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불가침독백
<상호불가침독백>이란?
#1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작이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윤의 의견을 따라, <상호불가침독백>의 첫 주제는 스스로의 결핍과 결함에 대해 쓰기로 했다. 못난 모습을 얼마나 드러내야 할지 그 정도를 재는 약간의 눈치 싸움이 있었고, 이런 점을 고치겠다거나 반성한다거나 하는 입 바른 말을 하지 말자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갖추고 각자 에세이를 준비했다.
이번 화의 부제는 2009년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제목을 가져왔다. 모든 일기장이 아무리 개인적이라 해도 누군가 읽는 것을 전제로 쓰여지듯이, 자신의 결점에 대해 독백처럼 털어놓고 이를 고칠 생각이 없다 못 박아두자 약속한 글에서도 모든 것을 내보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실컷 못나게 굴어놓고 누군가 정말로 우리를 비난할라 치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다고 투덜거릴 심산으로, 그리고 약간의 변명을 하는 마음으로 이 제목을 슬쩍 빌려왔다.
#1 서문: 상욱
상욱
유치원에도 들어가기 전, 가출을 감행한 적이 있다. 증언으로는 내가 스케치북에 파란 크레파스로 큰 글씨로 <나 집 나가>라고 적은 뒤 가방에 장난감 몇 개를 챙겨 집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고 한다. 다행히 이 사건은 동네 슈퍼와 문방구 구경이 지루해진 당사자가 귀가를 결심하여 큰 문제없이 2시간 만에 마무리되었다.
위의 내용이 공식적인 사건 기록이지만, 당사자인 나는 사건의 내막인 ‘가출을 결심한 계기’를 정확히 기억한다. 동네 문방구의 2천원짜리 장난감 낚싯대를 가지고 싶었고, 돈이 없으니 집에 가서 사달라고 해야 할 것이고, 사달라고 말하면 혼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혼나는 것이 서러워 가출을 결심했다.
그걸 갖고 싶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사달라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혼나지도 않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서러워져 가출을 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이전에 물건을 사달라고 말한 적도, 가족에게 비슷한 일로 혼난 기억도 없었으면서. 만 5세의 어린이가 이런 신경증적 경향성이 드러나는 사고 프로세스를 세웠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의미로 떡잎부터 달랐다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일화로, 놀이동산의 풍선을 손에 쥐기도 전에 잃어버리거나 터져버렸을 때의 상실감에 지레 겁먹어 사주겠다는 어머니의 제안도 거절한 일이 있다. 아빌리파이*도 얼리 버드 할인가가 있었다면 좋았을 걸.
이런 갈등을 일단 덮어두고 싶어하는 마음이 나에게 있어 일종의 교리처럼-따를 수 있는 상황에서는 되도록이면 교리에 맞게-작동한다.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미봉책을 즐겨 쓴다는 점에서 삶을 비겁함으로 꾸리고 있다 비난해도 할 말은 없겠지만, 적어도 단기적인 관계와 상황에서 이만큼 효과적인 옵션을 찾지 못했다. ‘꾸준히 오래 잘 하기’가 나의 크립토나이트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나이스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내일 안 볼 사람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고, 흘려 보냈다고 생각해도 결국 멜랑콜리아**처럼 되돌아와 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문제로 처박혀 버리는 일이 십중팔구다. 이렇게 예외를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 뻔한 마음이라면 어떻게든 손을 보는 게 맞지 않나 싶겠지만, 이런 비합리적 태도는 내 몸의 207번째 뼈로 박혀 있다. 마이크 타이슨의 승모근이 날 때부터 두꺼운 것처럼 어떤 종류의 결함적 사고는 태어날 때부터 무덤까지 함께한다. 사람 일은 뭐든 장담할 수 없으니 특별히 거대한 멜랑콜리아가 나를 들이받아 삶의 뿌리까지 흔들린다면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아빌리파이: 항정신병 약제.
**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에 등장하는,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거대 행성.
윤
“너의 비밀을 알려줘.”
“그건 비밀이야.”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개인적 결핍은 비밀이다. 너무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결핍이 드러나는 일은 미리 회피해왔다. 강한 나의 자의식과 낮은 자존감 탓인데, ‘진짜’ 나의 모습을 알게 되는 사람은 모두 떠날 것이라는 불안이 언제나 기저에 있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을 이로부터 비롯된 긴장감과 불안에 빠져있었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했다*. 나는 나 자신을 ‘두 개의 나’로 분리 시키는 훈련을 오랫동안 해왔다. 나는 그걸 ‘유체이탈하기’ 라고 불렀다. 관찰자로서의 내가, 존재하는 몸을 벗어나 나의 머리 위에서 실제로 보여 지는 나를 내려다보는 방식이었다. 나는 제어가 불가능한, 가령 들뜨거나 과할 때의 내 모습을 혐오했고, ‘유체이탈하기’는 통제와 자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스스로를 점검하거나 조절할 수 있었으므로, 조금 독특하지만 좋아하는 습관이었다. 나는 늘 내 삶의 관조자여야만 했고, 그것이 타인에게 관찰 당하기 이전에 나를 숨기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결핍은 또 다른 결핍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었다. 이제 나는 정작 신이 나고 싶을 때 신날 수가 없어졌다. 관찰자로서의 내가 실제로 보여 지는 나, 즉 살아있는 나에게 방해가 된다고 느껴졌다. 안전한 나만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지나친 메타인지와 첨예한 검열은 오히려 나를 부자연스럽고 건조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비밀이란 심술궂어서 자기를 절대 보이기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누군가에게 공유되기를 간청하는 속성이 있다고 한다**. 나의 묵은 비밀 하나가 내 손을 떠났다. 내 비밀은 잠시 바람을 쐬다 오기로 했다. 씹다 뱉은 껌처럼 이리저리 붙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솔직하다는 건 뭘까? “난 사실 멋 내는 게 좋아. 아무도 모르게 은근히 슬쩍슬쩍.” 이번 연재를 준비하면서 자꾸 음악가 ‘이랑’의 노래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흥얼거리게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노래의 가사를 참 좋아했다. 나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언니는 없지만.
“그러니까 너도 함부로 나한테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그렇게 말 하지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
*/** : 은희경, <새의 선물> (문학동네, 1995)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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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
상호불가침독백이라니… 이런 형식의 기획 넘 재밌는데요!ㅎㅎ 문득 나의 결핍과 비밀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다 나조차 나를 알지 못하는데 내가 대체 누굴 제대로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절로 겸손해집니다… 이랑 씨 노래를 들으면서 담주 목요일이 오길 겸허히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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