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수요일 밤 11시 즈음, 9호선 김포공항역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까맣고 큰 눈의 외국 여성이 커다란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그녀는 지하철 노선표를 보다 나를 힐끗 바라봤고, 아주 조심스럽게 한걸음 발을 내딛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서 그녀의 눈망울을 보니 누군가 툭 치면 눈물 한방울이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흔들리는 동공을 가까스로 부여잡은 듯한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저... 혹시 여기서 지하철을 타면 고속 터미널 역으로 가는 것이 맞나요?"라 질문했고, 나는 "네. 맞아요. 이번 열차에 저와 같이 타면 됩니다."로 대답했다. 다행히 나는 그녀의 행선지와 같은 방향이었고, 때마침 도착한 열차 안으로 함께 발을 올렸다.
늦은 밤 시간, 열차엔 빈 자리가 가득했다. 그녀와 나는 자리를 휙 둘러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가운데 한 자리를 비우고 나란히 앉았다. 우리 사이에는 가운데 빈 자리 한 칸 공간만큼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살짝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열차에 탑승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층 더 어두워졌다. 영문은 모르지만 불안해 보이는 그녀가 신경이 쓰이던 순간, 핸드폰을 쥔 그녀의 손이 눈 앞에 다가왔다. "저... 혹시 제가 고속 터미널 역에 밤12시 안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문득 10년전, 이탈리아 로마 공항에서 귀인을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날도 밤 10시가 한참 넘은 깜깜한 밤이었다. 숙소 주소 딱 하나만 들고 탔던 비행기는 경유에 연착을 거쳐 예상보다 다섯시간이나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이십 킬로가 넘는 캐리어를 힘겹게 끌고 계단을 낑낑대고 플랫폼에 올라 도심 방향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엔 인터넷이 되지도 않아 시계로 전락한 휴대폰만 꼭 쥔 채로 말이다. '이 방향 열차가 맞으려나? 혹시 잘못 타면 어떡하지? 이탈리아에서는 밤에 혼자 다니면 큰일난다고 들었는데…' 방향은 맞는 것 같았지만 쿵쾅대는 심장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약 5미터 옆에 같은 열차를 기다리던 동양인 남자가 보였고 쭈뼛쭈뼛 다가갔다. "저기... 이 역으로 가야 하는데 여기서 기다리는 것이 맞나요?"
까만 뿔테 안경을 썼던 동양인.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하던 나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와 같은 방향에 같은 역이네요. 함께 열차를 타고 가요.” 그 순간 머나먼 타국 땅에서, 그것도 치안이 위험하다는 이탈리아 한 가운데에서 마음속에 가득 찬 불안이 아주 조금은 날아간 듯했다. 그제야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날 만큼 꽉 쥐었던 손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열차는 출발했고 그와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예술 공부를 하는 유학생이었고, 난생 처음, 늦은 밤 시간에 타국에 도착한 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이 시간에 여자 혼자 숙소에 찾아가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니, 친구와 함께 나를 숙소로 데려다 준다는 말을 덧붙인 채 말이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옆자리의 그녀를 바라보자 10년전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떨리는 목소리의 그녀의 질문에 나는 빠른 대답 대신 미소를 약간 머금고 지하철 노선표를 연 후 그녀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지금 타고 있는 열차는 9호선 일반 열차인데, 다 다음 역에서 같이 내려 급행 열차로 갈아타면 충분히 밤 12시 전까지 터미널에 도착한다고, 걱정말라고 대답했다. 어차피 나도 같은 방향이니 따라오면 된다는 말까지 덧붙인 채 말이다.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땡큐를 여러 번 말하던 그녀에게 나는 질문을 했다. 혹시 한국에 처음 오는 길이냐고, 늦은 이 시간에 가방의 크기만 봐도 비행기를 굉장히 오래 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한 표정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 태어나서 처음, 인도에서 한국으로 왔는데 경유를 여러 번 하고 날아오느라 총 30시간 정도 걸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고 말해주었다. 덧붙여 12시 전까지 고속터미널 역에 가야 하는 이유는 진주행 고속버스 막차를 꼭 타야 하는데, 만약 차를 놓치면 내일 새벽 6시 첫차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서 노숙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라고 묻자 그녀는 내일 진주에 있는 대학에서 Ph.D(박사)과정을 시작한다고 했다. “와 나도 Ph.D학생인데, 반가워요.”라는 나의 대답이 이어졌다. 태어나서 처음 지하철에서 만난 그녀와 나는 ‘학생’ 이라는 동질감 하나 만으로 무언가 끈이 이어진 듯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와, 당신의 전공은 무엇인가요?”라 물었다. 나는 심리학이라 대답했고, 그녀는 동물 실험과 연관된 나와는 멀리 떨어진 분야의 전공이라 말해주었다..
