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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펑크들과 SF 소설 쓰며 프로토콜 공부했어요

총천연색 쿠알라룸푸르 방문기

2025.10.19 | 조회 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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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마을 소식지의 프로필 이미지

네트워크 마을 소식지

동아시아의 네트워크 마을 소식지. Far East of Eden

바람이 교차하는 곳, 동남아시아

지구는 둥글다. 적도는 태양빛을 정통으로 쬐어 뜨겁고, 아열대(북/남위 약 30도)는 덜 뜨겁다. 이 온도차가 공기의 거대한 흐름을 만든다. 아열대 고기압은 적도 저기압을 향해 밀려든다.

지구는 뱅글뱅글 돈다. 이 회전은 아열대에서 적도로 향하던 거대한 바람을 구부려 북반구에서는 북동풍이, 남반구에서는 남동풍이 불게 한다. 이 영원한 바람을 타고 유럽인들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넜다. '무역풍(Trade Wind)'이라는 성의 없는 이름도 붙여줬다.

에드몬드 씨가 그린 무역풍 지도, 1686
에드몬드 씨가 그린 무역풍 지도, 1686


지구(地球)는 사실 수구(水球)라서 땅떵이들은 물에 둘러싸여 있다. 땅은 물보다 쉽게 뜨거워져서, 여름에는 찬 바다의 공기가 땅으로 불어온다. 인도양에서 아시아 대륙 쪽으로 남서풍이 불어온다. 땅이 얼어붙는 겨울에는 대륙의 찬 공기가 따뜻한 바다로 흐른다. 아시아에서 인도양으로 북동풍이 분다. 계절에 따라 거대한 바람이 손바닥 뒤집듯 방향을 바꾼다.

흰 돛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던 고대 아랍 상인들은 이 예측 가능한 바람을 따라 인도와 아라비아 사이를 오갔다. 아프리카, 중국, 유럽, 태평양, 바람이 닿는 데까지 항로는 이어졌다. 아랍어로 계절이라는 의미의 'موسم (모우심)' 을 따서 몬순(monsoon, 계절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더 성의 없어

별과 바람, 선배들의 항해일지 만으로 바다를 건너던 시대. 조상님들께 바다 위 섬은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섬과 섬 사이 해협은 조류가 일정하고 폭풍우를 피할 수 있으며, 육지가 가까워 위치 파악이 쉬웠다.

동남아(이름을 손볼 필요가 있다. 나한테는 서남아시아인데?)는 삼만 여 개의 크고 작은 섬과,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수십 개의 해협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를 사뿐히 즈려밟으며 항해할 수 있었다. 아라비아, 인도, 서남아 동남아, 중국을 오가는 상인 대부분이 오늘날 싱가포르가 있는 말라카 해협을 지났다.

바람이 교차하는 곳이자 섬과 해협의 군락지인 서남아는 만남의 광장이었다. 여름의 남서풍을 타고 온 상인들은 만남의 광장에서 계절이 바뀌어 퇴근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 항구 도시들은 중계 무역뿐 아니라 보험, 물류, 조선 등 세계적인 허브로 성장했다.

이들의 후예는 '우리나라'를 '따나 아이르(tanah air)', 땅과 물 이라고 부른다. (네, air 는 말레이/인도네시아에서 물 입니다)

조상님들께서도 지름길을 애용하셨다. 병목이 걸리는 말라카 해협
조상님들께서도 지름길을 애용하셨다. 병목이 걸리는 말라카 해협


진흙이 교차하는 곳, 쿠알라룸푸르

지난 9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Kualalumpur, 이하 쿠룸)에 다녀왔다. 쿠알라룸푸르는 말레이어로 '물길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의 쿠알라(Kuala)와 '진흙'을 뜻하는 룸푸르(Lumpur)가 합쳐진 말이다. 열대우림에서 시작된 클랑강과 곰박강이 만나고 범람하는 진흙의 퇴적지이자, 물길을 따라 퇴적된 사람들의 도시였다.

쿠룸에 간 이유는 씨펑크(Seapunk) 프로토콜 학교(Protocol School) 커리큘럼을 기반으로 주최하는 일주일짜리 실험 대학(Proto-College)에 다니기 위해서였다. 이름하여 씨펑크 실험 대학! 두 개의 종잡을 수 없는 집단이 만나 종잡을 수 없음을 부채질하는 뭔가를 한다는 데, 쿠룸에 갈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나는 표를 끊었다.

 

씨펑크 실험 대학 (Seapunk Proto-College)

2025년, 대학이란 무엇일까? 25학번들은 왜 학비를 낼까? 그들이 졸업할 때에도 대학이 있을까? 어떤 모습일까? 내가 다녀온 씨펑크 실험 대학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 중 하나였다.

성수동을 수놓는 팝업 스토어들이 하루 한주 한 달 살이들이라면, 길거리 상점들이 그렇게 빠르게 헤쳐 모이고 방방 곳곳에서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다면, 대학도 그럴 수 있다. 손짓 한 번에 이 세상 모든 지식을 손에 넣을 수 있는 2025년에 나는 어느 때보다 교실(학교 건물일 필요는 없지만)과 동기 친구들의 힘을 믿는다.

