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운 오름은 어디일까요?
제주 한달 살기를 하며 몇 개 쯤 오름을 올랐을 무렵, 우연히 ‘제주 100대 오름 지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역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제주 여행 정보를 나누다 듣게 된 이야기였다. ‘오르머’라는 브랜드에서 만들고 판매한다고 했는데, 마침 오르머 매장이 숙소 근처라 구경 삼아 방문 했다.
오르머에서는 마침 ‘나의 행운 오름을 찾아서’’라는 이벤트를 준비 중 이었다. 커다란 랜덤 뽑기 기계에서 나의 행운 오름 카드를 뽑고, 매장 내에 있는 오름과 관련된 다양한 힌트를 참고로 해서 나의 행운의 오름이 무엇인지를 맞추는 간단한 게임이었다. 나의 행운 오름이 어디인지 잘 찾으면 매장 직원이 해당 오름 스티커를 내 카드에 붙여 준다.
내가 매장을 방문 했던 날은 이벤트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이었다. 매장 직원이 내일부터 이벤트 시작이라고 해서 잠시 실망했지만, ‘혹시 오늘은 할 수 없나요?’ 하고 슬쩍 물어봤더니 직원이 씩 웃으면서 ‘정식 오픈은 내일이지만, 오늘 한 번 하실 수 있게 열어드릴게요’라며 기계에 전원을 넣어주었다. ‘야호!’
나의 행운 오름은 어디일까 무척 두근거렸다. 그저 게임일 뿐이고 딱히 의미 부여 할 필요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행운은 언제 어디서나 기분 좋은 주문 같은 단어고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오름이라는 단어가 합쳐지니 좋음이 제곱이 된 것 같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기분 좋은 설레임과 함께 매장 곳곳을 구경하며 퀴즈를 풀고 보니, 나의 행운 오름은 ‘윗세 오름’이었다.
‘하…’ 나의 행운 오름이 어딘지 밝혀지만 바로 달려갈 기세였는데, 행운 오름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기 때문에 내 행운 오름이 윗세 오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한숨이 나왔다. ‘윗세 오름은 백록담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오름 입니다’
‘당분간은 가기 어렵겠네’ 설렜던 마음이 살짝 가라앉으며, 실망감도 좀 들었다. 체력이 그렇기 좋지 않았던 시기라, 백록담에 거의 근접한 위치에 있는 산행을 시도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도 언젠가 가볼 수 있겠지’ 섭섭한 마음을 안고, 그래도 나의 행운 오름이란 것이 생겼다는 기쁜 마음으로 매장을 나섰다.
윗세 오름
언젠가는 갈 곳이기 때문에 윗세 오름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나의 행운의 오름이 어떤 곳인지 궁금 하기도 했고.
윗세 오름은 300 개가 넘는 제주 오름 중 한라산 백록담을 제외한 가장 높은 오름으로 높이는 1,740m다. 또 백록담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오름이다. 그래서 백록담을 구경하기 좋은 오름이기도 하다.
윗세오름보다 더 낮은 곳에 세 개의 오름이 모여 있는 삼형제 오름이 있는데 이 삼형제 오름을 세오름이라 부르기도 하고, 윗세오름은 삼형제 오름보다 더 위에 있는 세 개의 오름이라 하여 웃세오름 또는 윗세오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윗세오름은 붉은 오름, 누운 오름, 족은 오름(작은 오름이라는 뜻)이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다. 또 이 세 오름 역시 삼형제에 빗대어 큰 오름, 샛 오름, 족은 오름(혹은 새끼 오름)이라 부르기도 한다.
윗세 오름에 가려면 한라산 등산 코스 중 어리목 코스 또는 영실 코스라 부르는 등산로로 가야 한다. 한라산은 관음사 탐방로, 성판악 탐방로, 어리목 탐방로, 돈내코 탐방로, 영실 탐방로 등 등산 코스가 있고, 이 탐방로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예약이 필수다. 제주도에서 운영하는 한라산 탐방로 예약 사이트를 통해 예약 할 수 있고, 탐방로 방문 비용은 무료지만 선착순 예약이기 때문에 등산 일정을 잡기 전 예약 가능 여부를 꼭 먼저 확인 해야 한다. 또 윗세 오름으로 가는 어리목 탐방로와 영실 탐방로는 백록담은 갈 수 없다.
한 번 가보는 거지
제주 100대 오름 지도에 대한 정보를 얻었던 예의 그 카페에 앉아 윗세 오름 관련 정보를 찾고 있는데, 카페 사장님이 ‘뭘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하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윗세 오름 공부 하고 있어요. 제 행운의 오름으로 나왔거든요.’
‘어머 윗세오름? 저는 작년 겨울 눈이 많이 내렸을 때 다녀왔는데 너무 아름다웠어요.’
‘너무 높아서 힘들지 않나요? 다녀올 때 고생하지 않으셨어요?’
‘높긴 한데 생각보다 괜찮아요. 갈만 해요.’
‘그래요?!’
여자 사장님이 겨울 산행으로 다녀올 만 했다는 말씀을 하시니 불끈 용기가 솟았다. 그래 한 번 가보자, 가다가 너무 힘들면 중간에 돌아오면 되잖아! 마침 탐방로 예약도 바로 가능했다. 어리목 코스와 영실 코스 중 골라야 했는데, 어리목 코스는 길게 이어진 경사와 계단이 힘들다는 평도 있었고, 영실 코스가 한라산 탐방로 중 가장 짧고 가장 아름답다하여 영실 코스로 예약을 했다.
