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잔뜩 선 칼바람이 무방비 상태의 입구를 기가 막히게 찾아와 꽂힌다. 그럴수록 한껏 움츠러드는 나의 말린 어깨가 초라하다. 상대가 만만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더욱 파고드는 추위가 얄미워 일부러 허리를 쭉 펴고 말린 어깨를 교정해본다. 주먹도 꽉 쥐어본다. 오 효과가 조금 있는 듯하다. 갑자기 명랑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이런 추위가 싫지 않다. 추위에 누구보다 강해서라기보다는 추위 속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온기가 소중해서이다.
겨울에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갖가지 학교를 졸업한 지야 한참이지만, 나는 여전히 학교가 결정해주는 생활 리듬이 익숙한 13년 차 교사이다. 생활 리듬뿐만이 아니다. 첫 부임 학교에서 보낸 이십 대는 발이 땅에 닿은 기억이 없을 만큼 모든 것이 산뜻하고 가벼웠다면, 삼십 대를 맞이한 두 번째 학교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장맛비 쏟아지는 사랑을 하기도 했다. 발령받는 학교의 위치가 나의 주거지는 물론 생활권을 미리 가리키고 있었고, 내가 해야 할 발달과업을 충분히 상기시켜주고도 있었다. 어김없이 익숙한 혼자만의 겨울방학이 주어졌다. 늘 이렇게 얻었다기보다는 주어지는 식이다.
2022년 서울의 고등학교들은 교사와 학생들의 입에 마스크를 씌워버렸고, 삼면이 투명한 칸막이에 갇혀 급식을 먹어야만 했다. 그 와중에 아이들은 쉬는 시간엔 매점으로 달려가 뜨끈한 만두를 호호 불어가며 나눠 먹곤 했으나, 난 수업 시간에 잠만 자는 아이에게 “마스크 끼고 자야지.”라는 우스운 말을 실제로 해야만 하기도 했다. 이런 희비극을 배경으로, 대략 98%쯤은 정상화된 학교 업무에 육아를 병행하며 꽉 채워 보낸 나의 첫 일 년이 지나갔다. 육아시간을 쓰고 있었기에 아침 8시에 출근하여 퇴근하기 전까지 내 이름이 붙어있는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는 시간은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 딱 50분뿐이었다. 그 시간마저 업무전담팀으로서 나에게 맡겨진 일들을 물어물어 해나가야만 했다. 집에 돌아와 또다시 시작되는 육아 출근이야 말해 더 무엇할까.
겨울방학이 시작되어서도 나는 마치, 빚지고는 절대 못살지만 이미 빚이 쌓여버린 빚쟁이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 외부에서 학교로 들어오는 예산을 모두 집행한 뒤 적절한 증빙서류를 첨부하여 정산하고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늦어진 예산집행을 기다리다 이미 기한을 넘겨버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어제도 독촉 전화를 받았다. 방학 중이라 학교의 내선 번호가 아닌 나의 개인 연락처로 연락이 오는데, ‘00구교육지원과’라는 문구가 한 자의 띔도 없이 빡빡하게 몰아치듯 무방비 상태의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번 겨울은 아주 그냥 제대로 추운 맛이다.
물론 세 번째 발령지에서의 첫해가 추운 맛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담임은 맡지 않았기에 소위 말하는 ‘내 새끼’ 같은 아이들이 없었을 뿐이지, 나는 내가 수업 맡은 250명가량의 1학년 전교생의 이름을 다 외웠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내가 먼저 “지훈이 안녕?”, “주영이 오랜만이네!”라며 말을 건넨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제 이름 아세요?”라며 흠칫 놀라지만 누구든 입꼬리가 30도 이상은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 아이들이 올 한해 나에게 봄이고, 여름이고, 또 가을이었다. 육아시간을 써야만 하는 시절이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길 바라고 있다. 흘러 당도한 곳에 피어오를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꽤 알법한 연차의 교사가 된 것이다.
엊그제 인스타그램에서 아주 반가운 dm을 받았다. 난 첫 학교에서 그녀의 고3 담임이었다. 첫 고3 담임이었던 터라 가장 긴장한 채로 보낸 일 년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일 정해진 등교 시간 보다 일찍 등교하자던 아이들을 따라 일찍 출근했고, 점심시간이 끝나기 15분 전부터 착석해 내가 없이도 공부를 시작하던 아이들. 난 매일 B4 용지에 짧은 응원의 글을 적은 ‘자주장(자기주도학습장)’을 나눠주었고 아이들은 그 나머지 공간에 자기가 적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적어 내곤 했었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담백하게 수학 문제 풀이 과정만 빼곡히 적는 아이도 있었고, 독해 문제를 풀다 마주친 장문의 시를 적고 자신의 일기를 담담하게 써낸 아이도 있었다. 매일 ‘자주장’을 준비하고 답글을 적어주는 나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그 당시 우리 반 아이들은 자신의 하루를 녹여낸 종이 한 장을 빠짐없이 내게 선물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아이의 dm이었다. 졸업 후 그녀는 목표했던 일본의 한 대학에 입학했고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그런 그녀를 더 애틋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조금은 특별한데, 난 그해 여름방학에 그녀 어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부고를 듣고, 그녀가 보였던 모든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는 입꼬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 미소도 있었겠구나 싶은 마음에 슬픔을 참을 수 없기도 했다. 수능을 100일도 남기지 않은 날들이었지만 우리 반 아이들은 멀리까지 와서 그녀를 위로하고 돌아갔다. 우리는 모두 그런 장소가 무척이나 낯설었지만, 모두 한마음이었다.
그런 그녀가, 재학시절 한명 한명 잘 챙겨주시고 졸업 후에도 응원해주시는 선생님은 나뿐이라며, 덕분에 좋은 곳에 취업해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사회생활 n년차의 내공을 보여주는 듯한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가족 공연의 티켓을 선물하고 싶다면서 말이다. 바로 이거다. 나를 녹이는 기운. 어느 겨울에도 추위에 지기만 하지 않게 하는 마법 같은 존재. 내 두 손에 핫팩이 쥐어졌다. 그것도 아주 딱 좋은 타이밍에. 이것이 감히 행복이지 싶다.
입춘이 지나서일까. 이맘쯤엔 벌써 추위도, 겨울도, 그 좋은 방학도 조금은 지겨워진다. 하지만 그녀로부터 전달받은 온기가 추위뿐만 아니라 이 지겨움조차 사랑스럽게 해준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믿어줄까?
*은호랑이
현재 세상과 소통하는 (거의) 유일한 채널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회, 정치, 환경, 연예 등 다양한 지면을 아이들과 그리고 동료 교사들과 함께 읽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적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지금이 가장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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