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어디일까 생각해 본 적은 많지만, 내 고향이 어디인지 시원하게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아니 지금은 그 답을 찾을 생각이 없어진 것도 같다. 적어도 사전에 ‘고향’을 넣고 찾아봤을 때 1,2번에 해당하는 의미로는 그렇다.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 청주시의 어느 동네였고, 자란 곳은 서울이었다. 세살 때 가족 모두 서울로 이주했기 때문에 나의 기억 속 어디에도 청주에서 살던 시간은 없다. 그러니 태어난 곳과 자란 곳이 다른 나에게 1번의 고향은 애매하다. 나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출신이지만 피난민이 되어 충청북도에서 자랐다고 한다. 어머니는 다행히 태어난 곳에서 쭉 자라셨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나를 낳았으니, 1번과 2번을 종합해 꼭 고향을 찾자면 충북 청주 정도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다만.
그곳에서의 좋은 기억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열세 살 되던 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래도 명절 연휴에 외갓집에서 사촌들과 함께한 추억이 있었다. 전통가옥과 서양식 단독주택의 중간쯤 되는 외갓집은 내가 경험한 몇 안 되는 마당이 있는 집이었기에, 영원히 잊히지 않을 마당을 품은 집에 관한 심상의 연원이 되어주기도 한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추석에 대청마루에 펼쳐 놓은 커다란 모기장 속에서 사촌들과 잠을 자던 일, 밤이 되면 뒷마당 한 구석에 있던 재래식 화장실에 가기 위해 사촌동생을 꼬셔야 했던 일 등은 그곳이 아니었다면 책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이 꽤 강렬했다 하더라도 다 합해서 열 번도 채 안 되는 머무름이었고, 그곳에 가지 않은 지가 30년이 되니 이제는 그 동네를 고향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그렇다.
새로운 추석 풍경 속에서
변하지 않을 것 같아 지루함 마저 느껴지던 추석 명절 풍경도 어느덧 많이 달라졌다. 부모님의 나이가 여든을 넘어갈 즈음이 되니 그 변화는 갑작스러울 정도로 크게 다가온다. 시댁은 원래 집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아서, 명절이면 늘 그렇듯 가족들이 모여서 한 끼 식사를 함께 하고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친정 엄마는 홀시어머니의 외아들과 결혼해 집안이 잘 되기 위해서는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장착하고 살아오셨다. 그랬던 엄마가 이제 차례상을 차리지 않게 되면서, 평화로움은 갑자기 찾아왔다.
추석을 맞아, 살다보니 자주 왕래하지 못하는 자식이 성인이 된 손주까지 데리고 찾아간 노년의 부모님은 아이처럼 기뻐하신다. 차례상을 차리느라 녹초가 되지 않은 엄마가 반갑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여러 해 동안 그렇게 말려도 안 되던 엄마의 정성 가득 차례 음식 준비가 이제 거룩한 역사 속으로 새겨져서 얼마나 기쁘고 다행인지. 이제는 명절 연휴에 나의 조부모님을 모신 납골당으로 두 분이 나들이 겸 인사를 다녀오는 것이 조상을 기리는 일이 되었다.
대신 우리를 기다리며 엄마는 정성을 다해 잡채를 만들어 놓으셨고, 우리가 잘 먹는 홍어무침을 줄 서서 사놓으셨다. 음식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니 그 지루한 줄서기조차 신이 나셨다 한다. 나는 평소 예쁘고 건강한 상차림용으로 자주 해먹는 불고기 배추말이를 십 인분 쯤 만들어서 양가에 가져가 나누었다. 이 음식들은 서로 긴 연휴에 먹으라고 전하고는 집에서 상을 차리지 않고, 아빠께서 미리 예약해 둔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차로 10분쯤 가다보니 온통 초록이 성성한 좁은 길이 나왔다. 행주산성 근처에 식당들이 줄지어 서 있다. 나는 벌써부터 이 길이 좋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먼저 도착해 계신 부모님과 주차장을 걸으며 대화를 나눈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와 본 게 언제인지에 대해서 사뭇 진지한 대화가 오고 간다. 부모님은 분명 내가 전에 왔었다고 하시고, 나는 이곳이 처음이라고 우기고. 그러다가 남편에게 와본 기억이 있는지를 물었다가, 아니다, 여기는 ‘쟤(나) 결혼 전에만 몇 번 왔었다’고 다시 정정하신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나는 와봤고 남편은 초행인 걸로, 그러나 나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걸로.
