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여행자의 조직문화 탐사기

마지막을 떠올리며 오늘을 산다는 건_조직문화 탐사기_정연

2024.03.14 | 조회 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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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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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장생활 첫 팀장님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인사담당자로 일하면서 여러가지 힘든 상황들을 마주했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IMF 시절 정리해고를 하던 시기였다고. 어쩌면 인사담당자로서 가장 힘든 일은 누군가를 내보내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20년 가까이 지금까지 한 회사에서 일해온 나는 운이 참 좋았다. 주니어 시절 금융위기가 있었지만 크게 고용 불안을 느끼지 않고 그 고비를 지내왔다. 돌이켜보면 회사의 규모나 매출이 우상향하며 성장해온 덕이 컸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회사는 늘 ‘조직의 건강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그런 가운데에서 회사는 나이가 든 구성원들에게 조용히 퇴직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시니어 매니저가 되었을 때 나 역시 희망퇴직을 권고하는 면담을 하는 자리에 앉기도 했다. 어쩌면 인사담당자라는 명찰을 달고있는 이의 숙명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동안 팔십여명의 직장선배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면담을 진행하면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 <인생수업>에서 등장하는 상실과 이별을 마주하는 이의 다섯 단계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부정과 분노, 타협과 절망 그리고 수용이었다. 자신이 왜 권고사직 대상자 명단에 올랐는지부터, 얼마나 이 회사에 충성을 다했는지, 어떤 기여와 성과가 있었는지, 얼마나 배신감이 느껴지는지, 그래서 회사가 얼마를 줄 수 있는지까지, 많은 질문들 속에서 그들의 삶이, 고민이 여실히 보였다.


권고사직은 어쩌면 본질을 흐리는 ‘예쁜 말’인듯 싶다. 본질은 해고니까 말이다. 해고, 회사에서 이별을 통지받는 것, 그 회사에서의 삶이 종료되는 것. 그래서인지 해고를 마주한 이들의 얼굴에서 죽음을 마주한 이의 얼굴이 보였다. 과장처럼 읽힐 수 있는 이 문장이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참이다. 경직적 노동시장에서 이미 중년 후반부를 보내는 이들에게 삼십년 동안 근무한 회사에서 해고통지를 받는다는 건 죽음처럼 받아들여진다.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왔던 직장생활이 모두 부정되는 듯한 경험이어서 그만큼 끔찍하다.

회사에서의 삶, 더 나아가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마주하고 싶은가? 그 마지막을 선명히 그릴수록 지금,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할지가 명확해짐을 느낀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인생수업>이란 한 권의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도 결국 그게 아닐까 싶다.


얼마 전 목수이자 커뮤니케이션 코치인 김호 작가의 <오비추어리(Obituary)> 전시를 다녀온 적이 있다. ’오비추어리‘는 부고 기사를 뜻하는데, 작가는 그동안 해온 목공 작품과 드로잉으로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우유를 사거나 마실 때 유통기한이 얼마 남았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에게 얼마의 ’유통기간‘이 남아있는지 살핀다고 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에 인생에서의 마지막을 그려보며 살아가고 싶은 오늘을 만들어간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회사에서의 삶, 특정 조직에서의 삶 역시 언젠가 마지막을 마주하게 된다.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오늘을 대할 때 소중한 것들이 더 많이 보인다. 서로가 각자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오늘 하루, 이번 한 주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일해가는 조직은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까? 문득 궁금해지는 아침이다.

DALL·E3
DALL·E3

* 글쓴이

인생여행자 정연

이십 년 가까이 자동차회사에서 HR 매니저로 일해오면서 조직과 사람, 일과 문화, 성과와 성장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몸으로 답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지층처럼 쌓아두었던 고민의 시간을 글로 담아, H그룹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칼럼을 쓰기도 했다. 10년차 요가수련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을 인생여행자라고 부르며, 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는다. 현재는 H그룹 미래경영연구센터에서 조직의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다.

인생여행자 정연, 20년차 HR 매니저, 10년차 요가수련자, 15년차 아빠로 살아갑니다.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습니다.
인생여행자 정연, 20년차 HR 매니저, 10년차 요가수련자, 15년차 아빠로 살아갑니다.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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