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와 의식은 오늘날엔 특별한 날에만 열리는 ‘행사’처럼 여겨지지만, 예전에는 삶의 리듬을 만들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중요한 순간들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노래와 음식, 기도와 몸짓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죠.
그렇다면 그 많은 축제와 의식의 한복판에, 누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누가 그것을 만들어왔을까요?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중요한 역할을 해온 존재들이 있었는데요. 무대를 세우고, 공동체를 엮어내며, 삶의 의식을 지켜온 이들은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축제와 의식을 이끌었던 여성들의 흔적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축제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 축제와 의식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의례의 중심에는 항상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농경의 풍요를 기원하고, 생명의 순환을 기념하며, 공동체의 안녕을 빌었습니다. 여성들은 노래와 춤, 제물을 통해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로 활동하며, 축제의 핵심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여성 중심 의식의 대표적인 예로는 고대 그리스의 테스모포리아(Thesmophoria) 축제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축제는 곡물의 신 데메테르와 그의 딸 페르세포네를 기리는 행사로, 오직 기혼 여성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비밀스러운 의식을 통해 농사의 풍요와 가족의 번영을 기원했고,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종교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여성만이 참여할 수 있었던 이 축제는, 당대 사회에서 여성들이 지닌 상징적 위상과 역할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한국의 전통 무속 신앙에서도 이러한 여성의 역할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무녀(巫女), 즉 여성 무당은 굿을 통해 신과 인간을 연결하고, 질병이나 재난 같은 공동체의 위기를 해소하며 안녕을 기원하는 핵심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사회의 종교적 질서를 유지하는 종교 지도자이자 치유자였으며, 무속 의례는 여성들이 사회적 종교적 주체로서 인정받고, 그들의 정체성과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여성들이 오랜 시간 동안 축제와 의식 속에서 맡아온 역할을 살펴보는 일은, 단지 과거의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의 역사와 정체성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 귀중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계절과 노동, 그리고 여성의 축제
한국의 전통 축제와 의례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문화적 장치였습니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마을의 질서를 돌보고, 계절의 흐름에 따라 의례를 준비하며,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이어왔습니다. 이들의 존재는 지역 사회의 관습을 보존하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지식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❶ 화전놀이
그중에서도 화전놀이는 봄철, 자연의 흐름을 온몸으로 맞이하던 여성들의 대표적인 축제입니다. 진달래꽃을 따 화전을 부치고, 들에서 음식을 나누며 노래와 춤을 즐기던 이 전통놀이는 단순한 여흥을 넘어 여성들 사이의 결속을 다지고, 감정과 이야기를 교류하는 중요한 장이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에게 화전놀이는 가부장적 일상에서 벗어나 자율성과 활력을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고, 그 안에는 여성이 주체가 되는 계절 의례의 요소들이 스며 있었습니다.
❷ 제주 해녀 공동체
제주 해녀 공동체는 노동과 의례가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여성 중심의 전통문화입니다. 해녀들은 바다에서 물질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삶의 경험을 기반으로 규칙과 신념을 세워왔습니다. 그들은 신당을 중심으로 한 의례와 속신을 주도하며, 바다의 위험과 공존하는 방식을 스스로의 전통으로 만들어갔습니다.
오늘날에도 해녀들은 어촌계를 이끌며 전통을 전승하고 있으며, 이 독특한 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공동체 의례에서 드러난 여성의 종교적 역할
무당 또는 무녀로 활동한 여성들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공동체의 중요한 의례를 수행해 왔습니다. 이들은 망자를 위한 굿을 집전하고, 농경사회의 풍요를 비는 제례를 이끌었으며, 인간과 신,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매개자로서 기능했습니다. 이러한 여성 주도의 의례는 지역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체계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성들은 이 과정에서 종교적 권위뿐 아니라 실질적인 사회적 영향력도 발휘했습니다.
❶ 강릉단오제
강릉단오제는 이와 같은 여성의 역할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표적인 전통 축제입니다. 축제의 핵심은 대관령 국사 여성황을 모시는 제사와 무속 의식으로, 이 모든 과정을 무당들이 주도합니다. 이들은 축제의 흐름을 설계하고,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체로서 신앙적 책임과 사회적 기능을 함께 수행합니다. 단오제는 여성의 종교적 주체성이 유지되어 온 전통의 생생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❷ 진도 씻김굿
진도 씻김굿은 망자의 혼을 씻어 극락으로 인도하는 전통 무속 의례로, 무당인 무녀가 주도적으로 집전하는 의식입니다. 주로 진도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이 굿은, 죽은 이의 원한을 달래고 살아 있는 이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목적을 지니며, 노래와 춤, 기도, 상징적인 도구가 어우러지는 예술적 성격도 갖고 있습니다. 씻김굿은 여성들이 영적 중재자이자 공동체의 정화를 이끄는 존재로서 전통 사회에서 수행한 역할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1980년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었고, 2006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전통 의례와 축제에는 여성의 감각과 수행 능력, 손끝의 노동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전통문화 속에서 여성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관습을 창조하고 문화를 재구성해 온 실질적인 운영자였습니다. 이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일은 곧,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의 근간을 다시 바라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축제는 누구의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 여성들은 축제와 의식을 새롭게 구성하며, 자신의 경험과 가치를 표현하는 주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다양한 실천들은 기존 제도와 종교의 틀 바깥에서 이루어지며, 억압된 경험을 말하고 공감과 연대를 만드는 장이 되고 있고요. 과거 여성들이 굿과 제례를 통해 공동체를 이끌었던 방식과 다르면서도, 뿌리 깊은 의례적 본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흐름은 중요한 질문 하나를 남깁니다. 지금 우리가 참여하는 축제와 의식은 누구의 목소리로 만들어지고 있을까요? 관습에 의해 정해진 형식이 아니라, 스스로 구성하고 기획하는 축제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 주어져 있을까요?
젠더와 권력의 관점에서 ‘주체’를 다시 묻는 이 질문은 결국 축제의 형식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 자체를 다시 보게 만듭니다.
오늘의 여성들은 전통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축제의 규칙을 새롭게 쓰고, 공동체의 방식에 다른 질문을 던지며, 삶의 감각을 바꾸는 실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축제는 더 이상 특정한 날에만 열리는 행사가 아니라, 일상의 한가운데서 관계를 만들고 권한을 나누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더 자주 만나고, 감정을 나누고, 스스로 기획하며 부딪히고 축하하는 그 모든 과정이 지금 우리의 축제가 아닐까요? 그 물음 속에서, 우리는 축제를 다시 정의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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