'고향' 3.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기억은 못하지만, 나는 그곳이 좋았다. 아주 쏙 마음에 들었다. 그곳은 아빠께서 한참 직장 생활하실 때 회식으로 많이 다니셨다고 하니, 30년도 더 된 곳이다. 사실 그 음식점이 기억 안 나는 것과 별개로, 어릴 적 나의 아빠는 그렇게 우리들을 데리고 서울이 아닌 것 같은 초록들 사이로 많이 다니셨다. 빌딩숲을 벗어나 남산으로 올라가 툭 트인 산 아래를 내려다보곤 했고, 야트막한 산들을 어린 딸들과 함께 오르곤 했다. 나는 그곳들을 잊지 못한다. 잊기는커녕,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 공간들, 장소들, 그곳에서 내가 느꼈던 별스러운 강렬함들이 더욱 또렷이 나의 몸에 새겨져서 나를 깨운다. 이제 나의 나이가 그때 우리를 데리고 서울 안에서 숨통 트일 곳을 찾아다니던 아빠의 나이가 되고 보니, 내가 그 발걸음을 따라 나서고 있음을 발견한다.
44년생 아빠는 어린 시절을 지금의 도시와는 아주 다른 곳에서 보내셨으리라. 사방이 논과 밭, 그리고 내와 천과 멀리 산이 보이는 곳에서 살다가, 가장이 되어 어린 두 딸과 아내, 홀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터를 잡았던 서른의 아빠를 상상해본다. 요즘의 젊은 아빠들과는 달랐던, 80년대 나의 아빠와는 소소하게 일상에서 함께 한 기억이 별로 없다. 대신 어쩌다가 한 번씩 주말에 가족과 함께 나섰던 곳이 어린 딸에게 특별히 더 진하게 새겨졌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아이들의 시간 경험은 어른과는 다르다고 한다. 특히 10세 이하의 아이들에게 시간은 우리 어른에게처럼 유동적이고 계속 흘러가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가 지속될 것처럼 느끼고, 현재의 공간에서 그곳의 느낌을 그대로 즐기고 흡수할 수 있다. 이렇게 어린 아이들의 시간에 대한 감각이 장소에 대한 감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간과 장소에서의 경험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은 어른이 아이들보다 잘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아이들은 그곳에서 받았던 인상을 몸에 그대로 새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고향’의 사전적 의미 3번은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살면서 한번 씩 그리움으로 다가온다면, 그곳이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언제부턴가 이제는 나의 의지로 내 자신에게 좋은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어서 한번 씩 찾아 나서게 되는 곳들이 있다. 이번 추석에 그렇게 내가 요즈음 찾아서 떠나는 곳들이 어릴 적 아빠를 따라 다니던 서울의 한갓진 구석 같은 곳들과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빠가 어릴 적 몸으로 느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다시 내가 어릴 적 아빠를 따라 나섰던 나들이에서 몸으로 느꼈던 공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신기한 경험. 아빠의 고향을 타고 내가 사랑하는 곳이 된 ‘자연을 품은 공간들’에 대한 애정이 더욱 짙어지는 것이 이번 추석 명절, 고향을 떠올리며 내가 받은 선물이었다.
글쓴이 김근영
공간을 느끼고 사유합니다.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30대와 40대 초 타국과 타지역에서 거주하며,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한 가족의 주부로 살았습니다. 다시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온 지금, 다양한 공간을 넘어 다니며 의문을 품었던 것들에 대하여 공부하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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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마일
글을 읽다보니 고향에 온듯합니다. 지금은 안계신 부모님도 생각나고 향수도 느끼게 되서 힐링이 됩니다.
kyk
힐링이 되셨다니 기쁘네요:) 생각하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대상이 있다는 건 영원한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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