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색, 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지난 호에 이은 '마지막 편'입니다. 1, 2편 글의 링크는 글 하단에 있습니다.
왕치아즈(탕웨이)는 이(양조위)가 초대한 보석 상점에 도착한다. 왕치아즈는 자신을 이곳에 부른 이의 의중을 알지 못한다. 이때 상점 주인이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이 이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며 보석을 하나 고르라는 말을. 그러니까 이것은 이의 고백. 그는 자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왕치아즈를 이곳에 초대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날이 찾아온다. 왕치아즈는 이와 함께 상점에 도착한다. 세공된 반지를 보기 위해서. 주변에 잠복하고 있는 저항군들의 긴장도 최고조에 오른다. 왕치아즈는 이 모든 상황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
이 순간. 바로 이 순간에 도착하기 위해 모든 이들이 달려왔다. 왕치아즈는 목숨을 걸고 숱한 고행을 겼었고, (왕치아즈가 연기한) 막 부인은 이와 사랑에 빠졌으며, 저항군은 온갖 탄압을 견뎠다. 이는 위험을 감수하고 막 부인에 대한 사랑을 맘 밖으로 꺼내놓았다. 모든 이들의 욕망과 갈망이 맞부딪히며 폭발하는 순간.
상점에서 이는 말한다. 반지가 아니라 그걸 낀 당신의 손을 보고싶었다고. 그리고 반지를 낀 그녀의 손을 영화가 화면 가득히 담는다. 이의 염원에 카메라가 응답하는 순간이자,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다. 그 순간 잠자코 있던 왕치아즈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에게 말한다. 도망가세요. 뒤늦게 뜻을 알아챈 이는 왕치아즈를 홀로 남겨두고 정신없이 상점을 뛰쳐나간다.
이 순간은 왕치아즈는 그녀의 분신인 막 부인에게 압도됐다고 말 할 수도 있고, 그녀가 조국과 동지들을 배반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보는 이에 따라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겠다. 다만 하나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어떤 가치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이 장면을 마주한 것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현실의 잣대를 들이밀며 그녀의 선택을 심판하려 한다면, 이 장면의 고유한 빛은 바래고 만다. 오히려 현실과 분리된 스크린 위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찬란한 한 순간을 목도하기 위해 관객인 우리는 이 장면에 도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감정도 사랑일까. 이렇게 처참한 바닥에서 피어난 감정도.
어찌보면 왕치아즈의 사랑은, 한 여자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감정일지 모른다. 선배를 좋아했지만, 여자로서의 첫 경험은 그의 동료와 하게 되었고, 선배의 고백은 뒤늦은 타이밍에 비겁하게 도착한다. 그 후에 일생일대의 사랑을 만나지만, 그 본질은 살육을 위한 연극일 뿐. 강제적 관계를 견디고 홀로 기다린 끝에 사랑을 얻어내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국과 동지를 버려야 한다. 자신의 목숨조차도.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 선택으로 나아간다. "도망가라"는 말은 이 영화에서 왕치아즈가 (누군가의 지시없이) 주도적으로 행한 유일한 사랑의 행위이다, 연극을 좋아하던 소녀 왕치아즈가 막 부인으로 분해 무대에서 내뱉은 마지막 대사는 스크립트를 벗어나고 만다. 그녀는 이 한 마디의 댓가를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처참하도 이것이 그녀의 사랑이고, 세상 모든 비난을 받게 되어도 이것이 그녀의 선택이다. 거기에는 인생을 내걸어 자신의 역할과 사랑을 완수하려는 자의 순수하고도 생생한 결의가 베어있다. 그게 너무도 애틋하고 아름답다고. 나는 그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상점에서 나온 왕치아즈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거리를 이리저리 방황한다. 마지막 선택까지 감행한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연극 무대에 선 학생 시절의 왕치아즈를, 무대 밖의 선배들이 부르는 장면이 짧게 삽입되어 있다. 그렇게 왕치아즈의 연극도 막을 내렸다는 뜻일 것이다.
연극단 멤버들은 모두 잡히고 심문에 쉽게 무너진다. 모든 일을 계획하고 지시한 우 영감은 홀로 도망친다. 왕치아즈에 대한 심문만 남은 상황. 이미 사실관계를 파악했기에 왕치아즈까지 심문할 필요는 없다고 이는 말합니다. 미약하고도 슬픈 애정의 표현 방식.
마지막, 그녀가 머물던 방에 앉아있는 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랑도 어느새 저물고, 침대 시트에 잡힌 주름만이 그녀가 이곳에 잠시 존재했음을 은밀하게 속삭인다.
좋은 영화들은 종종 각본과 연출의 잠재력을 뛰어 넘어, 신비로운 어느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고는 한다. 내게 <색, 계> 그런 영화다. 아주 드문 이야기도 아니고, 아주 뛰어난 연출도 아니건만 이 영화에는 어딘가 모를 신비가 묻어있다. 그건 가장 적당한 시기에 딱 맞는 배역을 만난 배우들이 뿜어내는 찬란한 에너지에 어느 정도 빚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색, 계>는 늘 내게 애틋하다.
좀 다른 말이지만, 이 영화에서 치파오나 트렌치 코트를 입고서, 챙모자를 쓴 채로 새빨간 입술을 한 탕웨이는 고혹의 화신같은 모습으로 기적 같은 매력을 뿜어낸다. 그리고 양조위는 말할 필요가 없는 단단한 연기와 특유의 깊은 눈빛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주조한다. 그렇게 양조위가 깔아놓은 튼튼한 무대 위에서 탕웨이가 아름다운 춤을 춘다. 영화사에서 쉽게 보기 힘든, 잊을 수 없는 앙상블이다.
오늘 밤에는 다시 영화를 틀어야겠다.
- 이것이 나의 사랑 <색, 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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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 연애하는 영화
연애 영화를 한 편씩 꼽아 함께 들여다보며 인간의 감정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에 관한, 그보다는 마음에 관한, 사실은 당신과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공간.
[필자 소개] 홍수정 영화평론가
혼자서 영화와 글을 좋아하다가 2016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 활동을 시작했어요. 잡지와 웹진에 영화, OTT, 문화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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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왜 사랑했을까 - 영화와 함께 예전 연애 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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