내일 아침, 학기를 시작하는 그녀가 만약 12시 막차를 놓친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아무리 안전한 우리나라지만 태어나서 처음 떨어진 타국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울 뻔했던 그녀를 보며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급행 열차로 갈아탈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열차에 몸을 실었고, 그곳에서는 한 칸 떨어진 거리가 아닌 바로 옆자리에 앉아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그녀에게 노선표를 보여주며 차근히 설명했다. 나는 두 정거장 뒤에 내리는데, 그 다음 딱 네번째 역에서 내리면 된다고 목적지를 손끝으로 여러 번 짚어 주었다. 그녀가 헤매지만 않는다면 역에서 버스를 타는 곳까지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이어 붙였다. 그제서야 그녀의 눈빛에 평온이 차오르는 듯 했다.
50분쯤 시간이 흐른 후, 로마 도심행 열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플랫폼엔 그가 불렀던 친구가 먼저 도착해 우리를 마주했다. 인사를 나누자 마자 내 옆의 두 사람은 지도 앱을 켜고, 나의 숙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역 앞에는 무섭게 보이는 남자들이 여럿 보였고 우리는 그 사이를 걸어갔다. 그때 그 친구들은 나에게 말했다. "네가 혼자 이 길을 걸어갔다면 백프로 캐리어를 뺏겼을 테야." 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숙소 까지의 길은 예상보다 험난했다. 몇 번이나 사전 답사를 한 내 손의 지도는 이미 무의미한 그림이 되어버렸다. 깜깜한 골목에서 유일하게 의지한 친구들의 지도앱은 우리를 목적지에 다다르게 할 듯하면서도 비슷한 자리를 빙글빙글 돌게 만들었다.
그렇게 골목길을 몇 바퀴나 돌고 난 후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또 다른 난관을 만났다. 나의 숙소는 3층이었는데 엘레베이터가 없는 곳이었다.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한 나는 그들을 돌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커다란 나의 가방을 보더니 내 손을 스윽 밀어내고 둘이서 번쩍 가방을 들어올렸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으니 올려 준다는 말을 더하면서 말이다. 숙소에 무사히 도착한 나는 그제서야 한숨이 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너무너무 고마우니 연락처나 메일주소를 알려달라고 했고, 그들은 흔쾌히 메일 주소를 적어 주었다. 나는 짐을 푼 다음 바로 이번주에 혹시 시간이 되면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메일을 보냈다.
어느새 지하철은 내가 내려야 할 목적지에 다다랐다.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에게 나는 과거 로마의 두 친구에게 받은 답변을 그대로 돌려 주었다.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던 나에게 그들의 답변은 이미 먹은 것으로 할 테니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마주한 누군가를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에게 다음에 오늘의 당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오늘처럼 그대로 행동해 달라고 하며, “학교 입학 축하하고 한국 생활에 Good luck이 가득하길”이라는 말을 건넨 후 손을 흔들고 지하철을 내렸다.
승강장을 올라가며 문득 ‘낭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지난 10년 간 길 잃은 외국인을 도와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에는 예전의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는 이를 만났고, 나는 그때 받았던 것을 똑같이 되돌려 주었다. 사람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름 모를 따뜻한 이들 덕분에 세상은 돌고 도는 것 같았다. 그렇게 표현하지 못할 따뜻함을 품에 안은 채 나의 수요일은 마무리되었다.
* 글쓴이 - 지은이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만든 순간을 기록합니다.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며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해당 글은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매일(주중)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뉴스레터로,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무료 레터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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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ita
감동적이네요. 따뜻한 마음이 돌고 도는 세상은 살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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