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이 어느 덧 반이 지나갔다. 상반기에 본 영화와 드라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으라면 <나의 해방일지>를 1번으로 두고 싶다. ‘추앙’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두고 호불호가 꽤 갈렸었지만, 나는 지극히 추상적인 단어 ‘추앙’을 연애 감정을 확인하는데 사용한 작가의 용기와 뚝심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세상에 즐거운 것이 하나도 없어보이던, 하루하루 쌓인 일들을 꾸역꾸역 해치우며 살던 주인공 염미정이 꼭 다물었던 입을 열어 구씨에게 “나를 추앙해요” 라고 말하던 순간의 짜릿함을 기억한다. 아마도 나는 “나를 사랑해줘요.” 라고 말했다면, 그 드라마를 더이상 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지친 과거에서 단절되고 싶었던 구씨가 미정이를 만나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와 남편의 낙이었다. 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주워준 후 무심한 듯 내뱉은 한마디 “아까 낮에 추앙했잖아.” 라는 말이 우리 집에 1일 1추앙 운동을 가져왔다.
34도가 넘는 날씨에 잔디를 깎고 들어온 남편을 위해 냉면 육수를 얼려두었다가 살얼음 띄운 묵밥을 만들어주고는 “오늘치 추앙 완료!”라 외쳤다. 남편도 질세라 아이가 망가뜨린 키보드 받침대의 부속을 찾아서 본드로 튼튼하게 고정해 놓고 하루치의 추앙을 채웠음을 고백했다. 그렇게 별 것 아닌 일상의 행위들이 ‘추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의 표현이 되어갔다. 나에게 일상의 추앙이란 ‘두말하지 않고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우리가 주고받던 ‘1일1추앙 운동’은 ‘추앙’의 사전적 의미인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서로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사이에서 ‘추앙’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끼리 통하는 코드가 있다는 것, 그것으로 하루를 조금 더 달콤하게 살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챙김에서 강조하는 삶의 원칙 중 하나가 “판단하지 않음”이다. 영어로 Non-judgemental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이 원칙은 마음챙김의 원리중 가장 많은 오해를 받고 있기도 하다. 때로 이 단어는 “무비판적 수용”으로 해석되어 ‘누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줘야 한다’라는 지킬 수 없는 공허한 외침이 되기도 한다. 극단적 해석을 하는 경우에는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라고 주장하며 마음속에 저절로 떠오를 수 있는 각종 의문들, 판단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판단하지 않음”은 논리적인 사고의 결과에 의한 판단을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라는 당위성에서 벗어나 누군가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 그리고 그 순간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일, 그래서 우리의 ‘1일1추앙’ 운동의 기저에는 ‘판단하지 않기’가 깔려 있다. 나의 입장, 나의 시각을 내려놓고 그의 마음 속 목소리를 듣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 그렇게 표현된 ‘추앙’은 ‘맹목적 추종’이나 ‘일방적 희생’과는 다른, 가치로운 사랑의 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추앙'을 주고받는 것이 낯설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삶이 허무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1추앙'으로 하루를 견뎌낼 힘을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그렇게 서로를 깎아내리지도, 미워하지도 않으며 '오늘치의 추앙'을 주고 받으며 살고 싶다.
* 매달 17일, 27일 ‘일상의 마음챙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뉴스와 시사 인터뷰를 맛깔나게 진행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미국 수도에 있는 한 국제기구에서 참여자들의 의미있는 경험을 비추기 위해 행사 진행을 돕는 사람이 되어가는 중.
공저로 참여한 <세상의 모든 청년>이 얼마 전 출간되었습니다. 더 많은 '우리'를 발견하기 위해 오늘도 읽고, 쓰는 하루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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