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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할머니를 아시나요?_오늘도 새록새록_진솔

2024.03.13 | 조회 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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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맥도날드 할머니_SBS <궁금한 이야기 Y>
맥도날드 할머니_SBS <궁금한 이야기 Y>

 

맥도날드 할머니와의 첫 만남

유난히 사람이 많아 카페에 자리 잡기가 힘들었던 2007년의 어느 저녁이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광화문에 있는 영어 학원에 다녔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같이 수업 듣는 친구와 함께 근처 카페로 가서 영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한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겨우 자리를 잡았다. 가방에서 교재를 꺼내며 한숨을 돌리는데 창가 쪽에 앉아 있는 어떤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흰 머리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할머니였다. 땋은 것 같은 머리가 트렌치코트 깃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신문 읽기에 열중했다. 이 시각에 카페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생소했다. 신문 아래로 할머니의 짐인 것 같은 쇼핑백 두세 개가 바닥에 놓여있었고 쇼핑백 안에는 신문과 책이 빼곡히 들어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할머니가 읽고 있는 신문은 영자신문이다. 나는 다급하게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친구에게 신호를 보냈다. 저 할머니 좀 봐. 친구의 놀란 눈을 마주하고 다시 그 할머니를 봤을 때 호기심은 소름으로 변했다. 트렌치코트 밑단 아래로 할머니의 머리채가 꼬리처럼 빠져나와 있었다.

 

방송에 나온 맥도날드 할머니

2010년, SBS <궁금한 이야기 Y>가 이 할머니를 취재했다. 방송에서는 이 할머니를 '맥도날드 할머니'라 불렀다. 할머니가 날마다 맥도날드에서 밤을 지새웠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저녁 일곱 시부터 새벽 네다섯 시까지 맥도날드에서 머물렀다.

할머니는 십 년째 집 없이 광화문 일대를 떠돌아다니는 노숙자였다. 말할 때 영어를 섞어서 쓰는 습관이 있었는데, 피디가 "여기에 밤에 오시는 이유가 특별히 있나요?" 라고 묻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이거는 마이 시크릿. 나의 프라이버시."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할머니의 놀라운 과거가 밝혀졌다. 할머니는 한국외대 불어과 출신으로 노숙 생활을 하기 전에 외무부에서 이십 년 가까이 일한 재원이었다.

2022년, 한은형 작가는 이 방송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쓴 소설 『레이디 맥도날드』를 출간했다. 방송에서처럼 소설에서도 피디가 할머니의 정체를 취재해 나간다. 방송과 소설의 내용이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방송만 봐도 무방하다. 맥도날드 할머니의 실제 이름은 ‘권하자’였지만 소설 속 할머니의 이름은 ‘김윤자’다.

 

소설 속 이야기

김윤자 할머니에게는 매일의 루틴이 있다. 맥도날드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 네다섯 시쯤 교회에 간다. 교회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는데, 아무도 없는 시간인데도 할머니는 결코 눕지 않는다. 앉아서 기도하고 기도하다 잠이 쏟아지면 앉아서 존다. 그러다 아침 여덟 시 사십 분쯤 할머니는 스타벅스에 도착한다. 할머니는 오늘의 커피를 숏 사이즈로 주문하고 이지니(Isigny) 버터를 추가로 주문한다. 커피에 버터를 넣고는 잠시 뒤 노란 버터 덩어리를 건져 먹는다. 그리고 버터가 녹아난 커피를 천천히 마신다. 낮에는 종종 일본 문화원에 가서 무료로 상영하는 영화를 본다. 저녁에는 다시 맥도날드로 간다.

할머니의 한 달 생활비는 이십만 원. 할머니가 다니는 교회의 어느 마음씨 좋은 교인이 매달 할머니에게 이십만 원을 주고 있었다. 할머니는 교인이 준 이십만 원으로 삼 일에 한 번씩 스타벅스의 커피와 버터를 사먹었다.

할머니는 피디에게 방송 출연에 대한 대가로 밥을 사달라고 한다. 할머니는 자신이 외무부에서 일하던 시절 즐겨 찾았던 프렌치 레스토랑에 다시 가고 싶었다. 피디와 함께 간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다운 음식을 먹고 할머니는 깊은 만족감이 온몸에 차오른다. 식사를 하고 나서는 호텔 앞에 정차하고 있던 모범택시를 타고 어디론가로 다시 떠난다.

방송을 본 고교 동창, 대학 동창, 외무부 근무 시절 동료들이 할머니를 찾아왔다. 다들 할머니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거처를 제공하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거절하며 말한다. 자기들 마음대로 마련하면 그만이야? 그 모든 것을 내가 캔슬한다. 모두 캔슬한다.

할머니는 피디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 짝을 만나고 싶으시다고요? 그럼 그 짝이 나타나면 결혼해서 같이 사실 생각도 있으세요?

- 물론, 물론. 그 분은 또 평범한 분이 아니시잖아요. 이 세상을 지휘하게끔 만드는 그 지도자의 역할, 그게 내 파트너란 말이에요.

할머니에게는 치매 증세가 있었다.

할머니는 파트너를 만나지 못하고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죽었다. 눈 내린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환경미화원이 할머니를 발견했고 발견 당시 할머니는 149센티미터에 33킬로그램으로 영양실조 상태였다.

