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풍경들이 몇 가지 있다. 반짝이는 트리와 노란 전구들, 캐롤과 촛불, 선물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나는 백화점 트리를 보며 사진을 찍거나 캐롤을 들으며 카페마다 시즌 음료를 맛보는 정도로 분위기를 즐겼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당일에는 애인과 선물을 주고 받기도 하고, 친구들과 모여 파티를 하기도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독일에 와서는 온 도시가 열풍이라 할 만큼 크리스마스로 뒤덮인 나머지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11월부터 거의 두 달에 가까운 긴 시간을 온 도시가 크리스마스만을 기다렸다는 듯 달라지기 때문이다.
독일의 12월은 오후 4시면 어두워지는 대신 크리스마스 마켓의 조명들이 화려하게 켜진다. 도시마다 차이는 있지만 11월 중순이면 대부분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시작되고 크리스마스 당일 전후로 문을 닫는다. 내가 살고 있는 본(Bonn)이라는 도시는 대도시에 비할 만큼은 아니지만 하루 안에 모든 걸 즐기기에는 규모가 커서 넉넉히 2-3일 정도는 잡고 가는 게 좋다. 갈 때마다 ‘이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 어디 있던 걸까'라는 생각을 한다. 매일 매일 한겨울 추위에도 아랑곳않고 쏟아지는 인파를 보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진심일 수 있다는 데 놀라기도 했다.
넓은 광장에 나무로 만든 예쁜 간이 상점들이 들어서고, 마실 것과 음식, 각종 크리스마스 소품들을 판다. 매년 다른 도시의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서 트리에 달 장식품을 하나씩 사 모으는 사람도 있고, 각 도시의 이름이 적힌 크리스마스 마켓의 머그컵을 모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인기있는 것 따뜻한 술과 음식들이다. 대표적인 음료는 글뤼바인(Glühwein)이라는 따뜻하고 달콤한 와인인데, 거의 모든 도시의 마켓에서 공통적으로 즐길 수 있다. 레드와인이 가장 기본이지만 화이트와인도 있고, 와인 외에도 맥주로 만든 글뤼비어나 럼으로 만든 글뤼럼 등 다양한 종류의 따뜻하고 달콤한 술이 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핫초코나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의자가 마련된 곳은 많지 않아서 대부분 스탠딩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시간을 보낸다.
놓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간식들도 있다. 한국의 호빵보다 조금 더 큰 빵안에 팥이 아니라 뜨끈한 과일잼을 넣고 빵위에 바닐라 소스까지 듬뿍 뿌린 담프누델(Dampfnudel)은 먹어본 사람마다 맛있다고 한 번씩 이야길 하곤한다. 달달한 시럽에 구운 아몬드(Gebrannte Mandeln)와 커다란 생선튀김을 빵 사이에 넣은 샌드위치(Backfisch mit Brötchen), 독일의 대표 음식인 커리부어스트(Currywurst)라는 소세지와 감자튀김은 글뤼바인과 함께 먹으면 그야말로 완벽해지는 조합들이다. 추운 길거리에서 한 손에는 담프누델을 들고 한 손에는 글뤼바인을 들고 마시며 옹기종기 서서 이야기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마켓의 풍경은 묘하게 낭만적인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낭만을 즐기기 위해서 꼭 챙겨야 할 준비물도 있다.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매서운 강추위에도 익숙해진 한국인으로써 영하 2도 정도는 추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독일의 겨울은 고유의 매서움이 있다. 한국의 건조한 추위는 바람을 잘 막으면 피부 속에 스며들지 않지만 독일의 습한 추위는 마치 젖은 수건을 얹은 것처럼 뼛속까지 차가운 습기가 스며들어 서서히 얼어붙듯이 추워지는 느낌이다.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털모자, 목도리, 장갑, 마스크, 털부츠 등 찬바람을 단단히 막을 수 있는 방한용품은 필수다.
분위기에 들떠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근처 대도시로 크리스마스 마켓에 놀러갔다가 엄청난 규모에 들떠 내리 다섯시간을 구경했는데 다녀와서 일주일은 몸살로 앓아누웠다. 일년에 단 한 번 축제처럼 도시가 들썩이는 분위기에 취해 찬 공기를 맞으며 오랜 시간을 보내다보니 몸살이 걸리기 딱 좋다. 추위에 특히 강하거나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면 글뤼바인과 간식거리 한 가지 정도를 즐긴 후 주변 실내 펍에 들어가서 유리창 너머의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방법이다. 이 곳 사람들은 마치 봄 날씨를 즐기듯 태연히 길에 서서 술 한 잔씩 즐기는데 가끔 보면 추위는 나와 남편만 느끼는 것처럼 다른 세상 같아보이기도 한다. 아직도 나는 백발의 할머니가 따뜻한 글뤼바인 한 잔을 들고 영하 3도의 날씨에도 태연히 마켓 앞 테이블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잊지 못한다.
흐리고 어두운 독일의 겨울은 크리스마스 마켓이 없었다면 아무래도 삭막하고 우울해지기 십상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오랜 기간 화려하게 크리스마스 마켓을 즐기는 것 아닐까. 시린 추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실내가 아닌 길거리의 마켓을 즐기는 이 곳의 겨울을 나는 방식이 묘하게 사랑스럽고 정이 간다.
* 메이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프리랜서로 일하며, 독일어를 배우면서, 일상의 풍경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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