초가을 등산하기 좋아지는 시기가 되어 영실 코스 입구로 들어가는 도로가 차로 꽉 차있었다. 새벽 일찍 오면 정말 주차가 어려워서 대중 교통 이용을 적극 권장 하던데, 나는 열시 쯤 방문해서 이미 하산 하는 사람들이 많은 때라 그나마 주차를 할 수 있었다. 도로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대기 중 차를 돌려 하산하는 사람들도 몇 있었지만, 나는 기분 좋은 설레임과 도전을 앞둔 두근거림으로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주차를 하고 주차장에서 탐방로 입구까지 몇 분 걷는데 발걸음이 나는 듯 했다. 중간에 돌아오게 되더라도, 시작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참 좋았다. 성공하지 못할 일은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뿌듯했다. 끝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탐방로의 입구를 통과하는 것 만으로도 행복했다.
초반 30~40분 정도는 공원처럼 꾸며진 등산로를 걷게 된다. 오르막 내리막이 부드럽게 있고 계곡도 있고 짧은 계단도 있는 잘 꾸며진 탐방로다. 공원 구간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계단처럼 꾸며진 등산로가 시작되는데 제법 경사도 있고 오르려면 체력이 필요하다. 이 경사 구간이 끝날무렵 영실 코스의 첫번째 경치를 자랑하는 영실 기암과 병풍바위가 나타난다.
사진으로 예습을 하고 갔고, 또 본격적으로 가을 단풍이 들기 전인 늦여름 혹은 초가을에 해당하는 시기에 방문했음에도 그 아름다움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 했다. 시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한참 서서 경치를 구경했다.
영실기암은 오백나한이라고도 부르는데, 기암이 500개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하고, 또 어머니와 500명의 아들에 대한 슬픈 전설이 깃들었다. 영실기암과 병풍바위 밑으로는 깊은 계곡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계곡이 아니라 제주 오름 중 가장 큰 굼부리(화구)라 한다.
한참을 구경해도 아쉬움이 남아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등산을 다시 시작했다. 코스의 절반 정도나 올라왔는데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어쩌면 끝까지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영실 코스를 지나면 제법 평평한 구간을 걷게 된다. 양 옆으로 절벽이 있기도 하고 숲속 길을 걷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 걷다 나무가 시야에서 쓱 사라진다. 선작지왓이다.
선작지왓은 백록담 주변의 고산 평원지대다. 선작지왓은 제주어로 자갈이 있는 밭이라는 뜻이라 한다. 겨울에 눈이 쌓이면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비현실적인 풍경이 된다 한다. 선작지왓은 평지라서, 선작지왓에 들어서면 손에 잡힐 듯 백록담이 보인다.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지만, 처음 사전지식 없이 선작지왓에 첫발을 디뎠을 때, 몇 분 정도 어리둥절 했다. 눈 앞에 마치 백록담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는데, 내 생각에는 벌써 백록담이 나올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다. 정상에 도달하려면 무척 힘들어야 할 것 같았는데, 나는 그다지 힘들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눈 앞에 보이는 저것이 참으로 백록담인지 자신 할 수가 없었다. 진짜 백록담은 한참 더 올라야 하고 눈 앞에 보이는 저것은 뭔가 다른 오름일 수도 있다 생각 했다. ‘하지만 진짜 백록담일 수도 있잖아?’
결국 내려오는 다른 등산객 무리에게 곤란한 표정으로 ‘저게 백록담인가요?’하고 물었다. ‘네! 하하하’ 사람들은 재밌다는 듯 또 유쾌하게 웃으며 확인을 해주었다. 그리고 한라산에 처음이시냐 물었다. ‘네..’ 나는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이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김이 새는 마음이었다. 너무 쉬운데? 한라산 등반기에서 고생하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봐서 겁먹고 있었는데, 나는 아직 하나도 힘들지 않은데 벌써 거의 정상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였다.
선작지왓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내달려 바로 윗세오름에 도착했다. 기운이 남아 펄펄 날았다. 구름 때문에 윗세오름에서 백록담을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나는 백록담의 말간 얼굴을 계속 볼 수 있었다. 사진도 무척 많이 찍었다.
나 한라산 다녀 왔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올라갈 때는 초행길이라 약간의 긴장감도 있었고, 힘들면 중간에 내려와야 할 수도 있다는 각오도 있어서 나름의 비장함도 있었는 반면, 내려오는 길은 하고 싶은 것을 다 이뤘다는 뿌듯함, 그리고 아름다운 영실 탐방로 주변 경치를 한 번 즐길 수 있었다. 한라산을 온전히 즐긴 시간이었다.
혼자 한라산을 간다하면 말릴까봐 가족들에게 이야기도 안 하고 출발 했는데, 하산 후 제주 공항으로 달려가 제주에 막 도착한 가족을 보자 마자 활짝 웃으며 자랑했다. ‘나 한라산 다녀왔다! 별로 안 힘들었어! 다음에 백록담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오늘도 오른다’
백 개의 제주 오름을 오르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고, 현재 스코어는 30/100 입니다. 제주 오름을 왜 오르게 되었는지, 제주 오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름을 오르면서 어떤 순간들을 만났고 어떤 생각과 감상이 있었는지 글을 통해 공유하겠습니다.
서하도
처음 방문한 제주도 동쪽 끝에서 ‘하도리’라는 자신의 필명과 동일한 동네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 곳에 정착할 꿈을 꾸게 된 초보 작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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