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없음 (슬픔) 없음 (공포) 없음 (아무것도) 없음
질서 없는 배열과 겹침 더미 기억하는 (얼굴) 지워진 (얼굴)
아니야 (얼굴) 아니야 (얼굴) 남은 뒤틀린
살아 있는 다가오는 희뿌연 토끼 같은
할 수 없는 연기하는 새와 비명을 지르는 컷!
( )( )( )( )( )( )( ) 컷!!!
다가오는 것들이 주는 불안과 공포가 있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반가움에 앞서 알 수 없는 불안을 준다. 그것이 내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서 그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한다면 더더욱. ‘알아차릴 수 없음’ 혹은 ‘의미를 알 수 없음’은 공포를 안겨줄지도 모른다. 인간이 삶에 집착하는 것도 자신에게 언제 어떻게 죽음이 다가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늘 죽음을 느꼈다. 삶이 사람을 흥분시키듯이 그 반대의 죽음도 삶을 인식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인식한다고 말했다. 베이컨은 자신의 흥분을 위해 그림을 그렸으며 그저 자신이 보기에 좋은 것을 그릴 뿐이라고 말했다. 해석은 시도한 적이 없고 궁극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구체화하려는 감각과 감정에 몰입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년 10월 28일 - 1992년 4월 28일)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군인 출신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는 베이컨이 열여섯 살 때 어머니의 속옷을 입고 화장을 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즉시 아들을 집에서 내쫓았다.
런던에서 혼자 생활하게 된 베이컨은 살기 위해 속기사, 전화 받는 사람, 요리사, 잡부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베이컨이 그림을 시작한 시기는 20대 초반으로, 1927년 파리에 잠시 들렀을 때 파블로 피카소의 전시를 보고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30대 중반까지는 드물게 작업하며 인테리어 장식, 가구나 양탄자 디자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베이컨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화가 로이 드 메스트르에게 회화 기법을 배우고 그림을 그렸다. 그는 자기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기하면서 그림을 포기하려는 시도를 반복했다. 1944년부터는 꾸준히 그림을 그렸고 작품을 보존했다. 1960년 멀버리 갤러리에서 그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이듬해 여러 해 동안의 방랑을 끝내고 사우스 켄싱턴의 리스 뮤즈의 한 차고에 작업실을 꾸몄다.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작업했다.
일그러짐!
그가 남긴 초상들은 형태가 희한하게 일그러져 있다. 눈이나 코, 입이 뒤틀리거나 제거되고 뭉개지고 비틀어지고 튀어나오고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않고 있다. 단지 인물을 그린 것이라고만 짐작할 뿐. 그는 사람들의 외관을 변형시키고 싶어 했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그릴 수 없다고 했다. 인물의 외양을 덜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 실질적으로 훨씬 더 그 인물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일그러진 인물이 어떻게 더 유사할 수 있을까 하고. 하지만 그의 자화상을 들여다보는 순간 신기하게도 곧바로 그를 떠올릴 수 있다.
“내가 형태를 다루는 방식은 심미적인 이유에서 이루어진다. 일그러뜨리는 것이 더 예리하고 정확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전달해 준다고 생각한다. 내 작품에서 특별히 공포스러운 면을 느끼지 못한다. 결코 무시무시하게 보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정육점에 들어가서 고깃덩어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살피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다른 생명을 잡아먹고 사는 삶에 깃든 모든 공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나는 항상 가능한 한 직접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분명 심미적이다. 형상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단색의 배경이 주는 아름다움을 나는 감각적으로 느낀다. 비어있는 공간에 가득 들어찬 색채는 어떤 형태가 주지 못하는 것들을 전해준다. 그가 자신의 그림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내가 그의 그림에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정을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회화는 시와 닮았다. 애초에 설명할 수 없는 예술인 것이다.
베이컨은 T.S. 엘리엇의 시를 좋아했다.
베이컨의 초상들은 시간이 중첩된 듯한 느낌을 준다. 엘리엇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인물이 개입하지 않는, 관계 간의 이야기가 배제된 인물은 그 자체로 지나간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한 점으로 모아진 현재를 표현한 것 같다.
엘리엇은 시에 새를 불러왔다. 김혜순 시인도 그의 문장에 새를 들여온다.
엘리엇의 새는 인간 외부에 있고 김혜순의 새는 인간 내부에 있다. 어쩌면 김혜순의 ‘새’가 베이컨이 그린 초상화를 더 예리하게 표현하는 것만 같다. 베이컨은 존재의 깊은 내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1963년부터 조지 다이어와 관계를 시작한다. 연인이었던 조지 다이어는 베이컨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었다. 1971년 10월 조지 다이어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베이컨은 주변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가는 것을 몹시 힘들어했다. 죽은 사람들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릴 사람이 없자 자신의 얼굴을 수없이 그렸다. 그는 자기 얼굴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내가 도달하려는 목표이다. 주제는 살과 피로 이뤄진 존재이며, 우리는 그것이 발산하는 것을 포착해야 한다.”
동반자였던 조지 다이어에게서 그는 무엇을 포착해낸 것일까? 사랑인가? 연민인가? 그는 3면화 작업을 많이 했는데 <조지 다이어의 초상화를 위한 세 개의 습작>은 범죄자의 몽타주를 보고 있는 착각을 불러온다.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도 함께 표현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슬픔과 우울을 본다. 지그시 감은 눈과 곁눈질하는 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굳게 다문 입이 그렇다.
“내 그림은 내 마음과 관련이 있다.”
베이컨은 집에 들르듯 콜로니라는 술집을 자주 찾아갔다. 그 장소는 베이컨에게 안식과 자유를 주었다. 콜로니의 주인이자 베이컨의 소중한 친구 중 하나였던 뮤리엘 벨처는 베이컨을 딸이라고 불렀다. 그곳에는 많은 방랑자들과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1992년 4월 28일 베이컨은 마드리드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삶이 무의미 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그림은 무엇이었을까. 모르지만 그는 그림을 통해 격정적으로 살았다. 남들이 감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감각하면서. 그런 감각이 그를 얼마큼 고통스럽게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삶은 고단하고 사실은 잔혹하다. 그는 명랑한 절망을 그렸다. 아이러니한 이 말을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그의 작품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인물. 1962> 몇 년 전 삼성 리움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직접 만났다.
그때 나는 잔혹한 땅에서 추방된 새가 땅으로 떨군 희디흰 깃털 하나를 주운 것 같은 환희를 느꼈다.
참고한 책.
1. 프랜시스 베이컨. 루이지 피카치, 마로니에북스/TASCHEN
2.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데이비드 실베스터, 디자인하우스
내 안으로 들어온 명화를 보고 느끼고 베껴 그리며 생각한 것으로, 시와 짧은 단상들이다.
글_오랑
추웠던 어느 저녁, 누군가 내민 재킷의 온기를 기억하며 따스한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안의 온도를 높이려고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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