씨펑크 실험 대학에서는 프로토콜 학교의 일주일짜리 온라인 강의를 쿠알라룸푸르에서 모여 한 호텔에서 생활하며 다 함께 들었다.

 

미슐랭 별 의미

⭐: 뛰어난 요리. 가볼 만한 곳 (High-quality cooking - Worth a stop)
⭐️⭐️: 훌륭한 요리. 일부러 길을 돌아서라도 가볼 만한 곳 (Excellent cooking - Worth a detour)
⭐️⭐️⭐️: 탁월한 요리. 여행을 만들어서라도 가볼 만한 곳 (Exceptional cuisine - Worth a special journey)


 

내가 식당 말고 학교에 별을 준다면

눈이 반짝여지는 수업을 듣는 것, 그 수업을 반짝이는 사람들과 함께 듣는 것, 그 반짝이들과 함께 먹고 자고 수다 떨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 이렇게 배움의 차원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별을 하나씩 붙여줘야겠다.

또 이런 실험 대학이 열리면 세계 어디든 여행을 만들어서 가봐야겠다.

새로운 바다를 상상해 봐요!
새로운 바다를 상상해 봐요!


프로토콜 학교(Protocol School)

연금술, 점성술, 우생학 등 시간이 지나며 죽어 사라지는 학문이 있다. 그렇다면 새롭게 태어나는 학문은 뭘까?

이더리움이라는 탈중앙화 프로토콜의 재단 은 프로토콜이라는 개념을 다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2022년 프로토콜의 여름(Summer of Protocols)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여름마다 전 세계의 학자와 예술가, 연구자들이 모여 ‘프로토콜’이라는 개념을 각자의 관점에서 탐구했다. 그동안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올해는 세계 곳곳의 대학에서 12개의 강의가 열렸고, 이를 일주일짜리 온라인 집중 프로그램으로 만든 게 프로토콜 학교(Protocol School) 다.

일주일 동안 법경제학 교수님, 컴공 교수님, 도시기술정책 교수님, 실험음악가, 탈중앙화 거버넌스 혁신 연구자, 불확실성 시대 조직 전략 교수님, 사회사학 교수님, 법학자 겸 예술가, 분산 시스템/IoT 교수님, SF 작가, 사회적 컴퓨팅/AR 교수님이 본인이 연구한 프로토콜에 대해 알려주셨다.

일주일만에 소화하기 까다로웠지만, 미슐랭 3 스타에서 요리해 준 덕분에 싹 비웠다.

프로토콜 학교 2025년 졸업증. 수강 내역에 따라 다르게 생성된 이미지. 탈중앙 파일 저장소(IPFS)에 저장, 이더리움 블록체인 위에 인증(Attestation)
프로토콜 학교 2025년 졸업증. 수강 내역에 따라 다르게 생성된 이미지. 탈중앙 파일 저장소(IPFS)에 저장, 이더리움 블록체인 위에 인증(Attestation)

확실성(Hardness)과 충분함(Sufficiency) - 프로토콜학을 이해하게 도와준 글 두 편

1. 원자(atom), 제도(institution), 블록체인(blockchain)의 공통점은 뭘까?
자연법칙과 물리 법칙, 인간이 쌓아 올린 규범, 암호학에 기반한 변경이 불가능한 기록, 이들은 모두 견고함 (hardness)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예측 가능성을 주고, 이 단단한 기반 위해 젠가 우리는 문명을 쌓아 올렸다. 이 확실성을 기반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협력하고, 거대하고도 복잡한 사회의 운영 체제(OS)를 만든다.
블록체인 프로토콜이 주는 '국경 없는 디지털 확실성' 위에 우린 뭘 새롭게 쌓아 올릴 수 있을까?

2. 이걸 해내네? 프로토콜들 (The Unreasonable Sufficiency of Protocols)
복잡다단한 문제를 단순무식한 프로토콜이 꽤 잘 해결하는 경우들이 있다. 출퇴근길 교차로와 신호등, 전염병과 손 씻기, 게임 이론과 눈에는 눈 (Tit for Tat) 전략 등. 다만 이들은 공기나 물처럼 우리 주변에 녹아 있어 실패할 때만 눈에 보인다.
기후 위기, AI와의 공존, 인터넷 거버넌스 등 오늘날 지구인에게 닥친 문제는 '프로토콜 적으로' 해결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프로토콜 문해력(literacy)과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 외 프로토콜 스쿨 교과서 전체 링크

 

씨펑크 스튜디오 (Seapunk Studio)

"씨펑크(Seapunk)는 동남아를 위한 솔라펑크[1]적 미래를 상상하는 연구&상상[2] 운동(movement) 이자 공동체다. 동남아시아가 역사적으로 공유해 온 열린 바다와, 그 바다가 품었던 탈중앙화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펑크'[3] 세계에서 영감을 받았다." (Seapunk is a research-and-imagination movement and community interested in solarpunk imaginaries for Southeast Asia, inspired by the region’s historical open common sea, and the emergent thriving decentralized ‘punk’ worlds it fostered.) Seapunk.asia 웹사이트 첫 줄

씨펑크는 설명하기 힘들다.[4] 아마 멤버들마다 다르게 설명할 것이다. 나에게 묻는다면 씨펑크는 '2025년 동남아의 문제를 2025년 동남아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이자 네트워크'라고 할거다.

