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끝과 하루의 시작이 가장 무겁다. 거대한 무력감. 몸이 거대하고 납작한 쇳덩이같다. 왜 이런 상태지?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을 잘 돌파하고 통과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기력이 다 빠져나간 몸은 텅빈 무거움으로 가득하다. 몸을 가볍게 할 어떤 활기도 찾아볼 수가 없다. 출근길 커피값이 늘었다. 퇴근 후, 집안일을 모두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한 시간 전, 아이들의 소리가 자극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두 아이가 다투기라도 하면 쓰린 한숨이 나온다. 얕고 짧아지는 호흡. 중재에 대한 압박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이 안과 밖에서 몸을 조여온다. 기능하지 못하는 몸, 지금껏 잘 해 왔는데, 아이들을 잠들 때 까지 슬픔이나 절망은 잘 뒤로 미루고 혼자의 시간이 되면 처리해 왔는데, 그게 안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상실감이 짙어지는 순간이면 찾아가는 책방에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고시집 <충분하다>를 만났다. 상호성이라는 제목이 '나도 이제 혼자 노력하고 싶지 않아, 도움받고 지지받고 싶어.' 라는 내 안의 욕구와 공명을 이뤘다. '건강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건강'이라는 행에 이르렀을 때,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객관전 진단을 받아볼 때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정확한 것은 진단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우울감이 높고 일종의 공황증세를 보입니다. 원래 공황은 전쟁 중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상황이 전보다 나아졌을 때 나타나죠."
김형경의 애도 심리 에세이 <좋은 이별>에는 '스스로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는 지점, 혼자 잘 처리하는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우울증이 온다는 공통 경험이 담겨있다. '결혼 졸업'이라는 정의와 함께 맺음 했던 순간, 가장 힘든 순간은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괜찮아졌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 찾아온 매일의 무력감은 내게 중요한 작업이 남아있다고 알려주었다. 지속하는 사랑을 잃었다는 상실감, '아이들을 재우고 난 후에 울자. 가정을 안정시킨 후에 울자.' 그렇게 미뤄둔 슬픔에 대해 이제는 충분히 애도할 시간이 온 것이다.
김형경의 애도 심리 에세이 <좋은 이별>은 책벗을 통해 내게 찾아왔다. 상실과 애도를 주제로 한 이 책은 개인적 사회적 병리의 모든 원인은 사랑을 잃거나 소중한 대상을 상실한 후 그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우리가 그토록 아픈 것은 잘 이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형경 작가는 잃은 대상을 뒤늦게라도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일, 즉 애도작업을 충실히 이행하는 일이 좋은 이별이며 개인적으로 변화와 성장할 수 있는 마음치료의 핵심 과정으로 제안한다.
이 책에 준 가장 큰 안도감은 '우울증'이 애도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당한 반응이라는 해석이었다. 잘 이별하지 못하면 병이 된다는 사실을 최초로 제안한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에서 슬픔을 정상적 애도 반응, 우울증을 비정상적 애도 반응으로 구분했다. 병리적 애도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낙심,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기를 비난하면서 급기야 누가 벌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 상태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 정신 분석학자들은 병리적 애도란 없으며 모든 감정이 당사자에게 필요하고 정당한 반응이라는데 동의한다. 이별 후 모든 감정은 정당하다. 우울증도 상실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라는 사실은 내가 겪는 양가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용기를 준다. '이 우울감은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정당한 반응이구나. 이제 감추지도 미루지도 말고 만나주자.' 김형경작가는 심리치료는 미뤄 둔 애도를 뒤늦게 실행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올 한해 심리치료를 통해 애도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To. 모두 다 돌봄예술가!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간 날도 시간이 빠듯하여 원래 약속 시간보다 30분이 늦어 도착했습니다. 가쁜 상태로 검사지를 체크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기서는 울어도 된다는, 아니 이제 더이상 슬픔을 미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몸이 알았던 것 같습니다.
초진이 있었던 4월 말, 우울감이 높아 에프람을 일주일분을 처방받았습니다. 그리고 약에 반응이 좋아 진단결과에 대한 설명과 상담을 함께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 조율이 쉽지 않아 한달 뒤로 일정이 잡혔습니다. 정서적 안정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재흡수에 관여하는 에프람을 33일 분을 처방받아 집으로 들고 오는 길에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건강'이라는 <상호성>의 시구가 계속 맴돌았습니다.
"상담을 통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제 몸이 기능하는 거요. 지금 당장은 쉴 수가 없고 올해까지는 하루 3시간의 출퇴근과 일, 그리고 육아를 모두 병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상을 시작하는 것과 저녁에 아이들을 재울 때까지 정서적 돌봄을 잘 해내는 게 현재 어렵습니다. 약의 도움과 상담을 통해 일상을 운용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싶어요."
6월 4일, 진단결과 해석과 첫 상담이 시작됩니다. 미루어둔 애도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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