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왜 그림책을 읽어요?_그림책을 보다가_우선영

2022.07.25 | 조회 1.13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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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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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할 때 그림책을 읽는다고 하면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묻는다. “어른이 왜 그림책을 읽어요?” 그럴 때마다 특별한 설명 없이 좋으니까.”라고 간단하게 답하곤 한다. 굳이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 이유는 왜 좋은지 스스로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질문을 받고 나면 종종 생각에 잠긴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시작에는 나의 아이가 있다. 옹알거리며 누워있는 아기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할 지 막막한 순간들마다 그림책은 가장 훌륭한 소통의 도구가 되어 주었다. 다양한 의성어가 가득한 책들을 읽어주면 아이는 생글생글 웃었고, 엄마가 넘기는 그림책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아이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호기심을 채워주고 싶었고, 무엇보다 책이라는 매체가 안전지대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그림책 세상 속으로 성큼 성큼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림책에 빠져들게 된 순간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미술시간, 그날은 외부활동으로 전시회장을 갔다. ‘로뎅과 까미오끌로뎅 전이었는데 팜플렛을 하나씩 손에 들고 웅장한 공간으로 들어서던 그날이 떠오른다. 여러 작품을 둘러보던 나는 로뎅의 입맞춤이라는 조각상 앞에서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부드럽게 연결되는 선과 몸짓에서 느껴지는 슬픔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빨개진 코로 작품 앞에 서 있던 열일곱 살의 어느 날은 벅찬 감동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당시 느꼈던 전율을 그림책을 보면서 다시 만날 때가 많다. 마음이 일렁거리고, 눈물이 나올 만큼 벅찬 감동으로 한 동안 머무르게 되는 순간을 만나는 것이다. 사실 처음 그림책을 접할 때는 그림이 상상력을 제한시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역할을 하는 그림을 삽화라고 하는데 그런 형식의 책을 많이 보고 자란 나에게 그림이 가득한 책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완벽한 기우였다. 때론 그림이 글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상상력을 자극시켰다.

다시마 세이조 작가의 뛰어라 메뚜기라는 책에서 자신의 상황을 벗어나려는 메뚜기의 점프는 과감한 터치와 강렬한 색감으로 더 치열하게 전해진다. 이영경 작가의 넉점 반은 그림 덕분에 그 시절의 향수를 더 강하게 일깨울 수 있었고, 이수지 작가의 파도야 놀자는 그림만으로도 바다의 생동감이 충분히 전해진다.

그렇게 예술적인 그림과 더불어 읽는 문장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강하게 자리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박현주 작가의 이까짓 거라는 그림책에는 빗속을 달리는 아이가 등장하는데, 비 내리는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아이를 보면서 읽는 이까짓 거라는 말은 그냥 말하는 것과 전해지는 강도가 다르다. 언젠가 나도 경험했을 그 시간을 기억하며, 그 순간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는 문장은 훨씬 큰 힘이 있다. 그렇게 뚜렷하게 기억된 문장은 그 말이 필요한 순간에 그림과 함께 불쑥 떠오르고는 한다.

그림책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를 꼽자면 많은 책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거나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 많아지면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읽히기 위해 만들어진 책들은 대부분 행복하고 따뜻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울고 있는 아이에게 다정하게 말하는 어른이 등장하고, 좁은 공간도 넉넉하게 나누는 동물들이 등장하고, 두려운 순간이나 걱정되는 일들이 마법처럼 해결되는 경우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다정한 그림책 세상 속에서 자연스레 위로받고 안정을 찾게 되는 것이다.

가브리엘 뱅상의 비 오는 날의 소풍이라는 책에서는 소풍갈 준비에 신난 아기 쥐 셀레스틴이 등장한다. 하지만 소풍가는 날 아침에 비가 내리고 실망하게 되는데, 슬퍼하는 셀레스틴곁에 나타난 아저씨의 행동은 달콤하다 못해 녹아내릴 것만 같다. 대단한 스토리나 화려한 그림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저씨가 아이를 대하는 마음이 글과 그림에서 온전하게 전해진다. 이 그림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으면, 상처받았던 어떤 날의 나를 다독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따뜻해진 마음에는 절로 다짐이 생겨난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보자고 말이다.

좋아서 읽기 시작한 그림책이 주는 뜻밖의 선물은 아이들이 제법 크고 나서 알게 되었다. 집안에 쌓인 책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아이가 곁에 와서 거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는 자신이 기억하는 책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는데, 아주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까지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함께 읽었던 시절 속에 어떤 부분에서 웃었는지, 왜 좋았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고스란히 기억하며 즐거워했다. 아이와 함께 읽는 그림책이 시공간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 특별한 추억처럼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책에 대한 감동만 남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주고받은 마음까지 남을 수 있으니 다시 떠오르는 그때의 추억들은 뜻밖의 선물처럼 감격스러웠다.

이제 긴 책도 뚝딱 읽을 만큼 자란 아이가 언젠가 그림책 한 권을 계속 들고 다니면서 꺼내 읽었다. 똑같은 책을 자주 펼쳐보는 아이에게 물었다. “왜 그 책만 읽어?” 아이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이 책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스스로 경험한 아이에게는 어떤 설명도 필요 없다. 나에게도 종종 꺼내보는 그림책들이 있다. 그런 책들이 쌓여 갈수록 나만의 비밀 병기를 가진 듯 든든하다.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는 그림책을 한 권씩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 바람이 내가 그림책을 계속 보는 가장 커다란 이유일 것이다.

글에 등장한 그림책들
글에 등장한 그림책들

* 매달 25일 '그림책을 보다가' 글쓴이 - 우선영

그림책테파리스트 우선영입니다.
그림책테파리스트 우선영입니다.

삶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질문들에 그림책으로 답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림책을 보다가 떠오른 생각이나 일상의 깨달음을 적어보려 합니다. 제 글과 만나는 시간이 여러분의 삶에 작은 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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