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심칩이 고장났다.
내 핸드폰은 밤(12시)부터 아침(7시)까지 어떠한 알림도 울리지 않는다. '방해금지 모드'라는 아이폰 기능이다. 혹시 올 지 모르는 연락이나 각종 알림으로부터 벗어나 깊은 수면을 원해서 켜 둔다. 내가 따로 누르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켜 진다. 실제로 알림이 울리지 않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내가 이 시간만큼은 핸드폰에서 벗어나겠다는 일종의 다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의 다짐은 나약하다. 혹시 연락이 왔을까 화면을 열어보는 경우가 많다.
금요일 저녁이었다. 방해 금지 모드지만, '혹시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을까?' 하는 마음과 습관에 화면을 열었다. 유심 칩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안내가 나왔다. 나는 핸드폰을 몇 번 껐다 켜보기도 했고, 유심 칩을 다시 뺐다 넣어보기도 했다. 여전히 유심 칩이 없다고 안내 문구가 나왔다. 나는 금방 포기했고, 평소와는 다른 나의 모습에 놀랐다. 아마 다른 것이 작동하지 않았으면, 해결하려고 난리였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주말에는 '핫 딜'이라며 지금 아니면 싸게 살 수 없다는 광고 문자나 인터넷 계약 기간 만료가 되어감을 알리며 계약 연장이나 신규 가입을 유도하는 전화, 배달의 민족 같은 배달 업체에서 보내는 할인 쿠폰 알림이 아니라면 내 핸드폰이 울리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지 않은 미래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냐만, 수년간 경험적 근거가 이 확신을 굳건하게 지탱한다.
평일이라고 사적인 연락이 빗발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연락은 공적인 업무 연락이다. 주말이면 작동하지 않던 휴대폰이 평일에는 열심히 작동한다. 나는 직장인으로서는 유능한 사람이지만, 개인으로서는 관계 실조에 놓여 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로 나를 설명할 수 있다. 평일에는 업무 연락하며 많은 사람 속에 있지만 주말에는 그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각종 SNS에서 24시간 연결되어 있지만 의미 있는 관계가 없다.
'사단법인 오늘은'에서 발표한 <2024 청년세대 관계실조 보고서>에 따르면, 청년 10명 중 4.6명은 '의미 있는 관계'가 없다고 응답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의미 있는 관계'의 정의다. 청년은 만남과 대화의 빈도보다도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언정 감정적 교류를 할 수 있어야지만 의미 있는 관계라고 느꼈다. 보고서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대상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필요로 하는 의미 있는 관계가 결핍된 청년의 상황을 관계 실조라고 정의한다.
"관계 실조" 청년
나는 수년 전 가장 가깝다고 느꼈던 친구와 손절했다. 처음에 내 마음이 상했던 것은 내가 준 애정만큼 돌려받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내 욕심임을 알고 거리 두기를 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겼고, 나는 이것을 적당한 거리 두기라 여겼다. 하지만 거리 두기에는 적당함 같은 것이 없었고, 적당함에 기반한 관계는 멀어지다 손절로 이어졌다. 유지하는 것보다 단절하는 것이 서로의 마음에 덜 상처를 받을 수 있겠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의 친구와 손절을 하고, 스스로를 탓했다. 상황과 미래의 지속가능함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한 것은 오직 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다. 친구와 당연히 생각이 다를 수 있기에 갈등은 관계에 있어 필수임을 안다. 하지만 친구는 아니었다. 가벼운 소통만을 원했고, 갈등은 회피했다. 나는 나의 독특함을 어쩌면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단절을 선택했고, 스스로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단절이 어려웠다. 하지만 두 번은 쉬웠고, 계속되는 단절에서는 내 탓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과 거리 두는 것이 익숙해졌다. 많은 사람과 단절했을 때쯤, 퇴사까지 겹쳤다. 나는 반년을 집에 혼자 있었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었다. 매월 전세 대출금 이자와 식료품 비, 공과금이 고정적으로 나간다. 많은 관계를 단절한 이후였기에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기회도 거의 없었지만, 사회 활동에는 돈이 필요했다. '경제적 고립'은 '정서적 고립'을 동반한다.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반년 가까운 시간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말하고 싶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청년 고립에 있어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개인의 변화를 주로 요구한다. 고립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고립 해결을 위해 '자발적 의지 강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립을 경험한 사람은 취미 여가나 문화활동에 참여하면서 고립 상황을 벗어나려 노력한다. 내가 글쓰기를 했던 것도 외로움이나 우울, 고립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자기 회복에 대한 노력이었을 테다.
3개월 이상 고립이 이어지면, 고립이 심화되어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벗어나기 힘들다. 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고위험 고립' 상태다. 하지만 나는 운이 좋았다. 어렸을 때부터 높았던 호기심 덕분에 외로움이나 우울에 침잠하지 않았고, 반년을 자아성찰의 기회로 삼았다. 지금도 고립에서 벗어났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하지만 '경제적 고립'에서는 벗어나, '정서적 고립'의 형태로 삶을 버티고 있다.
관계가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관계에서 받는 상처가 두려워서 단절을 선택한다. 나는 감정적 교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다른 사람은 나의 지식이나 노동, 능력을 원할 뿐이다. 이는 유심이 고장 나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이 이를 증명한다. 아마도 주말이 지나고 업무 연락이 안 될 때, 나의 쓸모가 생길 것이다. 나는 고립으로 인한 외로움이나 정신적 질병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시한부와 같다. 개인적 노력은 이미 진행 중이지만, 사회적 노력은 현재 나의 핸드폰 유심처럼 없다고 느낀다. 나는 고립 지원의 사회화를 위해 글을 쓴다.
<그럼에도 관계를>
앞으로의 연재는 자발적으로 고립을 꾸준히 선택했던 청년이, 고립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자발적 고립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립이 존재합니다. 사회복지사인 동시에 고립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청년으로서 <그럼에도 관계를>을 쓰려합니다.
김재용
사회변화를 위한 글쓰기를 지속하며, 현재는 사회복지사로 노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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