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 일곱,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 집안의 둘째딸로 태어난 지은이라는 사람이 적어도 7가지가넘는 ‘업(業)’이라는 것을 넘어가는 과정 속 시간, 비용 두려움이라는 존재와 싸우며 부캐(부캐릭터)를 얻어간 순간의 이야기들.
이전 레터에 이어지는 이야기라 살짝 요약 먼저 합니다. 😊
유학을 꿈꾸며 토플 학원에 매일 도장을 찍던 2008년,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연달아 만났다. 갑작스런 아빠의 퇴직으로 가세는 점점 흔들거렸고, 두번째 IMF라 불리던 리먼브러더스 사태까지 터져 환율은 천장이 사라진 듯 솟아 올랐다.
나는 도미노처럼 무너져 가는 현실 앞에서 유학 대신 이력서를 화려하게 채워 빨리 취업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대외활동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약 16년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즈음의 어느 날이었다. 백여명의 대학생이 넓은 회의실을 가득 채우고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환호성을 지르는 중이다. “마케터 지은이님” 내 이름 세 글자와 초록색 W기업 로고가 박힌 빳빳한 명함이 두 손위에 올려졌다. 해외 탐방을 보내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밤동안 손톱을 뜯어가며 이력서를 쓰던 때가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벌써 비행기를 탄 것 마냥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때는 기업이나 기관에서 적으면 서울 경기권의 열댓 명, 많으면 전국에서 백여명이 넘는 대학생 홍보대사, 마케터를 뽑아 홍보를 활발하게 하던 시기였다.
실제로 6개월 전후 계약직 대학생 마케터일 뿐이었지만, 마음은 이미 열혈 신입사원이었다. 여러 학교에서 모인 또래 친구들과 그룹이 되어 2~3주에 한 번씩 기업에서 제시하는 프로젝트 미션에 참여했다. 경쟁 PT를 준비하기 위해 1박 2일간 밤을 지새워도 끄덕 없었다. 커다란 화이트 보드에 여러 명의 목소리가 섞인 아이디어를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기업 홍보를 한다며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광대가 한껏 올라간 환한 표정으로 “안녕하세요~”로 시작하는 말을 내뱉었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 본 기억조차 없던 나였는데 말이다. 어느새 닥치면 무엇이든 해보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나의 대학생활은 외국에서 책을 쥐고 공부하는 모습 대신 학교 밖에서 뛰고 소리친 순간이 퍼즐 조각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처음에는 우물 밖 개구리처럼 세상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두려웠다. 하지만 한발 더 내디딜 수록 알록달록 총 천연색 사탕이 가득한 놀이공원에 온 것 같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쏟으니, 덤처럼 상장과 쏠쏠한 상금, 예상치 못한 비행기 표까지 따라왔다. 여행 아닌 봉사활동으로 캄보디아로 날아갔을 때는 비오는날 흙도 날라 보았다. 오지 한가운데에서 땀을 흘리다 바다 수평선이 아닌 푸르른 초원 수평선을 본 때가 아직도 눈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관광으로는 절대 남길 수 없는 기억들이다.
3학년이 될 즈음에는 ‘독도아카데미’라는 활동에 빠져들었다. 전국에서 모인 또래 친구들과 명동 한복판에서 교복을 입고 3.1절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얼굴이 조그맣게 신문에 실리는 신기한 경험도 따라왔다. 이때 그룹원 친구들이 모인 카카오톡 단체 톡방은 15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알람이 울려댄다. 대외활동을 시작했을 뿐인데, 돌아보면 전국구의 친구들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직업까지 얻는 기회도 만났다. 독도 단체 카톡 멤버 중 한 명이 나에게 삼 년전 창업을 제안했고, 지금은 대표님이 되어 함께 일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대학교 2-3학년, 이십대의 나는 학교, 아르바이트, 대외활동을 병행하느라 몸이 피곤한 것 말고는 꿀처럼 달달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다시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기억도 함께 따라온다. 당시 참여했던 대외활동 '들' 을 다 합치면 다섯 손가락이 훨씬 넘는 듯하다. 기억에 남지 않은 순간도 있었다는 말이다. 처음 마케터 명함을 받았던 W 마케팅 프로그램에서는 두 눈에 불을 켜고 활동하던 나같은 사람 외에도 소위 ‘프리라이더(노력이나 참여를 하지 않는 사람)’ 들도 있었다. 가끔 그들을 보며 ‘굳이 왜? 열심히 하지 않을 것이면 다른 이에게 기회나 주지'라는 생각을 한 때가 있었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은 무덤덤 이란 감정을 전달해 주었고, 어느 샌가 또 다른 그룹에서 프리라이더가 된 나를 발견했다.
‘무엇이든 과하면 탈이 난다’라는 말이 그 순간의 정확한 비유인 것 같다. 어느 순간 부터 이력서를 빼곡히 채우는 대외 ‘활동’이 아닌 이력서 한 줄을 긋는 ‘행동’을 나도 가끔 하고 있었다. 물론 마음이 조급하고 바쁜 여러 상황이 핑계가 되긴 했지만, 나도 또 다른 이의 소중한 기회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두근대는 심장을 가진 대학생이 아니라 나 자신도 어색하게 느끼며 바라보던 이들과 비슷해 질 즈음 이제는 그만해야 할 때가 된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4학년, 교생실습이 곧 시작될 순간이 다가와 숨가쁘게 달려오던 대외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반짝이던 기억과 감추고 싶은 기억이 동시에 소환되는 순간이다. 그때의 나는 대외 활동 경험이 쌓일수록 ‘이렇게까지 하는데 취업이 안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더해서 불안감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날에는 여력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밤잠을 쪼개며 새로운 대외활동을 찾아 모니터를 환하게 켰다. 즐거움과 불안 사이 안전하게 시소를 타는 것은 어려웠다. 여러 개의 일을 할 수는 있어도 동시에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편안하게 밤을 보낼 수 있었을까.
내가 할 만큼의 몫을 정확하게 파악하긴 어려워도 넘칠 만큼은 하지 않아야 한다. 자주 반복하지만 아직도 완벽히 삶에서 지켜지지 않는 문장이다. 하지만 가끔은 의식적으로 애쓰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말이다. 튀어 오를 듯한 생생함과 약간의 아쉬움이 공존하는 나의 대학 시절은, 봄 햇살에 반사 되는 물결처럼 내 기억속에 반짝이며 흘러가는 중이다.
* 지은이
호기심쟁이라 여러 일을 넘나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임원, 심리상담사, 학생, 작가' 네 가지 '직업(業)'을 병행하며 순간의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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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공이
내가 할 만큼의 몫을 정확하게 파악하긴 어려워도 넘칠 만큼은 하지 않아야 한다 이말이 정말 와닿네요!!😊😊 한창 바빴던 그 때의 지은님이 있어서 지금의 여유와 쉼을 알아갈 수 있는 지은님이 되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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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을 맞추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당공님 항상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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