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꼬리치며 나만 쳐다봐주던 우리 집 강아지 초롱이가 아파서 갑자기 죽을 때, 어린 나는 수의사가 되기로 진지하게 마음먹었다. 유년 시절 부모님은 분명 나를 사랑했다고는 하는데 그 사랑의 방식이 내 마음까지 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나만 졸졸 따라오며 포근히 안기는 털뭉치 초롱이가 솔직히 부모님보다 훨씬 더 좋았다. 그 시절 부모에게 채워지지 못한 오랜 결핍은 성인이 되어 하나둘씩 툭툭 튀어나오며, 그제야 나는 남과의 차이점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특히, 나는 ‘넌 충분해.’ ‘너 정말 잘하는구나.’라는 말을 들을 때면 그때부터 나의 기준이 아닌 상대의 기준에 더 신경을 쓰며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유독 욕망한다. 또한 ‘넌 능력 없어.’ ‘너를 싫어해.’라는 말을 참 견디지를 못하는데 그 역시 인정과 사랑을 끝도 없이 갈구하는 밑 빠진 독을 마음속에 오랜 시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의대 졸업 후 나는 바로 동물병원을 개업할 형편이 못되어서, 월급을 많이 준다는 기업에 입사해서 돈을 먼저 벌기로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어느 날 수술복을 입고 거대한 말의 배를 칼로 열어 수술을 하는 상사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게 되었다. 정말 빛나 보였다. 이 회사에서도 동물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다고 각인된 날이었다. 심지어 내 이야기에 귀를 잘 기울여주고, 내가 일을 잘한다고 칭찬도 해 주었다. 그렇게 동물을 치료하는 능력을 장착한 사람이 살짝 날린 칭찬 멘트 하나가, 결핍이 많던 나를 건드렸다. 그 결핍은 내가 상사에게 ‘능력’을 배워 ’인정‘ 받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후부터 나는 내 기준보다 상사의 기준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하며 회사를 계속 다니게 되었다.
내가 인정을 받으면 동물의 치료 기술을 전수받게 되어, 죽어가는 동물을 수술하며 살리는 멋진 주인공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나는 여자 선배들이 했던 마취 업무를 이어받아 자연스레 그 일부터 시작했다. 수술 전 준비, 수술 중 여러 심부름, 수술 후 정리와 청소까지 해주는 일련의 업무를 해도 ‘수고했다’는 그 말 한마디에 그저 좋았다. 허나 시간이 한참 지나도 나는 늘상 그 자리였고 어느덧 수술복은 남자 후배들이 먼저 입게 되었다. 나도 그 후배들처럼 해외 연수를 다녀와서 능력을 갖추면, 이제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기대를 했던 게 내 비틀어진 착각이었다.
뮤지컬 '호프(HOPE):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은 현대 문학 거장의 미발표 원고를 둘러싼 재판과 평생 원고만 지키며 살아온 78세 에바 호프의 삶을 그리는 국내 창작 뮤지컬이다. 주인공 에바 호프는 그저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은 평범한 아이였고, 호프를 지켜주는 우산인 엄마가 항상 곁에 있었다. 어느 날 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엄마의 연인인 베르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가 아끼던 친구의 '미발표 원고'를 맡아 달라고 엄마에게 부탁하고 헤어진다. 그때부터 엄마는 지긋지긋한 전쟁 동안 그 미발표 원고를 보호하는 데에만 집착했다. 엄마는 사람들이 꽉 찬 피난 트럭의 빈자리, 당연히 어린 호프가 앉아야 할 그 자리에 딸 대신 원고를 먼저 얹어 놓았다. 