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프레드와 오대수, 망각을 꿈꿨던 이들의 엇갈린 결말

2022.07.26 | 조회 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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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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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잊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자기 전 눈을 감으면 마구 떠오르는 기억에 이불을 걷어 차본 적이 있는가? “기억이 신의 선물이라면 망각은 신의 축복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경험한 것을 적당히 떠올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분명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잊고 싶은 기억만은 절대로 잊히지 않는다. 잊고 싶은 기억이란 봐서는 안 될 것을 봤거나, 알아서는 안 될 진실을 알아버렸거나 하는 등의 나쁜 의미의 충격적인 사건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정도의 강도로 머릿속에 입력된 몇 안 되는 기억들은 잊혀지기는커녕, 인물, 사건, 장소 등등이 기분 나쁠 정도로 세세하게 기억나기 마련이다. 잊고 싶다 생각할수록 선명해진다. 어쩌면 그 사건 하나 때문에 한 사람의 성격, 삶의 태도, 더 나아가서는 인생이 통째로 바뀌었을 수도, 그러니 더더욱 잊기 힘든 걸 수도 있겠다.

만프레드 백작
만프레드 백작
오대수
오대수

만프레드 백작과 오대수,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1816년, 독일의 철학자 바이런이 쓴 극시 <만프레드>의 주인공이다. 또 다른 한 명은 그보다 200년 정도 뒤에, 한국의 영화감독 박찬욱의 작품 <올드보이> 속 인물이다. 이렇듯 두 작품의 세계관이 일치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지만, 그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망각’을 원한다는 것, 괴로운 기억을 지워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만프레드 백작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과거를 가지고 있다. 작품 내에서 그것이 어떤 사건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후에 그의 연인이었던 아스타르테의 영혼이 나와 그가 죽을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그 ‘과거’라는 것이 연인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결국 만프레드는 과거를 잊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기억을 잃으려는 시도는 두 번이나 했다. 처음에는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일곱 신에게 망각을 달라며 절규한다. 신들은 다른 소원은 모두 들어줄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능력 밖이라며 거절한다. 후에, 마녀를 만나 또 한 번 부탁한다. 마녀는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자신에게 복종하라는 조건을 걸고, 만프레드는 그 누구의 노예도 되지 않은 채 나 자신으로 남겠다며 마녀의 제안을 거절한다. 또다시 망각에 실패한다. 이번에는 본인의 의지로 기억을 남겼다. 후에 그는 죽음 앞에 놓이게 된다. 그의 옆에서 기도문을 외워 천국에 가라는 신부에게 “신부님, 죽는다는 거 그리 어려운 일 아닙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둔다. 그는 망각 대신 자유의지를 택하면서 끝내 진실을 잊지 못했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반면 오대수는 망각에 성공한다. 정확히 말하면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고, 통째로 잊었을 수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기억은 더 이상 아닐 것이 분명하다.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이 알고 보니 잃어버렸던 자신의 딸이었다는 끔찍한 기억에 그는 최면 술사를 찾아간다. 최면 술사는 부작용으로 기억이 왜곡될 수 있다는 말을 남긴 채 그의 망각을 돕는다. 이후 그는 눈이 펑펑 내리는 숲속의 눈밭 위에서 자신의 연인이자 딸인 미도와 다시 마주한다. 미도의 어깨 너머로, 오대수의 얼굴이 보인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는, 기억이 어떻게 된 건지는 관객들의 상상에 맡기겠다는 묘한 표정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오대수는 기억을 잃지 못한 채 죽어버린 만프레드와는 다르게 계속해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망각을 선택한 자는 진실을 잊었고, 동시에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내가 나 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억’하나 뿐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몸은 1초에 380만개의 세포를 교체할뿐더러, 7년마다 몸의 모든 세포는 하나도 남김없이 재생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사실상 ‘나의 몸’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체로 ‘나’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는 없다. 내가 나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따라서 ‘기억’하나 뿐이다. 그 기억을,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소소한 것들에 대한 기억이 아닌 성격, 삶의 태도, 더 나아가 인생을 통째로 바꿔버린 기억을 지운다 해도, 나는 여전히 나 일까? 나는 여전히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만프레드는 만프레드로 남았고, 오대수는 더 이상 오대수가 아닌 삶을 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에게 망각은 곧 구원이었다. 오대수는 진실을 잊음으로써 이전보다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다.

무언가를 잊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자기 전 눈을 감으면 마구 떠오르는 기억에 이불을 걷어 차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 그 기억을 잃게 해주겠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나’로 남아 죽음에 이를 것인가, 혹은 ‘나’를 놓아주고 행복을 찾을 것인가. 둘 중에 정답은 없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매달 26일 -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이야기 '

글쓴이 - 영원 

음악 공부를 하고있는 대학생입니다. 이유있는 예술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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