그들의 최신 활동으로 소개를 대신해보자. 씨펑크는 방콕 기후 행동 주간 (BKKCAW 2025)에서 SNOW 세계관을 선보였다. Seapunk New Opportunity World. 기후 변화로 눈이 내리는 동남아. 그 정도면 이미 기존 정부와 제도는 다 무너졌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재난을 이겨내는 건 중앙 정부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다. 계, 두레, 품앗이가 살아나고 젊은 창업가들이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려 들면, 눈 내리는 동남아는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식민주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seapunk.asia
seapunk.asia


누싼타라(Nusantara), 섬과 섬 사이

  • nusa: 누사. 섬
  • antara: 안타라. 사이, 사이에 있는 것

말레이/인도네시아 어로 누산타라는 '섬과 섬 사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땅 문명인이 바다 문명의 '안타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긴 문장이 필요하다.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물길을 통한 사람과 물자의 교환에서 권력이 태어난 곳, 크고 작은 항구 도시들의 연결망이 중원을 재패한 왕조를 압도하는, '떠다니는 네트워크 문명'이 쓰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1. 물리적 사이. 두 지점 사이의 공간. 예) antara dua pulau: 두 섬 사이

2. 관계적 연결. 둘 이상을 이어주는 매개. 예) antara negara: 국가 간(inter-state)

3. 문화적 융합. 서로 다른 세계가 섞이고 만나는 지점. 경계가 섞이는 곳. 예) antara timur dan barat: 동서 사이에서(의 문화 혼합과 융합)

4. 철학적 경계성. 새로움이 태어나는 틈, ‘문턱’에 선 상태. 잠재성과 '사이성'의 미학. 예) antara harapan dan cemas: 희망과 불안 사이

 

내가 만난 누산타라는 말레이 음식이었다.

수 천년 동안 바람과 바다가 실어 나른 온갖 향신료와 식재료, 요리법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3천 원짜리 나시 라막(Nasi Lemak)! 친구집 앞에 주말마다 오는 나시 라막 푸드트럭 덕분에 주말마다 미라클 모닝했다.

그런데 왜 태국 베트남 음식 맛있다고만 하고 말레이 음식에 대해선 말이 없을까? 누산타라를 종잡기 어렵기 때문인 것 같다. 말레이 소울 푸드 락사(Laksa)는 중국식 국수 한 그릇이자, 코코넛으로 농도를 맞춘 말레이 탕이자, 돼지고기 없이 마살라와 카다멈을 블렌딩 한 인도와 아라비아의 향이다. 경계에서 태어난 요리는 설명하기도 상상하기도 어렵다. [5]

아무튼 말레이 음식 맛있다.

안경 벗고 먹어야 될 정도로 맛있는 말레이 음식
안경 벗고 먹어야 될 정도로 맛있는 말레이 음식


나의 멀미는 착륙 후에 시작된다. 비행기 바퀴가 내려오는 소리와 그 바퀴를 타고 올라오는 덜컹거림. 낯선 도시의 날씨와 시간을 읽어주는 목소리. 손톱만 한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내가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생소한 건물들과 복장들, 벌써부터 느껴지는 거리의 냄새, 살갗 냄새,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소리, 읽을 수 없는 기호들의 조합. 이것들이 아직 안전벨트도 풀지 않은 나의 뱃속을 울렁인다.

떠날 때는 멀미를 하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 나의 누싼타라!

 


 

각주

[1] 솔라펑크(Solarpunk)는 유기농 요구르트 광고를 상상하면 대강 맞다.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는 태양처럼 따뜻한 유토피아

[2] 연구&개발 (Research & Development, R&D) 이 아닌 연구&상상.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연구도 개발도 할 수 없다. 모든 것의 원천(upstream)으로서의 상상. 식민 지배라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미래에 대한 상상.

[3] 펑크(Punk)는 70년대 모히칸 머리와 징 박힌 가죽 잠바를 입고 기타를 때려 부수는 사람들을 상상하면 대강 맞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아시아에서 가장 진절머리 치는 반항아들. 펑크 시리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에

[4] 나의 동남아 '출장'을 애인의 어머니는 의아하게 생각하셨다. '돈을 받냐'라고 여쭈셨다. 애인도 의아하게 여겨 '맡은 직책이 있냐'라고 물었다. 둘 다 아니라고 하자 '그럼 휴가 가는 거냐' 하셨다. 나에겐 '일'인데 어쩜 '휴가'보다 신날지도. 아무튼 나보다 더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뭔가 새로운 것이 씨펑크다.

[5] 말레이시아의 인구 구성은 말레이계 무슬림 60%, 중국계(불교, 도교, 기독교 등) 20%, 인도계(힌두교, 이슬람교 등) 7%, 기타 원주민/토착민 및 비시민권자 등이 나머지 13%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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