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참여하는 우주'이며 순수한 의미의 관찰, 즉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가치중립적인 관찰이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인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신영복 (1998).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우리는 객관성과 공정성의 유지라는 허울에 집착하며, 구체적 경험과 그것으로부터 파생하는 주체적 실천으로부터 도피하며 전문가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키비스트로서 제 역할과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기록관리 행위는 관념적이고 추론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권력구조의 작동 속에서 아카이브는 구성됩니다. 어떤 것이 아카이브에 남고, 어떤 것이 아카이브에 남아있지 않은지, 어떤 구조로 분류되고 구조화되며, 어떤 프레임으로 해석하는지, 누가 아카이브에 접근할 수 있는지, 아카이브에 작용하는 모든 행위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 채 아키비스트의 역할을 기계적 중립이라는 한계로 가두는 것은 현실의 권력 구조를 유지하는데 동조하는 것이며, 현실 문제로부터의 회피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키비스트는 사회적 약자의 억압된 서사를 복원하고, 진실을 밝혀내는 실천을 통해 사회 정의에 기여해야 합니다. 이러한 실천이야말로 전문직으로서의 윤리를 구현하는 일일 것입니다.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Edmund Burke의 발언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출처는 불분명한)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가치 판단을 외면한 기계적 중립은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고착화하는데 일조합니다. 중립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이미 배제와 편향을 구조적으로 고착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립을 운운하며 침묵을 강요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검열로 볼 수 있습니다.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1980년 6월 2일 자의 <뉴스위크>의 사라진 p6~p10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쿠테다로 집권한 신군부는 외신 기사를 검열하여 삭제하며 정보 유통을 통제했습니다.
아카이브의 ‘정치적 중립’ 선언은 민감한 기록 정보자원의 선별적 보존과 공개, 접근의 제한을 통해 기억을 소거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아키비스트는 미래 세대를 위해 어떤 기록을 보존할지,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 결정하는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사회 정의와 공익을 위해 써야 한다는 Randall C. Jimerson의 잘 알려진 발언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아카이브에 어떤 것을 남길지, 어떻게 설명할지는 그 자체가 이미 가치판단이며,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Randall C. Jimerson. 2007. Archives for All: Professional Responsibility and Social Justice, The American Archivist, Vol. 70, No. 2 (Fall–Winter 2007) pp.252-281.
전문가 단체의 성명서에도 아키비스트는 중립적일 수 없음을 공식화하였습니다. 나아가 이는 아카이브 실천의 패러다임을 기계적 중립 대신 책임 있는 참여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We also acknowledge that archivists and archival practices are never neutral."
"Judgment: While no element of archival work is unbiased or neutral, archivists still strive to exercise their ethical, professional judgment in the appraisal, acquisition, and processing of materials.”SAA 핵심가치 및 윤리강령
가자지구 전쟁에서 UNRWA(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사업국) 아카이브가 보관해 온 가족등록증, 출생 및 사망 증명서, 재산 증명 및 토지증명과 같은 중요 문서들이 폭격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요르단 암만으로 비밀리에 긴급 이송되어 디지털화 되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습니다. 이 기록들은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들이 ‘Nakba’로 명명된 추방과 폭력, 강제 이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들이며, 이들의 난민 신분을 증명하는 문서들로, 팔레스타인의 존재와 권리 증명에 직결되는 기록입니다. 이러한 기록의 물리적 보존은 권리 보호임과 동시에 기억 보존의 수단입니다.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지역의 문화유산 파괴 위험이 커짐에 따라 이를 디지털화하고 보존하기 위한 국제 협력 프로젝트 SUCHO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SUCHO(Saving Ukrainian Cultural Heritage Online)은 5000개 이상의 웹사이트와 50TB에 달하는 문화기관의 데이터를 보존하는 클라우드 소싱 프로젝트입니다. 내셔널 아카이브부터 지역 박물관, 도서관, 교회 3D 투어, 어린이 미술센터 등 70여 개 이상의 문화유산 기관에 디지털화 장비를 기부하고 현지 자료의 디지털 백업을 진행하며 웹 아카이브에서 디지털화 컬렉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SUCHO 프로젝트에서 수집한 웹사이트 리스트.
SUCHO는 Webrecorder를 사용하여 웹사이트를 아카이빙함.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음악 도서관 협회 회의에서 한 사서가 우크라이나를 위한 웹사이트 및 디지털 자료의 백업에 참여할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며 시작되었습니다. 38개국 이상에서 15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모집되었습니다. 폭격으로 인한 우크라이나 전력망과 기반 시설이 파괴되며 문화기관의 디지털 자원과 웹사이트를 저장하는 데 사용되었던 물리적 서버가 파괴되었는데, SUCHO는 5400개가 넘는 우크라이나 문화유산 웹사이트를 파악하고 아카이빙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전문가 단체가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연대한 사례입니다.
https://journals.publishing.umich.edu/par/article/id/7445/
2021년 1월 25일, American Library Association(ALA) 총회에서 「Resolution to Condemn White Supremacy and Fascism as Antithetical to Library Work」 결의문이 채택되었습니다. 이 결의문에서 다음의 대목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acknowledges the role of neutrality rhetoric in emboldening and encouraging white supremacy and fascism”
“charges the Working Group on Intellectual Freedom and Social Justice, with arepresentative from the Committee on Diversity, to review neutrality rhetoric andidentify alternatives, sharing findings by July 1, 2021”https://www.ala.org/sites/default/files/aboutala/content/Resolution%20to%20Condemn%20White%20Supremacy%20and%20Fascism%20as%20Antithetical%20to%20Library%20Work%20FINAL.pdf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비현실적인 내란이 발생한 지 1년의 기간이 되어 가고 있으나 합당한 사실관계 규명, 그에 상응하는 조치들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내란 이후 기록으로 규명되어야 할 진실은 은폐되거나 삭제되었습니다. 혼돈의 대한민국에서 기록관리 전문가로서 아키비스트가 낸 목소리는 무엇인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SAA의 윤리강령이 지향하는 포용적이고 윤리적이며 책임감 있는 공동체로서 우리의 역할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직시했어야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향할 것인지, 그리고 전문가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사회에 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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줍줍
마지막 문단을 읽으니 내란이 벌써 1년 가까이 되어가는구나 싶으면서도 기록관리계에는 어떤 큰 파장을 끼쳤고 앞으로 어떠한 전환이 일어날 것인가 기대반, 걱정반입니다. 가치중립이 전문성의 유지가 아닐텐데- 그러한 우려 속에 아키비스트가 가져야 할 역할과 태도가 담긴 해외 단체 옹호활동도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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