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스럽지만 잠정적으로 당신에게 체류 허가를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독일에 입국한지 반년이 안 됐을 무렵, 외국인청으로부터 충격적인 메일을 받았다. 독일에서 90일 이상 체류하기 위해서는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비자 신청이 거부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주한독일대사관 홈페이지를 뒤져봐도 비자가 거부될 이유가 없었다.
만약 비자를 거부당하면 정해진 기한 내에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꼼짝없이 불법체류자가 됐다. 몇 달 간 정신없이 이사하고, 온갖 행정 처리를 하고, 학원을 등록하고, 한국과의 시차에 맞춰 업무도 적응해가던 참이었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 에너지를 써가며 무언가를 시작하려던 찰나 한국행이라니. 허무하고 억울해서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해외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두려운 일 중 하나가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내가 충분한 돈과 시간을 가지고 있고, 공부든 일이든 어떤 것이든 원하는 바를 해보려고 해도 국가의 허락없이는 체류조차 할 수 없는 것. 외국인이 타지에서 생활하면서 마주해야 할 숙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에 꼼꼼하게 조사를 해서 어떤 종류의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을지 알아두고, 그에 맞는 서류를 철저하게 준비해서 지체없이 절차를 밟아야 한다.
나는 유학생 남편과 함께 생활을 하는 배우자이므로 ‘동반자 비자'를 신청했는데, 담당자에 의하면 결혼 시점이 남편의 유학이 이미 시작된 이후라서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유학생이 유학 도중 결혼을 하면 배우자 비자를 줄 수 없다니. 이 무슨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말인가? 주변을 수소문해 사례를 찾아봐도 나와 같은 케이스로 비자를 받은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남편이 다니는 학교의 법률 자문 서비스에도 문의해 봤다. 당황스럽게도 변호사조차 ‘문제가 될 건 없는데, 한국에서 받아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건 담당자 재량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라는 대책 없는 답변을 받았다. 비자가 거부될 명확한 사유는 없지만 담당자의 법률 해석에 따라 허가를 주지 않을 수 있다니. 모든 힘이 다 빠지는 상황이었다.
실제 이 곳에서 만나는 유학생들이 꼭 열을 올리며 하는 대화 주제가 있는데, 뭐니뭐니해도 비자 문제였다. 관할 지역마다, 담당자마다 기준이 천차만별이라 외국인으로서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담당자의 기준에 맞추는 것 뿐이었다. 정말 운이 나쁜 경우에는 담당자를 바꾸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법률이라는 게 추상적이고 일반적으로 쓰여져 있다보니, 개별 케이스마다 해석할 여지가 많았고 비자 심사 담당자의 권한은 막강했다.
우리가 사는 지역은 비자 업무 처리가 늦기로 악명이 높았고, 1년 이상 기다리는 사람도 꽤 있었다. 심지어 대학에 합격해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조차 학생 비자를 주지 않아 고생을 한 사람도 있었다. 비자를 신청한 후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임시 비자'라는 것을 받는데, 임시 비자가 있으면 독일에서 거주할 수는 있지만 독일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정확히는 나갈 수는 있지만, 다시 독일로 돌아오려면 90일 이상을 머물렀다가 돌아와야 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한국의 병원을 가려했던 그 분은 허가를 받지 못해 독일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제 아무리 의사 소견서를 가져가도 외국인청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독일로 이민온 지 30년이 넘은 한국인 이웃을 동행해 유창한 독일어로 큰 소리로 따지고 나서야 상급자를 만날 수 있었고 ‘네가 이 서류를 제출한지 몰랐어. 여태 서류가 누락되었네. 지금 처리해줄게'라며 당황스럽게도 그 자리에서 해결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부부도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찾았다. 조금만 인터넷에 찾아봐도 각종 케이스를 접할 수 있었다. 어떤 도시에서는 몇 시에 관청 문이 열리고, 그 때 줄을 서서, 어떤 복도를 통해 어떤 사무실로 가면 담당자를 만날 수 있으며 늦어도 새벽 6시에는 가서 기다려야 그 날 담당자를 만날 수도 있다는 구체적인 노하우도 있었다. 독일어에 서툴면 무시하고 허가를 안 주는 경우도 있으니 독일인이나 독일어에 유창한 지인을 동행하라는 사람도 있었다. 큰 소리로 따져야 겨우 내 서류를 봐준다거나, 반대로 너무 강하게 항의하면 담당자가 기분이 상해서 줄 것도 안 주기 때문에 끝까지 점잖게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조언도 있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우리는 ‘점잖게 귀찮게하기’ 전략을 택했다. 담당자와 통화가 가능한 시간은 딱 일주일에 한 번, 매주 월요일 특정 시간대였다. 독일어가 꽤 유창한 남편은 매주 월요일 아침 정중하게 담당자에게 내 비자를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거의 삼십분 이상을 우리 상황을 설명하며 빠르게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주에 다시 전화를 걸면 마치 처음보는 사람인양 담당자는 친절하게 ‘무슨 일인가요?’라고 물었고 남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거의 매번 통화에서 자동 응답기처럼 같은 상황을 설명했지만, 끝까지 침착하고 친절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일이 많아서 늦어지고 있다던 담당자가 3주씩 휴가를 가면, 세 번의 월요일은 늦잠을 잘 수 있었다.
