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이 <초록물고기> 이후 20년이 흘렀다.
90년대 중반.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던 그 때의 공기를 필름 속에 담아낸 그 영화를 보고
마치 잊고있던 가족들의 사진이 담긴 앨범을 꺼내 본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일곱 살 꼬마였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 때 그 시절만의 감수성.
지금은 일산 신도시가 되었지만 주인공인 막동이가 살던 일산은 반은 농촌의 모습, 반은 아파트 건설현장인 기묘한 공간이었다.
이제는 '20년 후 막동이'가 살고있는 2018년에 <버닝>이 개봉했다.
2018년의 막동이는 '종수'라는 소설지망생 청년이다.
나와도 처지가 비슷한 그런 청년이었다. 나도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이 꿈이지만 데뷔를 하려면 한참 멀었고
글을 '쓰려고 하고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그 일을 하며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를 해야한다는 점도. 그런 공통점 때문에 더 기대를 하며 영화를 보러 갔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보는 '요즘 젊은이'는 어떨까 궁금한 마음도 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보다는 좋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영화 속에 표현된 불안이나 무력함, 분노, 절망 같은 것에 공감이 가지 않았다. 스토리와 캐릭터도 계속 모호한 채로 남아 끝이 나버렸다.
놀면서도 돈이 매우 많아 포르쉐를 타고 다니는 벤 (스티븐 연)에게 종수(유아인)가 느꼈던 열패감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지만 열패감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지만
더 나아가 그게 요즘 청춘의 감정으로까지 확대된다고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유도 알 수 없이 분노 혹은 불안을 느끼고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들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절망감.
요즘 시대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런 감정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하고 그 대상이 왜 자신을 분노하게 하는지 이유가 명확했다.
종수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를 돈 많은 그가 뺏어간 것 같고, 해미가 사라진 이후에도 태연하게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며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느니, 해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느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벤에 대한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리고 결국 종수는 벤을 '태워버리기로' 한다. 2시간 30분 동안 종수라는 청년이 집착과 의심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본 기분이 들었다. 종수와 벤의 대비는 다소 흔하고 상징적이어서 와닿지 않았다.
차라리 나는 <초록물고기>가 지금 봐도 요즘 청춘들이 공감하고 슬퍼할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때와 지금은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지만 사회에 처음 나온 그 불안함과 잃어가는 순수함은
생활상이 바뀌어도 인간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이 (한석규)가 피묻은 손으로 집에 전화를 걸어 가족들에게 옛날 추억을 이야기하는 장면, 가족들이 마당에 둘러앉아 웃고 떠드는 장면들은 지금 떠올라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버닝>에서는 특히 해미라는 캐릭터를 그린 방식이 조금 불편했다. 그녀는 종수와 벤의 욕망의 대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약간 땅 위를 붕 떠 있는 듯한 신비롭고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종수에 비해 해미는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인물이라고 느껴졌다.
섹스를 하거나, 옷을 벗으며 춤을 추거나, 노을을 봤던 날을 회상하며 눈물 짓거나...
그녀는 주체적인 존재라기 보다는 아직은 아이같아서 보살펴줘야하고 그러면서도 남자들의 욕망을 담은 대상으로 비춰졌다.
해미가 사라진 이후에는 맥거핀으로 작용할 뿐 그녀가 왜 사라지게 되었는지, 진정 뭘 원했던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다.
신비롭고 묘한 작품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다.
결말을 보고 나서는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 생각났는데 그 영화들은 아직도 극장을 나설 때의 여운이 떠오른다.
위의 두 영화들은 어떤 기성세대의 시선으로 그려낸 영화가 아니라 청춘의 시선과 감정에 눈높이가 맞춰져있어서 그런 듯하다.
<초록물고기>를 만들었을 때 이창동 감독님은 아마도 막동이에게 자신을 이입해서 캐릭터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종수와 해미, 벤을 다른 세대의 시선으로 약간 떨어진 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시>에서 미자의 이야기가 와닿았던 것도 어쩌면 캐릭터와 같은 세대인 감독이 공감하고 눈높이에 맞춰서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자신이 잘 아는 것, 자신이 속한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힘과 울림은 더 커지는 것 같다. 물론 많은 고민을 담아내서 영화를 만든 흔적은 느껴졌지만, 당사자성이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다. 진심으로 내가 느낀 것, 내가 느꼈다고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이미 내 안의 이야기가 된 것. 나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있을까?
무려 7년 전의 영화 노트를 이렇게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개인적인 사정이 겹쳐 극장에 가지 못했어요. 새로 보게 된 영화도 없었고요. 영화를 볼 마음의 여유가 없던 한 주였습니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예전에 썼던 영화 일기를 찾다 이 글을 발견하고 여러분들께 보냅니다. 지금 읽어보니 다소 민망하고, 엉성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들었던, 날것 그대로의 감상을 살려 이번 레터에 담아보았어요.
<버닝>을 너무 재밌게 보셨던 분이 계시다면 이 글이 납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들었던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점을 감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7년이 지난 지금은, <버닝>이 너무 좋았다, 인생 영화다! 라고 까지는 아니지만 '종수'라는 인물의 감정이 좀 더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주의 저도 현실적인 방법으로는 자신의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없는, 어떤 한계에 갇힌 듯한 그런 무력감을 많이 느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보았던 영화도 다른 의미로 개인에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특히 앞에도 언급했던 <초록물고기> 속 공중전화 씬을 보며 가족과 보냈던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면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은 감정도 느꼈어요. 전에는 그 정도까지 절실하게 와닿지 않았는데... 시간이 흘러 아버지의 건강도 나빠지시면서 우리 가족이 보냈던 그 별 것 아니었던 하루들이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더라고요.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진 지금 <초록물고기>는 단순한 영화를 넘어서 '나의 이야기'같은 작품이 되었어요.
<버닝>을 재밌게 보셨다면, <초록물고기>도 추천합니다!
여러분들은 2018년 5월 24일 즈음에 어떤 영화를 보셨나요? 혹은 이번 주 어떤 영화를 보고 오셨나요.
그 영화에서 느꼈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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