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인생을 좀 살아본 이들의 목소리가 궁금하다. 긴 세월 동안 인생의 실제를 통과하며 쌓인 지혜와 단단함이 묻어나는, 70대를 훌쩍 넘긴 진짜 어른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가 보다. 잠시 돌아보니 80세를 눈앞에 둔 P 목사님의 강해 설교에 몇 달째 정착 중이고, 근래에 찾아본 다큐멘터리의 주인공과 책의 저자 모두 7,80대이다. 기름기가 쪽 빠진 목소리, 느리지만 고집이 묻어나는 말투, 삶에서 건져 올린 단어로 전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가 쫑긋 세워진다. 무채색에 가까워지지만 그 안에 다음 생을 위한 생명을 품은 겨울나무처럼, 앙상하고 건조한 목소리 속에 인생의 정수가 들어있음을 본다.
올해는 내 삶을 긴 호흡으로 되돌아볼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중 하나는 공저를 위한 원고를 쓰느라 나의 유년기와 청년기, 그리고 장년기와 노년기를 새롭게 정리하며 글을 쓴 시간이었고, 또 하나는 내 인생에 ‘돌봄과 일’이 어떻게 긴밀히 엮여 있는지를 돌아보는 원고를 쓴 시간이었다. 생각지 못한 주제를 부여받고 시작한 글쓰기는 머릿속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시간과 장면을 새롭게 조명하며 낯선 글로 탄생시키는 경험을 건넸다. 인생의 여러 지점이 다른 키워드로 정렬되고 직조되는 흥미로운 경험은 나의 지난 시간들이 이전과 다른 형체와 빛깔로 반짝일 수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또 하나는 내 안에 균열이 생겼음을 직감한 가을부터의 시간들이다. 이제껏 달려온 시간을 잠시 멈추고 되돌아보는데 그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20대부터 이어온 앎과 삶, 도전과 응전을 돌아보는데 희한하게도 그 안에 일정한 패턴이 보였다. 매일의 열심과 성취에 가려 잠시 희미했던 나의 본성이 지난 30년의 세월 동안 선명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나란 사람은 이게 정말 중요하구나, 나는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도전을 하겠구나, 곧 새로운 장을 열 시간이네... 같은 깨달음이 왔다. 내 인생의 전체 지도를 슬쩍 확인한 것 같은 묘한 기분이랄까.
겨우 50년에 가까운 삶을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지혜가 생기는데 8,90이 되면 얼마나 더 깊은 삶의 레이어가 쌓이게 될까 싶다. 흔히 나이테라고 부르는 그것이 나에게도 새겨지고 있구나. 나이를 먹는 것과 지혜가 쌓이는 것이 늘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이 변해온 방향, 그럼에도 변치 않는 진리, 그 안과 밖을 통과하며 드러나는 내 본성을 놓치지 않는다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새로운 지혜의 동심원을 그릴 수 있겠다 싶다.
내가 좋아하는 70대 이상의 어른들을 살펴보니 평생 자연을 가까이하고, 말씀 묵상을 통해 하늘의 뜻을 찾는데 부지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끝없는 성과와 정신없는 소비를 권하는 삶에서 방향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하는 것 같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잊지 않는 삶 말이다.
요즘 내게 나이가 들수록 마음에 드는 한 가지를 꼽으라면 ‘삶의 광대함’에 연결되려는 마음이라고 하겠다. 내가 고집한 길, 나의 계획과 그림을 벗어나는 순간을 점차 환영하고 오히려 다른 그림의 인생을 기대하는 마음 말이다. 인생이 나를 넘어설 때 얼마나 광대해지는지 조금씩 깨닫게 된 나는 파커 J 팔머가 이야기한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발견하는 인생의 축복을 엿보는 중일 지도 모르겠다.
* 매달 13일 ‘마음 가드닝’
글쓴이 - 이설아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모두의 입양>을 썼고 얼마 전 <돌봄과 작업>을 공저로 출판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입양가족의 성장과 치유를 돕는 건강한입양가정지원센터 대표로 있으며, 글쓰기 공동체 <다정한 우주>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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