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다! 하는 원고_편집자의 사생활_고우리

2022.11.06 | 조회 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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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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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봤을 때 이거다......! 하는 원고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좀 더 프로페셔널하게 묻자면 작가와의 계약에 있어 결정적 판단 근거는?” 정도가 될 것이다. , 이거 대답하기 어렵다. 머릿속에서 복잡하고 종합적인 과정을 거쳐 내려지는 판단이기 때문이다. 다른 편집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그 판단은 순식간에내려지곤 한다. 원고를 한 5? 정도 읽으면 판단이 선다. 경력 10년이 넘어서고부터 그렇게 된 것 같다(물론 내 판단이 다 옳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판단하는 데 딱 5분이 걸린, 그런 경우가 있었다. 한겨레출판에 다닐 때 회사 메일로 투고를 받았다. 보자마자 이거 계약해야지! 싶었다. 저자가 보내준 제목에 이어 바로 부제가 떠올랐고(‘환락의 구조’), 즉시 샘플 원고를 출력해 윗선에 올렸다. 그리고 저자에게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고 메일을 썼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저 감감무소식...... 그 책이 <클럽 아레나>란 제목으로 에이도스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을 나중에 알았다.

<클럽 아레나>클럽이라는 공간을 건축학도의 입장에서 분석한 희귀한 책이다. 사람의 욕망이 어떻게 공간화하는가에 대해 쓴 흥미로운 보고서다. 투고된 원고를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세 페이지 읽어내려갔을 때, 아마추어의 글쓰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그는 실제로 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었다). 그만의 개성도 있었다. 그의 원고가 아무리 의미가 있고 희소한 내용이더라도 재미없이 풀어냈다면 계약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내가 원고를 선택하는 첫 번째 조건은 이른바 글빨이 아닌가 싶다. 두 번째, 세 번째 조건은 이미 나왔다. 독자들에게 어필할 지점(의미)이 있고, 어디서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내용(희소성)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이거다, 하는 원고를 발견하기보다, 이런 주제로 원고를 쓸 수 있는 필자를 섭외'하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방식의 기획을 제일 좋아한다. 그러니까 일차적으로 내가(편집자가) 관심 있고, 그다음으로 독자도 좋아할 만한 주제를 잡아놓고 그에 관해 글을 쓸 수 있는 저자를 서치하는 경우다. 나를 위하고 또 독자를 위한 책이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한겨레출판에 다닐 당시 나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직장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았고, 그러한 화두가 실질적으로 독자의 삶과 생활을 바꿀 것으로 믿었다. 그렇게 내가 먼저 주제를 제안해서 나온 책이 우석훈의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이다. 이 책을 열과 성을 다해 만들었고, 지금도 가장 아끼는 책 중 하나다.

물론 나의 관심보다 독자의 관심에 더 방점을 찍고 기획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 더 많을 것이다. 출판은 문화사업이고, 책이란 팔아야 하는 물건이기도 하니까. <공부의 미래>가 그렇게 나왔다. 한국에서 교육이라는 키워드는 장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획안을 쓸 때부터 제목을 이미 지어놓고 맞춤한 저자를 찾아 헤맸다. 한겨레신문 기자이자 디지털 인문학자인 저자 구본권을 발견했다. 메일로 저자에게 기획안을 보내자 답메일이 왔다. 자기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반갑다고 했다. 우리는 바로 미팅을 갖고 계약서에 사인했다. 이럴 때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이 책은 내가 만든 책 중에서도 가장 많이 팔린 축에 속한다.

몇 가지 예일 뿐이다. 기획은 정말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작가가 신문에 쓴 칼럼 한 편에서 단초를 얻기도 하고(이민경,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 페이스북에 올린 작가의 한 문장에 꽂혀서 제목이 나오기도 하고(<여자를 모욕한 걸작들>, 미출간), 신문에 실린 인터뷰를 보다가 저자를 발굴하기도 한다(양재진, <복지의 원리>). 작가들과 대화를 나누다 불쑥 콘셉트가 튀어나오는 경우는 숱하다.

그렇다고 이 모든 기획이 다 희소한 것은 아니다.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크라테스 이후로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모두 유치원에서 배운다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계속 새로 나온다. 같은 이야기는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된다. 우리는 시대와 시절의 흐름에 맞게 쓰이고 또 쓰이는 책들에 다시금 공감하고 또 공감한다.

폴 김과 김인종이 함께 쓴 책 <아주 정상적인 아픈 사람들>에 이런 말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 사람의 앎이나 깨달음이 나의 정답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경험하는 답을 가져야 합니다.” 어쩌면 존재해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야기(깨달음)를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놓은 것이 책이라는 물건일지도 모른다. 그 유일무이한 저마다의 경험들이 책이 되어서 나온다. 편집자는, 마케터는, 디자이너는 그것을 오로지 단 한 권의 책으로 보이도록 돕는 조력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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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름모 출판사 대표. 노는 게 제일 좋은 탱자탱자 편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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