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베낀 명화에 관하여

영원한 한낮 클라우드 쿠쿠 랜드_내가 베낀 명화에 관하여_오랑

2024.07.25 | 조회 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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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내가 베낀 명화_<가을 어느 날>(부분)_종이에 색연필
내가 베낀 명화_<가을 어느 날>(부분)_종이에 색연필

유토피아(Utopia),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


“나는 영원히 거기 앉아 있고 싶었다. 따스함 속에, 햇살 속에, 발밑에는 개가 잠들어 있고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맴돌고 있는 그 한 가운데에, 걱정과 기억이 전부 다 사라진 것처럼”

마를렌 하우스호퍼의 소설 <벽>에서.

 

내가 사랑한 소설 <>의 주인공은 핵전쟁을 암시하는 듯한 재앙으로 인해 투명한 벽 속에 갇히게 된다. 벽 너머 세계의 모든 생명체는 화석으로 변해버렸다. 혼자 살아남은 여자는 문명이 사라진 산속에서 자연과 살아간다. 

투명한 벽을 떠올린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벽!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때때로 벽을 느낀다. 삶 속에서 힘겹고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혹은 그런 감정에 휩싸인다. 그때마다 우리는 벽을 떠올릴지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벽! 현실에서 부딪히는 난감함이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소설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 안에서 환상을 만들고 유토피아를 상상한다.

멀리 떨어진 은신처를 샹그릴라(Shangri-la)라 한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 1900~1954)이 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 등장하는 가공 공간이기도 하다. 샹그릴라에서 Shang은 티베트에 실제 있는 곳으로 ‘Shang Mountain Pass(샹 산길)’을 말한다. 소설 속 샹그릴라는 비행기가 불시착한 히말라야 산맥 어딘가다. 이상향을 뜻하는 말은 많다. ‘도원경(桃源境), 도원향(桃園鄕)’lotus land(로터스 랜드)라고도 한다. lotus연 혹은 연꽃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우수(忘憂樹) 열매를 말한다. 이 열매를 먹으면 황홀경에 빠져 시름을 잊는다고 전해진다.

유토피아, 샹그릴라, 로터스 랜드 그리고 클라우드 쿠쿠 랜드는 살고 싶고, 머물고 싶은 이상적인 세계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있다고 꿈꿀 뿐이다.

*클라우드 쿠쿠 랜드 Cloud Cuckoo Land  :  이상향, 공상 세계를 뜻하며 때로 C-C-L로 표기된다. 그리스 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에 나오는 도시 이름으로, 새들에 의해 공중에 세워진 곳.

<가을 어느 날> 1934년. 캔버스에 유채.
<가을 어느 날> 1934년. 캔버스에 유채.

<가을 어느 날>은 내게 이상향을 떠올리게 했다. 저기에 머물러 살고 싶다는 생각! 이 같은 내 감정과 사뭇 다른 감상과 생각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열기’, ‘늘어짐같은 키워드가 먼저 다가오는 분위기 탓이다. 제목은 가을 한때를 말하고 있지만 아직 그 뜨거운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여름 끝자락인 것만 같다. 높고 파란 하늘 아래 가슴을 드러낸 여자가 프레임 바깥을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다. 해바라기, 옥수수, 사과나무, 들꽃 같은 식물들이 태양 빛을 온몸에 받아 나른함에 젖어있다. 고요하게 끓어오르는 듯한 붉은 흙바닥은 더없이 원시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그 속에서 여자와 아이는 온전히 자연과 하나 되어 있다.

나는 왜 이상향을 떠올렸을까? 차고 추운 겨울을 싫어하고 더운 여름을 더 좋아하는 단순한 이유에 그 답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아름다움을 좇으며 살고 있고 이제껏 마음으로 깊이 느끼고 감동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비롯되었다. 그 가운데 자연이 보여주는 색채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최상의 것을 안겨준다.

