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의 시작

내 인생이 시작된 건 언제일까. 그거야 태어났을 때지 당연한 걸 왜 묻냐고 하겠지만 굳이 되묻고 싶다. 정말 그때 인생이 시작된 게 맞냐고.

202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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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 나의 시작들

 

 

Ep 1. 인생의 시작

 

내 인생이 시작된 건 언제일까. 그거야 태어났을 때지 당연한 걸 왜 묻냐고 하겠지만 굳이 되묻고 싶다. 정말 그때 인생이 시작된 게 맞냐고.

중학생 때까지 삶이 어려운 줄 모르고 살았다. 집은 화목했고 친구 관계는 원만했으며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았다. 가끔은 슬픔이나 싸움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쉬웠다기보단 삶의 난이도를 가늠할 생각조차 못했다. 그럴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인생은 그저 자연스럽고 흘러가는대로 살아도 큰 탈이 없는 것이었다.

어릴 적엔 교회 일에 열심이었다. 토요일에도 교회에 나갔고 믿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임무를 받아 여기저기 다니며 춤을 추거나 노래를 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구성된 팀과 함께였다. 나는 중1이었고 고2였던 상일이 형은 팀의 리더였다.

상일이 형은 상냥했고 책임감이 강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선생님에게, 나보다 강한 친구에게 느꼈던 안정감을 그에게서 받았다. 긴장되는 무대에 나설 때도 상일이 형이 시키는 대로 하면 다 잘 될 것 같았다. 고민이 있으면 그에게 조언을 구했고 곧 마음이 편해졌다. 형이 있으니 어려울 게 없었다. 단지 그를 믿고 따라가면 모든 게 잘 풀릴 거였다. 여태 날 보살피는 어른들을 따라가며 별 문제없이 커 왔듯이.

상일이 형을 든든하게 여기는 것과 그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나와 몇몇 친구들은 형에게 장난을 걸고 때론 무례하게 굴었다. 그의 생김새를 가지고 농담을 한다거나 모이라는 말을 안 듣고 딴청을 피웠다. 이유가 딱히 없는 어린 날의 심술이었는데, 그게 상일이 형에게는 상처가 됐던 것 같다. 

어느 날 애들이 말을 듣지 않자 상일이 형은 작은 교실 옆에 딸려있던 창고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았다. 다들 벙쪄 있는데 형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들어본 어떤 울음보다도 크고 서러운 소리였다. 우리는 쭈뼛쭈뼛 문 앞에 서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눈물 섞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니네 뒤에선 ‘저새끼 왜 저래?’ 이럴 거잖아” 그 말에 충격을 받은 친구들이 아니라며 상일이 형을 달래는 동안,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멍하니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른도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믿고 따르고 의지하던 사람이 사실은 완전하지 않았다. 그도 불안해하거나 무너질 수 있었다. 다른 어른들도 그럴지 모른다. 내가 어른이 돼도 지금보다 전혀 강해지지 않을 수 있다… 같은 생각들이 소나기처럼 나를 찾아왔다.

 

그때 처음 느꼈다. 인생은 어려운 거구나, 하고.

난 어쩐지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이 시작된 것 같다.

 

그제서야 인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으니까.

마냥 흘러가는대로 살았던 때에는 도무지 인생을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후로 내게도 인생이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특히 노력이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때 나는 숨이 찼다.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게 있을 때, 그게 사랑이든 일이든 무엇이든 삶 자체가 어렵다고 느꼈다(상일이 형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에 잠길 공간을 찾았다. 어떤 사건 때문에 찾기 시작했더라도 그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게 아닌, 인생 전체를 떠올리기에 좋은 장소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텅 빈 예배당 같은 곳, 대로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옥상 같은 곳.

멍하니 앉아 인생이란 뭘까? 뭐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두 가지가 떠올랐다. 인생은 정말 어려운 게 맞다는 것과 누군가는 나보다 쉽거나 어려운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 삶의 어려움을 휙 피해갈 정도로 특별한 사람들도 있을 거였다. 조금만 어려워도 발목을 잡힐 정도로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였다.

