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는 아이들

산을 오르는 아이들_여름의 표정_윤경

07 지리산의 화엄사 노고단 코스

2024.06.19 | 조회 1.09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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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시작되었다. 이제 겨우 유월인데 지금 맛보기로 보여주는 여름의 열기에 벌써 강타 당한 기분이 든다. 낮의 땡볕 아래 걷게 되면 어디 더위를 피할 곳 없나 기웃거리게 된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카페에 들어가 있다 보면 팔에 닭살이 돋을 만큼 추워서 긴팔 아우터를 못 챙기고 나온 걸 이내 후회한다. 낮은 온도에 목소리가 살짝 바뀌려고 하면 자연 바람이 부는 곳이 간절해진다. 이렇게까지 여름이 덥지 않았던 시절로 대피하고 싶어진다. 가슴까지 적시는 계곡물소리도 듣고 싶고, 두 팔로 껴안아도 내 두 손이 닿지 않는 나무가 생각나고,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는 숲이 눈에 아른거리고, 마음 헐벗은 곳에 초록 숨결을 흡수하고 싶은 기분이 들면 산으로 갈 때가 된 거다. 

 

힘든 줄 알면서도 또 오르게 되는 게 산행인 것 같다. 우리는 경주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여행 갈 기회가 생기면 그 근처 산에 들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더웠던 8월에 하동으로 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경주로 돌아오는 길에 구례를 지나게 되었다. 지리산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한번 가보자 했던 곳이 화엄사 노고단 코스이다. 왕복 약 7.7km로 가장 빠르게 노고단을 오를 수 있는 코스이다. 어른 걸음으로는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동안 몇 번 오를 기회가 있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간다는 건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이젠 아이들과 여러 번 산을 오르며 알게 모르게 쌓아온 산행 기술이 늘어서 베짱이 두둑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넷이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생긴 것 같았다. 

 

산행 기술이라 하면 특별한 건 아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지칠 때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를 즉흥적으로 만드는 일 같은 것이다. 자연물을 사용해서 마술봉을 만들거나 꽃왕관, 꽃다발도 만들게 된다. 풀 이름을 찾아보는 일도 산을 만끽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동물이나 곤충 찾기, 돌계단을 숫자 세면서 걷기, 흙에 발 닿지 않고 돌만 딛고 가기, 노래 부르며 가기, 끝말잇기, 나무 껴안기, 서로 안아주기, 간식 먹기, 비행기 태워주기 등등이 있다. 어른의 머리에서 뭔가 더 기발하고 참신한 놀이 아이디어가 나오면 더 좋겠지만 대체로 놀이는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다. 중요한 건 우리가 산속에서 다소 지겨울 것만 같은 시간을 오롯이 견디는 일이다. 자신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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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우일까, 요즘처럼 각종 미디어나 게임, 잘 짜인 프로그램, 학습 같은 것으로 자신을 가만히 놔둘 틈 하나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선 더더욱 심심해 할 시간이 없어진 것만 같다. 한시라도 아이가 혼자서 지루해 하면 안 될 것처럼 여겨진다. 인터넷 눌리면 바로 답이 나오는 시대에, 길게 사유하며 힘들게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일도 드물어진 것만 같다. 어쩌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산행 기술이란 자신에게 올라오는 감정을 잘 소화해 내는 일 아닐까 한다. 아이들이 오르는 내내 힘들다는 감정의 경험도 필요하다고 본다. 걷는 것 말고는 별로 할 게 없는 것만 같은 무더운 시간 동안, 마음에 올라오는 갖가지 불쾌한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전환하려고 서로 애를 쓰게 될 때, 마음 한 뼘이 커짐을 느낀다. 

 

아이들과 산을 오르다 보면, 적어도 한 번은 걷기 힘들다고 안아달라고 징징대거나 짜증을 내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태껏 익혔던 산행 기술은 웬걸, 내 마음과 감정을 시험하는 순간이 찾아온 거다. 남편은 늘 버릇처럼 "우리 어떤 일이 있어도 얼굴에 미소를 잃지 말자"는 말을 하곤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노고단을 오르며 둘째 아이는 거의 남편 목에 매달려 있었다. 어느 그림책에서 본 한 바보가 당나귀를 어깨에 이고 가는 장면이 다 떠올랐다. 이럴 거면 더운데 산에 오는 게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아이를 목에 걸치고 산을 오를 일이 있었겠는가 하고 바꾸어 말해본다. 아이의 칭얼거림을 어루고 달래는 일은 내가 맡았다. 이 방법, 저 방법을 써가며 스스로 걸어 보자고 애원도 해보았다. 걷다가 울다가 뛰다가 웃다가 별짓을 다하며 노고단 대피소까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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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아이는 목에서 내려와 꽃과 풀이 친구가 되어 주고 나무가 말을 걸어준다는 세계로 들어간 듯했다. 힘든 감정을 이겨 내었을 때 주변을 살피게 되기도 하나보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를 도와준 여름 꽃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노루오줌, 산오이풀, 원추리, 둥근이질풀이 아니었으면 어쩔뻔 했나 싶다. 그리고 변화무쌍했던 하늘의 날씨도 한몫했다. 화엄사를 지나 노고단 대피소에서 노고단 고개를 오를 때는 공기가 확 달라졌다. 온 몸에 흐르던 땀도 식힐 수 있었다. 노고단 전망대까지 하늘 사이를 걷는 듯한 나무 계단 길은 결코 지겹지 않았다. 한참 마법사 놀이에 빠져 있던 아이들에게 안개가 피어 올라 있던 고개 길은 신비롭고도 환상적인 무대였다. 안개 사이로 핀 노란 원추리는 마법사가 피워 올린 꽃처럼 보였다. 그 사이를 뛰어 날아 다니는 아이들의 얼굴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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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도 느낄 수 있는 이 시원함 때문에 아이들과 고생을 자처 한 건가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돌아보면 나 혼자라면 절대 도전하지 않았을 일이다. 산행길에서 우리가 뭘 했는지 하나하나 다 정확하게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는다. 아이들도 아마 우리가 올랐던 곳에 대해서 다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서로 함께 몸을 비비며 접촉하고 땀을 흘렸던 시간들이 좋은 감정으로 남아 몸에 새겨져 있을 것이라 본다. 덥기만 한 여름이라고 해서 에어컨 앞에만 있어야 될 일은 아니다. 아직도 함께 산을 오르겠다는 아이들을 보면, 우리가 나눴던 시간들에게 어떠한 감정의 이름을 붙여도 괜찮을 것만 같다. 심심할 수 있는 산행 길에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을 풀어내며 결국 시원해졌다는 것이 여름 산행의 묘미인 것 같다. 그것이 아이가 살아가는데 큰 자산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노고단을 오르며 여름을 대하는 다양한 표정을 배웠다. 그 힘으로 올 여름을 맞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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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윤경

생태적인 삶과 자연농 농부로 사는 게 꿈입니다.

마음을 어루만지며, 보다 나다운 삶을 살려고 합니다.

여덟  여자아이, 여섯  남자아이, 남편과 시골에서 살림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yoonirise

yoon.vertclair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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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hdrmf00의 프로필 이미지

    ehdrmf00

    0
    6 months 전

    더운 여름날에도 산을 오를 이유는 충분하네요. 시원한 글 고맙습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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