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5년 되는 2025년, '아카이브다'(팟캐스트)를 통해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인 ‘열매’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1월, 제17회 전국기록인대회를 통해 ‘열매’ 윤경회 간사의 <진실과 치유의 인드라망 열매 디지털 플랫폼 구상>이라는 발표를 듣게 되었다. 곧 내 차례가 다가오는 기록과 사회에서 이런 연유로 연이 닿은 ‘열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열매’의 탄생과 활동, 국가를 상대로 한 첫 번째 재판을 다녀 온 소회, 그리고 ‘열매’가 구상하고 있는 디지털 플랫폼이 치유와 회복의 아카이브로서의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는 글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열매’ 활동에 응원과 지지를 보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모색하는 중이다. 그러던 차에 지난 주말 광주에서 있었던 ‘열매’의 1박 2일 워크숍에 참여했다. 첫 날은 피해자들과 연대자들이 서로를 소개하고 앞으로의 활동 –주로 피해자들의 치유, 회복을 위해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한 예술 활동- 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고, 둘째 날은 예술 활동의 결과물을 전시하기 위한 전시장과 5·18 자유공원에 답사를 가는 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 시급성을 다투는 내용은 아니지만 이 이야기를 먼저하고 싶어 준비하고 있던 ‘열매’ 이야기는 조금 미루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 역시 ‘열매’와 무관하지는 않다. 5·18 자유공원을 답사 중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5·18 자유공원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정권찬탈을 기도하던 일부 정치군인들의 강경 진압에 맞서 싸우신 분들이 구금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던 상무대 군사법정과 영창을 원래의 위치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이곳으로 옮겨와 원형으로 복원·재현한 곳이다. 드높은 민주화 의지와 젊은 열정으로 불의에 항거했던 분들의 뜨거운 용기와 숨결이 남아있는 이곳은 역사적 투쟁의 자취요, 인권·평화·화합의 상징으로 기억될 역사의 현장”이다. 주요시설은 보존시설인 법정, 영창, 헌병대중대내무반, 헌병대본부사무실, 헌병대식당, 식기세척장, 창고와 지원시설인 자유관(영상실과 5·18 전시실), 편의시설이 있다.
우리가 5·18 자유공원을 찾게 된 이유는 피해자 중 한 분이 고초를 겪으셨던 현장이었고, 관련된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문화해설사와 함께 헌병대 본부사무실([사진1]의 6)을 시작으로 보존시설을 중심으로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시설 내에 전시된 기록물들은 새로울 것이 없었고 재현을 위해 만들어 놓은 인물 모형들은 너무 조악하였다. 시설의 낡음은 세월의 흔적임에 어쩔 수 없으나 전시관 구성과 전시기법이 80년대를 떠올리게 했다.
아쉬움을 금치 못하며 이동하던 중, 우리는 모두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전시물을 보게 된다. 헌병대 중대내무반([사진1]의 3) 한 쪽에 자리한 ‘5·18 속 여성 -여성들의 기억 공간’이라는 전시관의 전시물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전시관 속 빨간 하이힐이 강렬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무엇을 전시한 곳인가 전시 공간을 설명한 기록을 찾아본다. ‘5·18 속 여성 -여성들의 기억 공간’으로 ‘여자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과 폭행을 당한 그들의 증언’에 대한 공간이 맞다.
![[사진2] 5·18 자유공원 보존시설 중 헌병대 중대내무반 내 ‘5·18 속 여성 –여성들의 기억 공간’ 패널 ⓒ김미련(미술인, ‘열매’연대자)](https://cdn.maily.so/du/archivenews/202511/1764229819588562.jpg)
이 공간에는 총 5점의 전시물이 ‘5·18 속 여성 -여성들의 기억 공간’이라는 이름 아래 전시되어 있다. 빨간 하이힐, 코사지가 달린 고급스런 모자, 커다란 보석이 박힌 반지, 각종 화장품과 검정색 가죽 핸드백이 그것이다. 내가 생활사 박물관이나 드라마 소품실로 순간 이동을 한 것일까?