“오늘 당신의 비자를 발급했고, 4주에서 6주 이내로 방문 수령할 수 있습니다.” 지긋지긋한 매주 월요일 아침의 통화가 몇 달 간 지속되고 나서야 기적같은 메일을 받았다. 비자를 신청한 지 1년 반을 거의 채운 시점이었다. 너무 놀랍다못해 순간적으로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결국 그 날 나는 체하고 말았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게 아니라 너무 놀래 갑자기 급체를 해버린 것이다. 3년째 한국에 한 번도 가지 못한 남편은 당장 한국행 비행기를 끊고 가족들을 만나자고 했지만, 난 일단 내 눈 앞에 실물로 비자를 받기 전까지 믿을 수 없으니 기다리자고 했다. 간혹 본인이 신청한 비자와 다른 종류의 엉뚱한 비자가 발급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고, 체류 허가 기간이 터무니없이 짧아서 몇 달 안에 다시 이런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섬뜩한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은 탓이었다. 역시나 비자는 6주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고, 8주차에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받으러 가는 길에도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할 지도 모른다'며 심호흡을 했는데, 다행히도 정확히 내가 신청한 종류의 체류 허가를 받았다.
521일. 입국하고 첫 비자를 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코로나와 러시아 전쟁으로 업무 처리가 늦어진다는 걸 감안해도 참 길었고, 애가 탔다. 스트레스를 받아 몸이 아프기도 했고, 불안감을 못 이겨 부부 싸움을 하기도 했고, 높은 수수료를 내고 파리행 기차를 포기했다. (1년이면 비자가 나올 줄 알고 미리 사놓은 기차표를 포기할 땐 울고 싶었다.) 사실 살면서 단 한 번도 국적이라는 것을 의식해 본 적이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한국인이었고, 학교를 다니고 회사를 다니는 약 30년의 시간 동안 국가의 존재가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둔 시기에도 내가 무슨 일을 할지 고민했을 뿐 이 나라가 나를 쫓아낼까 걱정해본 적은 없었다. 타지에 나와서야 알았다. 제 아무리 살고 싶고, 일하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 나라라 해도 외국인이 경험하는 삶은 다르다는 걸.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통장 잔고를 채워놓고, 이 나라의 언어를 일정 수준 구사할 수 있다는 걸 계속해서 보여야 했다.
“한국은 외국인에게 더 엄격해.” 한국학을 전공하고 있는 독일인 친구가 해준 말이다. 비자로 고생하고 있다고 하소연하자 그는 함께 안타까워 해줬다. 그는 독일인이지만 독일에 사는 외국인의 삶은 몰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있는 동안 비자 때문에 겨우 3개월 내에 취업 준비를 끝내야 했고, 취업에 성공하지 못해 돌아왔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국인인 나에게도 취업 준비를 하기엔 3개월은 너무 짧다며 위로를 건넸다. 한국처럼 행정 처리가 빠르고, 친절하고, 일처리 확실한 곳이 어딨냐던 큰소리가 무색해졌다. 나 역시 한국에 30년 넘게 살았지만 한국에서의 외국인의 삶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독일에 온 후, 떠나고 나서야 소중함을 안다는 말을 하루하루 실감하고 있다. 사소하게는 한국에서 늘 먹던 음식부터, 친절하고 빠른 행정 처리, 신속한 의료 시스템 등 다양하겠지만 이 곳에서 존재하는 것부터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그동안 얼마나 내 나라에서 자유를 누리고 살았는지 실감이 났다. 기한 내에 어학 자격증을 딸 필요도 없었고, 소속된 학교나 직장이 없으면 쫓겨날까 두려울 필요도 없었다. 나의 돈과 시간만 준비되면 허락없이 해외로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체류 허가가 만료되기 몇 달 전부터 다시 온갖 행정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었으니까. 타지 생활의 어려움은 언어와 사람, 문화와 습관 같은 것들 이전에 ‘존재할 허락'부터 시작한다는 걸 뼛속깊이 느낀 시간이었다.
* 메이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프리랜서로 일하며, 독일어를 배우면서, 일상의 풍경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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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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