살아 숨 쉬는 식물들,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그 존재들이 내게 준 것은 편안함과 기쁨이었다. 불안과 조급함의 연속인 도시 생활을 벗어나 시골 언덕길을 걷는 때가 종종 있다. 언젠가는 묘지가 있는 공원 둑길을 걸으며 홍띠를 만났다. 띠는 볏과의 여러해살이풀인데 들에 무더기로 피어난다. 언뜻 잡초처럼 보이지만 붉은 빛깔을 띠는 홍띠는 그 색이 오묘하고 신비롭다. 나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오묘하고 신비로운 그 빛깔에 취해 시간을 잊었다. 로터스를 먹은 것처럼 불안이나 걱정 따위는 없었다. 경쾌한 음악과 춤이 아니어도 청량한 음료와 기름진 음식이 없어도 하늘과 바람과 풀벌레와 이름 모르는 식물들이 보여주는 움직임과 색채만으로도 유토피아를 불러온다.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가을 어느 날>을 그린 이인성(1912.8.28.~1950.11.4.)은 대구 향토 작가로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다. 191931일을 기점으로 일제의 문화 통치가 시작되었다. 식민지 조선 미술을 제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를 모델 삼은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었다. 이는 당시 조선인 화가들이 작가로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23년간 이어진 조선미술전람회는 조선 미술과 근대 화단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인성은 18세의 나이에 처음 입선한다. 그의 천부적 재능을 높이 산 대구 유지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이인성은 도쿄의 미술 용구 회사에 취직한다. 이듬해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야간부에 입학하면서 야수파, 후기인상파, 표현주의 등을 연구하며 작업에 매달린다. 13회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이인성을 두고 <요미우리신문>조선의 천재 소년 이인성 군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때부터 그는 천재 소년 화가로 불렸다. 그다음 해인 1935<경주의 산곡에서>는 최고상인 창덕궁 상을 받는다. 이 작품은 향토색을 가장 잘 드러낸 인상적인 작품이다.

<경주의 산곡에서> 1935년. 캔버스에 유채.
<경주의 산곡에서> 1935년. 캔버스에 유채.

<가을 어느 날>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어쩐지 황량한 쓸쓸함이 가득 묻어 있다. 바위엔가 걸터앉은 소년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고 눈언저리가 검게 칠해져 있다. 화가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인성 작품의 색채는 원색을 주로 사용하여 언뜻 밝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은 누구도 웃지 않는다.

이인성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천재적인 재능 덕분에 일본에서 유학했다. 1935년 귀국한 이인성은 일본에서 의상 디자인을 공부한 부유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한다. 대구 남산병원 원장의 사위가 되었다. 병원 3층에 이인성 양화 연구소를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대구 최초의 화실이면서 작업실이었다. 이어 아르스라는 다방을 열어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삼고 작품도 걸었다. 화가로서 더없는 작품 연구와 활동을 이어갔다.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천재라는 호칭에는 어쩐지 불운이 따라는 걸까. 어린 아들이 죽고 아내마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 이인성은 충격에 휩싸인다. 이인성은 처가를 나와 딸을 데리고 외롭게 작품에 매달렸다. 그 당시 작품으로는 어두운 자화상이나 정물이 많다.

<붉은 배경의 자화상> 1940년대. 나무판에 유채.
<붉은 배경의 자화상> 1940년대. 나무판에 유채.

조선의 고갱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강렬한 구성과 원색적인 색채로 서양의 정서를 느낄 수도 있지만 이인성은 고유한 조선의 향토색을 표현하고자 혼신을 다했다. 딸 이름이 애향(愛鄕)인 것만 보아도 그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애향> 1943년. 캔버스에 유채.
<애향> 1943년. 캔버스에 유채.

이인성은 1950년 전쟁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술에 취해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다 경찰이 잘못 쏜 총에 맞아 허망하게 쓰러졌다. 조선의 천재 소년은 죽었다. 그때 나이 39세다.

한낮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밤이 오지 않는다면 세계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가 펼쳐질지 모른다. 끝없는 나른함에 빠져들어 결국에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클라우드 쿠쿠 랜드는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세계다.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세계!

<해당화> 1944년. 캔버스에 유채.
<해당화> 1944년. 캔버스에 유채.

영원히 거기 앉아 있고 싶어, 따스함 속에, 햇살 속에,

세상에 없는 클라우드 쿠쿠 랜드, 현실의 벽은 영원한 한낮,

한없이 늘어지고 그지없이 나른하여 숨이 막히고 목이 타,

새파랗게 질식하는 드높은 하늘, 새 한 마리도 날지 않고,

영원히 거기 잠들어 쉬고 싶어, 햇살 속에, 따스함 속에,


참고 도서

<한국 근대미술의 천재 화가 이인성> 신수경.

<이인성> 신수경.


내 안으로 들어온 명화를 보고 느끼고 베껴 그리며 생각한 것으로, 시와 짧은 단상들이다.

글_오랑

추웠던 어느 저녁, 누군가 내민 재킷의 온기를 기억하며 따스한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안의 온도를 높이려고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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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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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경

    0
    about 2 months 전

    그림도 글도 잘 읽었습니다 - 고맙습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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