 어제와 다른 분이었는데, 조금 더 나이도 있고 내공이 깊어보였다. 「최대한 아랫집 안 내려가는 게 좋잖아요. 그쵸?」 기사님은 날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경력이 높은만큼 어제 오신 기사님이 미처 보지 못한 방법을 아는 듯 했다. 기사님이 구세주로 보였다.
작업은 싱거웠다. 원인은 추운 날씨 때문에 얼어버린 배관이었다. 집에 또 한 번 버거운 장비들이 들어오고 창문으로 호스를 연결하고 배관으로 내시경을 집어넣고 스팀을 쏴서 얼음을 녹이는 등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전 날보다 훨씬 빠르고 깔끔하게 끝났다. 물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걸 확인하고 적지 않은 값을 미련없이 지불했다.
나는 안도했다. 작업이 끝나고 나서야 아랫집에서 답장이 왔다. 「이런 선물까진 안 주셔도 돼요. 받지 않을게요. 잘 해결 됐으면 좋겠네요」 나는 덕분에 잘 해결됐다고 말한 뒤 선물 취소 처리를 한 후 쇼파에 파고들었다. 머릿 속으로 어제 밤부터 온갖 부정적인 시나리오를 작업하느라 지친 상태였다. 힘 빠진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걱정이 너무 멀리까지 갔던 것이다.
나는 휴가를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물난리 때문에 비행기 시간을 5시간 정도 미뤄서 여유가 있었다. 짐을 다 챙기고 지원과 밥을 먹었다. 아내에게 어제 내가 어떤 상상의 나래까지 펼쳤는지 얘기했다. 지원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난 그렇게까지 생각도 못하고 어제 통잠 잤어. 내가 너무 무책임했나?」 왠지 그 말이 웃겨서 나도 덩달아 웃었다.
배관은 녹았고 물은 빠졌다. 갈등도 없었다. 그리고 지원과 웃으며 식사를 하고 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딱 하나 돌아오지 않은 건 그 밤이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느라 흘려보낸 몇 시간. 지원과 인사를 나누고 홀로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자꾸만 그 시간이 떠올랐다.
어떤 일을 마주하고, 과한 걱정을 한 뒤, 너무나 싱거운 현실을 마주하며 힘 빠지는 안도를 하는 일련의 과정은 익숙했다. 불안에 휩싸였던 밤은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게 됐고, 나는 곧 그 시간을 잊어버리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잠 못 잤던 전날 밤을 직시하고 싶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 괜찮은 게 맞는가. 비합리적인 불안에 떠는 시간을 앞으로 계속 허락해도 되는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악력이 센 누군가에게 다짜고짜 멱살을 잡힌 것처럼 빠르고 강하게 다가왔다. 「더이상 네게 남은 날이 무한정인 것처럼 굴면 안 돼」 라고 엄중히 경고받는 듯 했다. 삼십대가 꺾여서 그런 걸까. 내게 남은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실감이, 그 날 처음으로 또렷해졌다.
요즘 글 쓰는 일이 너무 즐겁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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