수용소에서도 호프는 엄마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으나, 엄마는 약속했던 그 원고를 지키는 데에만 집착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재회한 베르트에겐 이미 다른 가족과 새 삶이 있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현실을 부정한 채 원고만 껴안은 채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임상 연수에서 돌아온 나는 동물병원 부서 근무를 희망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곧잘 이해해주며 나를 인정해 주던 사람에게 실망감을 줘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더 컸다. 내 마음을 살피기보다는 상대방을 더 살피는데 급급했고 버려질까봐 두려웠다. 여전히 그렇게 나는 ‘인정’과 ‘능력’을 더욱 욕망하며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근무 첫날 오랜만의 재회에 나는 참 반가웠는데 그날부터 분위기가 묘하게 냉랭했다. 한참의 불편한 시간을 거치다 상대가 꺼낸 말은 "수술은 리더가 해야 하는데 너는 리더가 될 자격이 없어 보인다."라는 칼이었다. 그 칼은 내 밑 빠진 독을 무참히 깨부쉈고 나는 와장창 무너졌다. 그래도 상실감과 배신감을 애써 다잡으며 병원 일을 했다. 겉으로는 무리 없이 굴러갔으나, 나는 점점 우울이 심해졌고 술과 폭식이 반복되었다. 직원들은 방관했고 나는 표현을 감췄다. 그런 위계질서의 조직 사회였다. 그렇게 먼지처럼 굴러다니던 어느 휴일, 나는 전화로 타 부서 발령을 난데없이 통보받았다. 그리고 바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밖으로 내던져졌다.
어린 호프는 과거를 사는 엄마가 지긋지긋해서, 결국 엄마를 버리고 내 삶을 살겠다고 뛰쳐나갔다. 하지만 20년의 세월 동안 세상은 호프를 휘두르고ᅠ짓밟았으며 만신창이 노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미 엄마는 하늘로 떠났고 남은 건 엄마가 남긴 짜증나게도 따뜻한 코트와 빌어먹을 그 원고뿐이었다. 호프는 엄마도 뺏기고 인생도 뺏게 한 그 원고를 경멸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스스로 잘 살겠다고 나갔다가 결국 다시 볼품없이 돌아온 호프 자신이었다. 그래서 호프는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도 존재의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내가 엄마도 추워 죽게 만들었고, 수용소에서 사람도 죽게 만들었고, 원고 일부도 독일인에게 팔아넘겼다. 다 나 때문이고 어차피 망한 인생이다.’ 그렇게 호프는 자책하며 본인을 벌주며 살기로 한다. 호프는 남은 인생을 포기하며, 엄마처럼 남겨진 원고만 붙들고 살기 시작한다.
나 역시 타 부서로 갑자기 옮겨진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벌주기를 자처했다. 새로운 부서는 한직은 아니었지만, 인정을 갈구했던 사람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껴져서 그랬던지, 모두가 나를 미친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망상까지 이르렀다. '쟤는 뭐를 잘못해서 저렇게 쫓겨난 거야?'라는 내가 만든 질문이 매시간 귀에 울려댔다. '왜 전보 첫날부터 나를 밀어냈을까?' 의문이 초단위로 나를 괴롭혔다. 그러다 결국 그 원인을 나에게로 돌리기 시작했다. 상대가 맞고 내가 틀렸다고 나 자신을 벌주기 시작했다. '너를 제외시킨 것은 네가 문제가 있어서 그랬던 거야. 눈치 없이 적당히 물러서지 않고 팔딱거린 네 탓이야. 네가 그러니깐 주위에서 너를 싫어하는 거야. 너 때문에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어. 너 하나 때문에!' 도무지 영문을 모르니 그냥 내가 나를 벌주는 게 제일 쉬웠던 것 같다. 항변해 봤자 잘 되지도 않고, 그냥 나를 나쁜 년으로 만드는 게 내 속이 편했다. 하지만 마음 저 속에는 어린 호프가 울고 있었다.
