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 ≪달과 6펜스≫의 찰스 스트릭랜드, ≪위대한 개츠비≫의 제이 개츠비, ≪환희의 집≫의 릴리 바트 등. 이십 대에 누군가가 ‘너에게 최고의 소설은 뭐였냐’고 물었을 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성적 부진으로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환멸을 느끼며 방황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말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이 있음을 깨닫는데, 그 일은 낭떠러지 위에 있는 호밀밭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아이가 떨어질 것 같은 위험한 순간이 생기면 아이를 지켜내는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홀든 콜필드의 결론을 마주하고는, 가슴 속에 알싸한 뭔가가 퍼져나가 순식간에 가득 차는 것을 느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은 거지.” -홀든 콜필드, ≪호밀밭의 파수꾼≫-
오늘 아침에 녹색어머니 형광 조끼를 입고 붉은색 봉을 휘두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홀든 콜필드는 녹색어머니를 하면 되겠네! 차를 정지시키고 아이들이 길을 건너게 했다. 아이들은 “감사합니다”하고 길을 건넌다. 괜히 뭉클해진다. 아이들 개개인이 어떤 아이들인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이라는 존재가 개념적이고 추상적이면서도 실재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아직 어리고 작고 순수한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러다 곧 녹색어머니 같은 별것 아닌 활동으로 이렇게 혼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게 왠지 남사스러워서 빠르게 마음을 추스린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녹색어머니. 아무리 생각해도 싱크로율 칠십 프로 이상이다. 녹색어머니 활동을 매일 하려면 녹색어머니 회장을 하면 된다. 교통 정리를 하는 사십여분 동안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었다.
녹색어머니 활동을 마치고 조끼와 봉을 반납하러 학교 정문에 있는 보안관실로 갔다. ‘호밀밭의 파수꾼’ 생각에 열중했던 탓으로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녹색어머니가 호밀밭의 파수꾼하고 비슷하지 않아요?" 그런데 제복을 입은 녹색어머니 회장을 마주치자마자 그 말이 쏙 들어가버렸다. 잘 모르는 사람한테 책 얘기를 꺼내 본 적도 없을뿐더러 왠지 녹색어머니 회장이 홀든 콜필드를 전혀 모를 것 같았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아침부터 뭔 생뚱맞은 소리냐고 할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홀든 콜필드가 녹색어머니를 하려면 일단 아이를 낳아 초등학교에 보내야 하고 아이를 키우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 결국 그는 뭐가 됐든 다른 일을 하면서 녹색어머니를 해야 한다. 왠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던 홀든 콜필드는 직장 다니고 있을 것 같고 녹색어머니 회장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을 것 같다. 그래, 세상은 원래 이런 식이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도 없고, 많은 것들이 있어야될 그 자리에 있지 않아. 매치가 잘 안돼. 그래서 홀든 콜필드가 방황했던 거야. 나는 그런 생각을 끝으로 형광 조끼와 봉을 반납하고 학교를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아침 공기가 상쾌했다. 아침에 나올 때는 평소보다 서두르고 아이에게 "밥 먹어라" "양치해라" "옷 입어라" 같은 잔소리를 최소 다섯 번씩 하고 나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늦지 않으려고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까지 머리카락 휘날리게 뛰어 겨우 정시에 도착했다. 하지만 녹색어머니를 하고 돌아오는 길은 항상 여유롭고 기분이 좋다. 아마도 별 건 아니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그래도 좋은 일 하나 했다는 느낌이 들어서인 것 같다.
*글쓴이 – 진솔
어린이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독서교실 선생님입니다. 초등 아이 키우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오늘도 새록새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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