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세 번째 정주행을 마쳤다. 누군가는 이 드라마가 병원을 무대로 한 ‘판타지’ 드라마라고 했다. 외모도 능력도 다 가진 금수저들이 ‘착함’까지 겸비했다며 너무하다는 리뷰를 본 기억도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병원에 들어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살짝 열어주는 이 드라마가 좋다. 짧은 순간 스쳐지나가며 우리가 쌓아왔을 의사에 대한, 간호사에 대한, 환자에 대한 단단한 오해의 벽을 조금씩 무너뜨리는 순간들을 선물해주기 때문이다.
어린이날 아빠를 잃은 꼬마를 위해 아빠의 이식수술을 10분 미뤄 자정 이후에 한다거나, 의학 용어가 가득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술에 대한 설명을 비의료인인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림과 비유를 사용해 전달하는 장면들을 보면, 다음에 병원을 찾을 때 이런 의료진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물론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의료진들은 99퍼센트의 확률로 99즈가 아니라 외래 진료실에서 질문을 하면 “의사보다 더 잘 아냐”고 면박을 주는 천명태 교수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이번 정주행에서 24개의 에피소드 중 제일 와 닿았던 장면은 절친의 간 이식 에피소드였다. 가족간에도 선뜻 하기 힘든 간 이식을 친구를 위해 하겠다고 두 남자가 찾아온다. 좋은 뜻인줄은 알겠으나 그 선의를 의심해야 하는 간 이식 코디네이터는 각종 서류를 요구하며 “제가 드리는 서류 목록들을 보면 ‘어쩌면 이렇게 없는 서류만 골라서 달라고 하냐’는 생각이 들 법합니다. 이해해요. 저는 두 분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봐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있는 이식 제도의 악용, 장기 매매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양해를 구한다. 드라마답게 두 친구는 서류 제출의 관문들을 모두 넘고야 만다. 그리고 고민어린 표정으로 정원에 앉아 있는 이식 코디네이터가 등장한다.
무슨 고민이 있냐고 묻는 간 이식 담당 교수 익준에게 이식 코디네이터는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다고 말한다. 학창시절부터 몇십년동안 지겹도록 붙어다녔던, 같이 놀 사람이 없을까 하는 걱정에 간을 이식해준다는 친구인데 왜 결혼식 비디오에 등장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도 이식 코디네이터의 입장이 되어 그동안의 둘의 모습을 의심의 눈초리로 리플레이하고 있었다. 이 때 익준이 던진, 절친이면 축의금을 받는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겠냐는 한 마디가 우리의 의심 렌즈를 내려놓게 한다. 실제로 비슷한 일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 장면에는 수많은 ‘만약에’의 순간이 숨어있다. “가족이 아닌 친구가 까다로운 조건에도 이식을 포기 하지 않고 모든 서류를 다 제출한다면,’ ‘제출된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고서도 계속해서 의문을 품을 에너지가 남아 있다면,’ ‘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동료가 있고, 그 동료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었다면,’ 기타등등, 기타등등의 중쳡된 ‘만약에’의 순간들 말이다.
그런면에서 보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현실의 탈을 쓴 ‘판타지’로 보는 시각이 그렇게 삐딱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가족간에도 이식을 ‘당연히’ 하지는 않고 인생이 달린 선택이라 말하는 시대에 절친에게 간을 이식해주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도, 모든 과정을 마칠 때까지 결심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쏟아지는 업무량과 부족한 시간을 생각해 볼 때, 하나의 케이스를 이렇게 오랫동안 검증하는 것도, 휴식시간에까지 고민하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참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업무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동료라니, 과연 ‘메디컬 판타지’라는 분석은 타당한 것 같다. 그런데 ‘판타지’라고 치부해버리기엔, 너무나 믿고 싶어지는 이야기다. 의사로서, 환자로서, 보호자로서 일상에 짓눌려 삼키고 말았던 수많은 아쉬움의 순간들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장면들을 보여주니까. ‘순도 100퍼센트의 현실’을 원한다면 드라마가 아니라 CCTV를 보면 되는 것 아닌가, ‘있을 법한 일들’이 이야기의 본질 아니던가 하는 샐쭉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오는 인물들을 자꾸 응원하고 싶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작은 친절, 한번의 관대함, 애써 지은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뒤흔들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그들처럼 순간의 다정함을 발휘하며 , 내가 만나는 누군가에게 마법같은 순간을 선물하고 싶다는 작은 다짐을 해본다.
* 매달 17일 발행되던 ‘일상의 마음챙김’을 개인 사정으로 늦게 발행하였습니다.
글쓴이 '진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뉴스와 시사 인터뷰를 맛깔나게 진행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미국 수도에 있는 한 국제기구에서 참여자들의 의미있는 경험을 비추기 위해 행사 진행을 돕는 사람이 되어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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