ᅠ‘왜 나를 사랑 안 해? 거긴 내 자리였어. 피난 트럭에서 빈자리는 당연히 내 자리였다고!’ 아직도 모난 부분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가리려고 애쓰는 중에 내 안의 어린 호프는 저리 서럽게 외치고 있었다. ‘나 추워. 나 외로워. 제발 나 좀 잘 살았다고 말해줘.’ 저렇게 처절히 외치는 내 안의 어린 호프를 따뜻하게 안아줘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당시 내가 설령 실수하고 부족하고 남에게 폐가 되었을지언정, 그래도 무조건 내 편이었어야 하는데 그 시절의 나는 나를 외면했다. 본인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익숙한 채로 오랜 시간 살아온 78세 호프에게, 법정은 결국 미발표 원고의 소유권 공방에 대한 이런 판결을 내린다.
“당신이 상속받은 재산은 에바 호프뿐이다. 당신의 인생은 그 누구에게도 팔아넘길 수 없다. 당신은 누구보다 당신을 잘 지켜줘야 한다. 당신은 떠날 수 있고 당신은 돌아갈 수 있다. 다만, 당신이 돌아가야 할 곳은 반드시 너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홀로 오랜 시간 방황하던 외로운 78세의 호프는, 그제야 원고를 떠나보내고 새 삶을 살아가는 선택을 하며 극은 끝난다. 한 가지를 위해 인생을 바친 여자가 그것마저 잃으면 삶을 잃을까봐 두렵고 무서울 것이다. 하지만 그거 하나 잃는다고 해서 삶이 부정당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인 자기 자신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로 끝나는 이 뮤지컬을 수차례 관극하며 나는 그 겨울 참 많이도 울었다. 사회생활 하며 믿고 따랐던 사람의 ‘인정’과 수의사로서의 ‘능력’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게 두려웠다. 그저 그 소중한 것이 내 인생 같았고 그것을 잃는 게 두려워서 피해의식과 자책으로 왜곡되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 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나 자신을 포기하면 안 되고,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일생인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호프 여사는 나를 꼭 안아주고 떠났고, 차가운 눈 속에 머물러 있던 나에게 ‘넌 충분하고 이미 잘 견뎌왔다’라고 따스하게 안아주고 토닥여줬다.
그렇게 뮤지컬 호프 초연과 재연을 보면서 마음에 물을 주던 몇 해가 지났고, 많은 시간이 흘러 나는 어쩌다 다시 원래의 동물병원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운 좋게 후배 수술자에게 배워가며, 현재는 내가 말의 배를 칼로 여는 수술자로서 죽어가는 동물을 살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보다 훨씬 감사한 일은 결핍을 남에게 갈구하지 않는 내 마음이다. 돌아보면 오히려 일련의 상황 덕분에 마음속의 밑 빠진 독을 발견하여 스스로 천천히 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예방주사 덕분에 내 결핍을 남에게 집착해서 메꿀 수 없음을 진정으로 배웠다. 용기 내어 집착을 버렸는데 오히려 기회가 주어졌다. 그냥 내 일상에 집중했는데 어느새 내 길에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을 끝도 없이 사랑하고 인정해 주면서, 마치 내 강아지 초롱이가 나를 천진한 눈망울로 무한정 쳐다봐준 것처럼, 내 욕망의 뿌리를 하나하나 바라봐 주고 안아주는 방법을 습득하며 성장하고 있다. 이렇게 초심을 잃지 않고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점을 중심으로 나를 인정해 주며 살다가 먼 훗날 하늘에서 호프 여사를 꼭 만나고 싶다. 그래서 우리의 욕망과 집착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소중한 매일의 일상들을 깔깔대며 나누며, 나는 내 튼튼하고 견고한 독 안에 충만히 담긴 여러 가지 사랑을 보여주고 싶다. 옆에 누가 나를 못나고 싫다고 한다면, 이제 나는 그저 ‘흥’ 하고 메롱 하면 그만이다. 곧 뮤지컬 호프 삼연이 돌아온다. 이번에는 제법 다른 마음가짐으로 호프 여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참 설렌다.
* 글쓴이 - 김아람
소개제주에 거주하는 18년차 말 수의사입니다.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제주 말 수의사의 말 이야기'를 밀도있게 쌓아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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