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예정에 없던 저녁 약속이 생겼다. 어지간하면 당일 생기는 약속에는 응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최근 앨범을 발매하며 새로운 시작을 알린 황경민 시인을 축하하자며, 내가 기획자로서 성장할 수 있게 가장 큰 발판을 마련해준 성현무 감독이 자리를 주선했기 때문이다. 책이 하루 목표치만큼 팔리진 않았지만, 서점을 정리하는 손놀림은 가벼웠고, 함께 나눌 식사를 고민하는 시간은 경쾌했다. 생각해보니 업무와 직간접적인 관련 없는 만남을 가진 것은 크레타를 시작한 뒤 처음이었다.
보쌈집에서 맥주집으로, 맥주집에서 곱창집으로 공간을 옮겨가면서, 대화의 깊이는 함께 나눈 술잔만큼 더해졌다. 시작은 황경민 시인의 앨범 발매 축하였다. 크레타와 함께했던 북토크때도 황경민 시인은 손수 기타를 챙겨왔고,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기타연주와 함께 들려주었다. 시에서 나타나던 사회 비판적인 시선은 특유의 익살맞은 가사가 되었고, 사투리의 맛깔스러움을 그대로 살린 구절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가락이 되었다. 편곡과 마스터링을 거치면서 힘들었을 시인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시간이 끝나자, 이야기는 자연스레 크레타의 근황으로 넘어갔다.
독립서점의 독립은 무엇으로부터 독립인가, 성장을 위해 확보해야 하는 대중성은 '어떤 대중'을 향해야 하는가.
어른들은 오픈 2년 차에 접어든 크레타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근심과 걱정,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황경민 시인은 부산대학교 앞에서 인문학 카페 ‘헤세이티’를 10년 동안 운영했기 때문에 이 일의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 술잔을 나눴던 작년에는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후배에 대한 응원과 격려로 힘을 북돋아 주었지만, 이날은 달랐다. 독립서점의 독립은 ‘무엇으로부터 독립’이어야 하는지, 성장을 위해 꼭 확보해야 하는 대중성은 ‘어떤 대중’을 향해야 하는지, 이 업의 본질에 대한 내 생각을 요구했다. 부끄럽지만 나는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할 수 없었다.
독립서점이라는 단어의 시작은 ‘독립출판물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로 대형서점과 경쟁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항력이 생긴 덕분인지 ‘동네서점’이라는 이름으로 골목 속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들이 대부분 독립출판물도 함께 다루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독립서점’과 ‘동네서점’은 혼용해서 사용하는 추세다. 거대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서점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대형서점이 아닌 서점을 지칭하는 단어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지, 단 한 번도 ‘무엇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는지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2년 차를 맞이한 크레타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확한 대답을 스스로 내리지 못한다면 수많은 유혹을 견뎌내기란 쉽지 않을 것을. 문화라는 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어떻게든 생존했고, 성장을 이어가는 이들의 질문은, 나와 크레타를 향한 응원의 메시지였다, 어떻게든 너의 답을 찾아내고, 이 판에서 오랫동안 함께 하자는 지지의 한마디였다. 그래도 지금 아등바등하며 해나가는 크레타의 모습이 기특해 보였는지 황경민 시인은 아래와 같은 말을 전하셨다.
"잔머리는 언제나 더 나은, 더 좋은, 더 뛰어난 잔머리에 당한다. 하지만 진심은 더 나은, 더 좋은, 더 뛰어난 진심이라는 것이 없다. 진심은 그냥 진심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크레타에 담고 있는 진심과 잔머리에 대해 생각했다.
나 역시 크레타를 운영하며 잔머리를 전혀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보는 것,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손님들이 많이 온 날은 일부러 사람들로 가득 찬 모습을 캡처 후 SNS에 올리거나, 매출이 좋았던 날을 기념하는 영상을 찍으면서 ‘잘 나가는 서점’으로 보이기 위해 애를 쓴다. 손님이 찾지 않은 날도, 한 권의 책도 판매하지 못한 날도 종종 있지만, 굳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잔머리는 남들에게 보여주기도 쉽고, 누군가에게 보이기도 쉽다.
하지만 이 공간에 입고하는 책, 기획하는 모임과 북토크, 일일 책방지기 프로그램, 매일 고쳐 쓰는 입간판 등 크레타에서 진행하는 모든 것에는, 함께 하는 이들의 삶에 책이 깊이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하지만 이런 진심은 눈에 보이지가 않다 보니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고, 동기부여로 삼기도 어렵다.
프로그램 만족도가 4.5에서 4.7로 높아졌다면 더 나은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을까? 반대로 만족도가 낮아졌다면 못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평가와 판단 자체가 책으로부터 파생되는 말과 글에는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황경민 시인은 모든 일에 진심을 담아서 임하되, 나의 진심을 평가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나를 지켜준 편지」의 저자 김민정 씨는 이런 글을 남겼다. "저는 제가 살아갈 공간이 저 자신과 같았으면 좋겠어요. 제 마음이 힘을 잃지 않고, 가치를 고민하고 선택하는 일을 거듭할 때 아늑한 배경이 되어 품어 주었으면 합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차 한잔, 책 한 모금, 좋은 음악으로 채울 수 있는 울타리면 충분하지요. 그곳에 제가 머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을 추스르며 누울 자리, 그런 가치 있는 것들로 공간을 꾸리려 합니다. 선생님, 그리운 공간을 생각하면 자꾸만 ‘백년어서원’이 떠오릅니다."
나 또한 크레타라는 공간과 닮아가고, 크레타가 나를 닮아가길 바란다. 그리운 공간을 생각할 때면, 부산 인문학 운동의 가장 핵심 거점인 <백년어서원>을 저자가 떠올리듯이, 누군가는 <크레타>를 떠올리게 된다면 나의 진심이 제대로 가닿은 것이지 않을까. 다행인 점은 ‘크레타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함께 읽은 책 덕분에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었어요.', '책도 좋았지만, 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이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어요.', '대표님 덕분에 저 휴직하고 세계여행을 떠났어요. 사실 지금 크레타에요.’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제는 크레타가 추구하는 독립은 무엇으로부터 독립인지, 크레타가 향하는 대중은 어떤 대중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 한다. 지금 당장 찾기는 어렵겠지만 크레타를 찾아주는 이들과 잔머리가 아닌 진심을 담아 소통하기 시작하면 몇 가지 실마리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사유와 자유의 시간
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과 사람이 만나 펼쳐지는 소소하지만 진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 글쓴이 - 강동훈
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인이 꿈이자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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