 

노숙 할머니인가 '레이디'인가?

작가는 할머니를 ‘레이디’라고 칭했다.

맞다. 레이디의 집은 거리였다. 거리의 카페와 패스트푸드점이 레이디의 응접실이었고, 교회가 레이디의 침실이었다. 패스트푸드점 열 시간, 교회 네 시간, 커피 전문점 네 시간. 매일같이 레이디는 이곳들을 오가며 자신의 삶을 살았다. - 『레이디 맥도날드』, 322쪽 -

그리고 "어떤 의도도 없었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울리는 퍼포먼스를 매일같이 수행했던 퍼포머. 위대한 퍼포머."라고도 했다. 그리고 책 뒷표지에 실린 백수린 소설가의 추천사는 이랬다.

그녀는 주거지와 가족을 잃었으나 스스로에 대한 예우와 우아한 삶의 태도를 잃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 매일매일을 수행하듯 살아간다. 나는 이 잘 읽히는 소설을 아끼는 사탕을 녹여 먹듯 천천히 읽어야 했다. 그녀가 못내 사랑스러워서. 그녀의 삶이 너무 애틋해서. 어떤 이의 눈에는 과거에 갇혀 사는 허영심 많은 여자일 뿐이겠지만, 그녀의 특별함이 "평범하다고 일컬어지는 삶의 방식"만 강요하는 이 폭력적인 세계에 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사는 일의 어려움과 귀함을 아는 독자들의 마음에 가닿기를 바란다.  - 백수린(소설가) -

나는 맥도날드 할머니가 사랑스럽다거나 그의 삶이 애틋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혀. 하지만 한은형, 백수린 소설가가 맥도날드 할머니의 어떤 면을 높게 평가하는지는 알 것 같다. 이 소설을 읽기 전, 2013년의 어느 날에 맥도날드 할머니를 생각하며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던 적이 있다. 그 할머니는 바람직하진 않지만 굉장한 면이 있다. 그 할머니는 트렌치코트와 영자신문, 카페라떼가 자기자신이라 믿었고 그 믿음이 자신에게 엄청나게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작가가 맥도날드 할머니를 '의도치 않게 행위 예술을 하는 퍼포머'라고 표현한 것이 신선했다. 만약 그 퍼포먼스 작품에 제목을 붙인다면 ‘불안의 현시’ 또는 ‘추락의 공포’ 정도가 될 것 같다.

 

나와 맥도날드 할머니

로스쿨 입시에 두 번 실패하고 대형 로펌에서 임시직 비서로 일하고 있었던 2010년에도 나는 광화문에 있었다. 근무 시간은 정규직 비서가 퇴근하는 오후 여섯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였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용돈벌이하는 로스쿨 준비생이었지만 로스쿨 입학을 포기하고 나서는 그냥 아르바이트생이 됐다.

로펌 로비는 은은하게 빛나는 대리석과 고급스러운 그림으로 장식한 호텔의 로비 같았다. 로비를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퇴근길에 나는 종종 할머니를 마주쳤다. 처음 그 할머니를 만났던 게 대학생 때였는데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그 할머니의 행동반경 안에 있는 거였다. 참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깜깜한 밤이었다. 모두가 퇴근한 밤 열한 시의 광화문 일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적막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맥도날드 정동점이 있었다. 맥도날드의 형광등 불빛이 보도에 쏟아져나와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저렇게 꼿꼿한 자세로 졸고 있는 할머니라니. 나는 왜 그때 걸음을 멈추고 맥도날드 유리창 앞에서 그 할머니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그 할머니의 모습엔 외면할 수 없는 뭔가가 서려 있었다.

소설에서 피디가 할머니를 처음 만나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피디가 할머니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할머니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저 밖에 택시 아저씨도 선생님이잖아. 그찮아요? 그런 건 싫어. 내가 막…… 막…… 추락하는 것 같거든요.“

신분 추락. 트렌치코트를 입고 영자신문을 읽는 여자 노숙인. 그 어떤 추락의 실례가 퍼포먼스처럼 맥도날드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 할머니와 내가 다르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을까? 나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깜깜하고 고요한 밤에 길거리에 전시된 내 불안을 마주한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 할머니를 등지고 재빨리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디 맥도날드』 표지
『레이디 맥도날드』 표지

 

 

*글쓴이 – 진솔

어린이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독서교실 선생님입니다. 초등 아이 키우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오늘도 새록새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진솔의 브런치 – https://brunch.co.kr/@kateinthe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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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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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lix21

    1
    about 2 months 전

    저도 세종문화회관 뒤에 15년째 있는데...문득문득 생각나는 할머니였어요. 허세다 아니다 남편과 열나게 토론도 했었구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를 잘 설명하는 행동을 일반화나 분석으로 재단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소설로 나왔군요. 소개 감사드립니다.

    ㄴ 답글 (1)
  • 수영

    1
    about 2 months 전

    전자책 구입해놓은지가 언젠데 여즉 읽지도 못했네요. 진솔님 글 읽고나니 생각이 많아져서 그 책을 읽고 더 생각에 잠겨보고 싶어졌어요. 삶이 담긴 글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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