난 나의 특별함을 재기 시작했다. 세상에 꺾일 때면 아, 나는 특별하지 않구나, 하고 숨을 토하듯 중얼거렸다. 언니네 이발관 5집 [가장 보통의 존재]에 대해 다룬 글에서 보컬 이석원 씨가 “자신이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섬뜩한 자각”을 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섬뜩하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내가 특별하지 않다면, 시도때도 없이 닥쳐오는 인생의 어려움을 정면으로 맞아야만 한다면 평생 막막함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럴때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섬뜩하고 억울한 기분 안에 갇혀 있을 때면 음악이나 영화 같은 걸 찾아 틀었다. 이상하게도 막막함 안에 있을 수록 그런 것들이 더 아름답게 다가오곤 했다. 이를테면 마츠바라 미키의 <Stay with me> 같은 노래는 평소엔 그저 듣기 좋은 것이었지만 내가 인생에 또 한 번 꺾여 있을 때는 그 자체로 거대한 위로가 되곤 했다. 일본 노래라 가사를 이해할 수 없는 데도 그랬다. 특히 유일하게 알아듣는 “Stay with me~” 부분에선 누군가가 나와 같이 있어주겠다고 말해주는 듯 했다. 사실 이 노래는 이별 후의 미련에 대한 내용인 걸 아는데도, 마음은 제멋대로 해석하며 그 선율을 끌어안았다.

살아오면서 한동안은 두 가지 생각이 싸움을 했다. “거 봐, 너 특별한 거 없댔지?” vs “아냐, 내 안의 특별함은 분명히 있어. 이번엔 좀 어긋났을 뿐이야” 어릴 적엔 두 생각이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점점 한 쪽으로 기운다. ‘내가 뭐, 특별할 것도 없긴 하지 뭐.’하고 전보다 싱겁게 인정하는 모습이 되어간다. 씁쓸함은 남지만 <Stay with me> 같은 노래가 있으니까, 매번 그래왔듯 마음을 달래면 될 거였다.

상일이 형의 울음을 목격한 순간부터 나는 인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생은 그때 시작되었고,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나는 다시 인생을 생각했다. 나를 위로해줄 무엇을 하나씩 하나씩 찾아가면서.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인생의 버거움을 차분하게 대해가고 있다. 인생이란 어쩌면, 인생은 어려운 거라는 걸 평생에 걸쳐 천천히 납득해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슬프게만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음악이나 영화를 수집하는 것,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두부의 산문 시즌 1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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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뉴스레터를 고민할 때 구독자가 3명만 넘어도 시작하겠다고 했었습니다. 어떻게든 시작하겠다는 우격다짐이었는데 어느새 300명이 됐네요. 아무리 엉망인 글을 써도 늘 100분은 봐주십니다(제게는 굉장히 큰 숫자입니다). 30개 가까운 글이 쌓인 것도 뿌듯합니다. 연재 주기는 못 맞췄어도 놓지는 않았으니까...

매번 보낼 때마다 아무 주제나 생각나는대로 잡고 써 왔는데요. 그런 잡글로는 한계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어떤 글이 나올지 모르고 받는 분들도 어떤 글이 날아올지 모르고. 그러다보면 기다려지지가 않으니 이래서야 오래갈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시즌”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포스터까지(ㅋㅋ) 만들고 한 가지 주제 안에서 정해진 기간동안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시작’ 입니다. 이번 글이 첫 글로 '인생의 시작' 이었고요. 이제 봄이기도 하니까… 제게 있었던 모든 시작들에 대해 8주간 써보려고 합니다. 사랑의 시작, 글쓰기의 시작 등등. 재미도 감동도 없을 수도 있는 게 함정이지만, 누군가에겐 지난 시작을 회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예요.

이 메일을 받은 분들은 이미 구독하셨을테니 계속 이대로 받아보시면 됩니다. 바라건대 조금은 기대가 높아진 채로요. 다만 이제부터는 매주 목요일에 발송하려고 합니다. 메일을 열자마자 보이는 그림과 포스터는 아내 지원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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