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마음에 이름을 불러주는 것_어느 심리학자의 고백_기린

2022.11.05 | 조회 1.0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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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며칠째 큰 아이가 열이 나더니 어젯밤에는 40도까지 올랐다. 웬만큼 아파도 사흘쯤 앓으면 털고 일어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해열제를 먹여도 차도가 잠시 뿐이다. 힘없이 누워있던 아이가 감자 그라탕을 먹고 싶다고 했다. 집 근처 슈퍼에는 재료가 없어 차를 끌고 멀리 있는 마트에 다녀왔다. 집에 와 보니 아이가 그새 잠이 들었다. 강의 준비며 해야 할 일도 잔뜩 밀려있고 그라탕도 미리 만들어놓아야 하는데 만사 다 제쳐놓고 아이 곁에서 잠이나 자고 싶다.엄마, 언니 깨워야지 않아?” 막내가 묻는다. 그 질문에도 별로 답하고 싶지 않다. 신나게 준비하던 휴가 계획도, 전날까지 흥분했던 살사 클래스 등록도 다 부질 없이 느껴진다.

이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아무 생각 없이 누워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내리누를 때 눕거나 그대로 있는다는 것은 감정 속으로 침잠한다는 의미였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는 가능하지가 않아서, 가만히 있다 보면 이런 저런 걱정과 끊임없이 떠오르고, 그러면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지곤 했었다.

지금 아이가 깨기 전에 뭐라도 해 놔야지 쉴 때인가’, ‘그럴 시간이 있으면 해야 할 일을 해야하는 거 아닌가하는 엄격한 자아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 목소리에 떠밀리다가 내 마음에 시선을 옮겼다. ‘왜 이렇게 마음이 가라앉는걸까하고 들여다보니 두 가지 감정이 나 불렀어?’하는 듯 고개를 내민다.

무기력과 불안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기력감, 그리고 아이가 큰 병이라도 걸린게 아닌가 하는 걱정, 아이가 계속 힘들어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었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감정 덩어리에 무기력하고 불안한 마음이구나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더니 체기처럼 꽉 막혔던 마음이 한풀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가만, 지금 몸이 피곤한 게 당연하잖아?’ 문득 몸이 가라앉는 이유도 어렴풋이 짚어졌다. 약을 사오고 병원을 알아보고 장을 보면서 바삐 움직이던 걸음이 느슨해지니 그제서야 긴장 가득했던 몸이 풀린 것이다. 지금 다른 일은 멈추고 몸을 위해서 무언가 해주어야 한다는 신호였다. 그런 신호는 늘 뒤늦게 깨닫게 된다. 당장 눈앞에 해야 할 일에 집중하다 보면, 그리고 긴장감이 마음을 채우고 있으면 몸이 보내는 손짓은 언제나 뒤로 밀리기 때문이다. 몸의 필요까지 알아주고 나니 씩씩거리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그저 거기 있구나하고 쳐다봐주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은 이해받은 느낌이 든다.


 

마음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긴장이 줄어든다는 것은 여러 연구에서 입증된 현상이다. 미국 UCLA 대학 심리학과의 매튜 리버만(Matthew D. Lieberman) 교수팀의 실험도 한 예이다. 교수팀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뱀과 같이 불쾌감을 주는 사진을 보여준 후 한 그룹은 '역겹다‘ '불안하다'와 같은 단어로 감정을 표현하게 하고, 다른 그룹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게 했다. 그 결과, 감정을 표현한 이들은 강한 감정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의 편도체 활동이 줄고 감정을 조절하는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었다. 이들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스트레스도 줄었다고 보고했다.

감정을 인식하고 명명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조절하는 힘이 커진다는 것은 마음의 신비처럼 느껴진다. 연구자들은 추상적인 감정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주었기 때문에, 불확실한 무언가에 실체를 부여하여 상황이 선명해졌기 때문에, 주의를 환기시켜 불편한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효과가 나타난다고도 설명한다. 또한 자기를 돌아보는 과정을 거치면서 감정과의 거리가 생겼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내가 지금 그런 상태구나하고 읊조리는 순간, 감정의 울타리 속에 갇혀있던 시선이 바깥으로 물러나와 이러 저러한 감정들을 구경하듯 지켜보게 된다.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소란의 실체가 그제서야 보이는 것이다.

사실 감정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캄캄한 동굴에서 광맥을 찾듯 더듬더듬 지금 내 마음에 맞는 감정을 헤아려보려 애쓰지만, 정확한 감정을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더 많다. ‘실망했다거나 지쳤다’, ‘화가 났다고 감정을 말하는 대신 짜증났다고 퉁쳐서 말하고 싶기도 하다. 우리 대부분은 감정을 구체적으로 명명하는 것에 서투르다. 그러한 문화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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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타인에 의해 공감받을 때 좀 더 세분화된다. 감정을 표현할 때 누군가가 그 감정을 좀 더 정확한 감정 단어로 피드백하거나 공감해주었다면 감정의 가지가 훨씬 풍성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부모가 그러했듯 그 시대 어른들은 감정을 읽어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 표현을 반항이나 경솔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내 기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대든다는 의미였고, 서툴게 화를 표현하면 도리어 더 크게 혼나기 일쑤였다. 신나는 기분을 너무 드러내는 것도 ‘방정맞은’ 일로 터부시되었다.

다행인 것은 성장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숱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의 마음을 듣는 과정을 거치며 어느 정도 감정의 지도를 갖게 된 것이다. 듬성듬성 구멍 난 지도를 촘촘하게 메우기 위해서는 그저 나 스스로 감정의 이름을 불러줄 수밖에 없다. 내가 나의 감정을 피드백하고 동감해주는 공감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사실 격한 감정에 휩싸이면 어떤 마음인지 헤아리는 게 복잡하고 막막한 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감정을 기록하면서 감정을 세분화하여 정리해둔 목록을 이용하기도 한다. 마크 브래킷(Marc Brackett) 예일대 감정지능센터 교수의 ‘무드 미터(Mood meter)’를 활용하거나 ‘비폭력대화’의 느낌 목록의 도움을 받는다. 이러한 감정 목록은 자칫 밑도 끝도 없이 가라앉을 수 있는 감정을 건져 올려 보여주는 고운 채반과도 같다. 하나씩 손으로 짚어가다 가장 와닿는 것에서 멈추면 그것이 지금 내 마음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일 것이다.

나의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나를 관찰하고 돌보는 자아라는, 가장 친밀하고 지지적인 친구를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무기력하고 불안한 마음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마음에 대한 태도는 바뀌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미 나를 들여다보고 보살피는 시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누르던 감정은 더 이상 모호하고 덩치 큰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닌, 타당한 이유와 이름을 가진 실체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관찰하는 친구와 함께 감정의 일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매달 5'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 글쓴이_기린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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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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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diejoo

    0
    almost 2 years 전

    모호한 상태에 이름을 붙여주고 타당함을 부여하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인사이트가 아닌가 합니다. 막상 알고있는 형용사가 별로 없음을 깨닫기도 하구요.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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