![[사진3] 5·18 자유공원 보존시설 중 헌병대 중대내무반 내 ‘5·18 속 여성 –여성들의 기억 공간’에 빨간 하이힐, 모자, 보석반지, 가죽핸드백, 화장품 총 5점의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김미련(미술인, ‘열매’연대자)](https://cdn.maily.so/du/archivenews/202511/1764231239379787.jpg)
처음 이 공간에 들어설 때, 강렬하게 눈에 들어 온 빨간 하이힐은 나를 당황하게 했지만 그래도 5·18 당시 가두방송을 하고,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고,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고, 시신을 수습하고, 돌봄을 실천한 어느 여성이 신고 있던 신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기엔 너무나 깨끗한 자태였다. ‘차라리 낡고 굽이 부러진 것이라도 갖다 놓지’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이힐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5점의 전시물 위에 패널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광주항쟁에서 여성들의 활동’에 대한 설명들이었다. <전국 최초의 민주여성 단체, 송백회>(빨간 하이힐), <광주민중항쟁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여성들의 활동>(모자), <가두방송의 주인공들, 간첩으로 엮이다>(보석반지), <여성 수감자들의 증언>(검정 핸드백), <광주항쟁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타오르는 '오월운동'>(화장품).
전시기획자(또는 담당자)는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곳에 5·18과 전혀 상관없는 5개의 전통적인 여성성을 상징하는 물건을 가져다 놓았을까? 그 공간에서 모두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고,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은 채 한동안 떠나지 못하고 머물렀다.
비문자 기록으로서 박물(전시물)은 그 자체로 과거 활동의 결과물이자 물리적 증거이다. 실제 존재했던 행위의 결과물로 의미를 가지며,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한 텍스트가 담을 수 없는 형태, 재질, 냄새, 손때 등과 같은 정보들을 담고 있기에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었고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한 사회문화적 흔적과 연결해 준다.
또한 텍스트로는 전달할 수 없는 입체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또 다른 형태의 기록으로 박물은 다양한 가치를 가진다. 증거적 가치로서 기록의 주체가 실제 소유하고 사용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부정할 수 없는 물리적 증거로 기능하며, 물건의 크기와 재질, 실질적인 사용감 등과 같은 비언어적인 섬세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당시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심층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정보적 가치를 제공한다. 그리고 박물을 접하는 사용자에게 공감각적 경험과 정서적 연결을 유발하게 하는 정서적 가치와 실물을 접함으로 추상적인 개념을 넘어 더 쉽고 직관적으로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교육적 가치를 가진다.
비문자 기록으로서 박물관이나 기념관에 전시된 박물들이 가치는 의미와 가치를 생각할 때, 5·18 기념 공간에 있는 5점의 물품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관련 자료
◦ 5·18 자유공원 운영주체 - 518기념문화센터(광주광역시 사업소)
https://www.gwangju.go.kr/518/contentsView.do?pageId=maycenter35
◦5·18 자유공원의 보존시설인 상무대 옛 터는 광주 사적지 제17호
◦5·18 자유공원 전시관 새단장 관련 기사
- 광주시는 조성한지 24년 된 5·18 자유공원에 대해 지난 2020년 7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국비 32억원을 투입해 추진한 '5·18자유공원 전시 시설 개선사업'을 완료했다고 6일 밝혔다.
- 개선사업으로는 ▲영창, 법정 등에서 당시 상황을 재현한 인물모형 100여 개와 종합안내도, 설명 패널 추가 설치 등 전시 시설물 보수 및 교체 ▲보도블럭 철거 및 재설치, 휴게시설 교체, 5·18자유관 옥상 및 강당 방수공사 ▲상무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광주도시공사 앞으로 이전했던 '상무대 표석' 이설 등이 추진됐다.
https://www.mdilbo.com/detail/0kIA7d/660698
http://kwangju.co.kr/article.php?aid=1641468600731844006
https://www.yna.co.kr/view/AKR20201228067200054
![[사진1] 5·18 자유공원 시설 배치도](https://cdn.maily.so/du/archivenews/202511/176422903588052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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