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8. 연말이니까요

<어바웃 어 보이>, 폴 웨이츠 & 크리스 웨이츠, 2002년 개봉

물려받은 유산으로 백수 생활을 즐기는 윌은 가정을 꾸리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직업을 가져본 적도 없고, 여자와 즐기는 것 이상의 관계는 원치 않는 윌은 우연히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야말로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자신이 원하는 조건에 딱 맞는 상대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싱글맘과의 만남을 위해 ‘혼자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모임’에 싱글대디인척 참석한 윌은 그곳에서 왕따 소년 마커스를 만나게 되고, 예기치 않게 마커스의 보호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마커스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커스를 통해 본인이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깨닫는데요. 인간은 섬처럼 홀로 있을 때 가장 완전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윌과 언제나 여분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마커스. 두 보이의 성장 스토리의 끝은 어떻게 될까요?

<어바웃 어 보이>는 닉 혼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러브 액츄얼리>,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 로맨스 영화 명가로 소문난 ‘워킹 타이틀’에서 제작하고, 웨이츠 형제가 연출을 맡아 제75회 아카데미 각색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어요. 휴 그랜트가 몸만 자란 어른 ‘윌’을, 정변의 아이콘 니콜라스 홀트가 ‘마커스’ 역을 맡았는데요. 귀염뽀작한 니콜라스 홀트를 보고 싶은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당시 만 11세였던 니콜라스 홀트는 귀여운 얼굴로 천진난만함과 어른스러움을 동시에 보여주며 호평받았는데요. 이후 훈훈한 외모와 함께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인 드라마 <스킨스>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어요.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며 찍은 작품들은 관객들의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경우가 많아 개인적으로도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어바웃 어 보이>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인간은 섬’이라 생각하는 윌과 ‘우리의 삶에는 여분의 인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마커스의 내레이션이 교차되며 진행됩니다.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가져본 적도, 가정을 꾸려본 적도 없는 윌은 사람은 모두 섬이며 자신은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꽤 멋진 섬이라 생각합니다. 친구들이 결혼을 권할 때마다 섬은 본디 홀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왜 뭉치지 못해 안달이냐 생각하죠. 그의 인생은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반대로 마커스는 군도(무리를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섬들)가 필요합니다. 이혼한 엄마와 둘 뿐인 삶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리는 엄마가 자기만 남겨두고 떠나버릴까 늘 두려워해요. 그리고 마커스의 걱정이 현실에서 일어나자 정말로 외딴섬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자신과 엄마를 위해서라도 백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우연히 만났던 윌을 떠올립니다. 엄마와 윌을 이어주고 싶지만 바람대로 되지 않자 마커스는 학교가 끝나고 매일 윌의 집에 찾아갑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윌의 섬에 다리를 놓기 시작한 거죠. 귀찮기만 했던 마커스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과 아이가 차마 털어놓지 못한 두려움까지 알게 되자 윌은 측은한 마음에 목적 없이 순수하게 호의를 베풀고, 마커스가 좋아하는 모습에 내심 뿌듯함도 느낍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마커스를 기다리게 되죠.

외딴섬 같은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즐겼던 윌과 달리 마커스는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지만, 학교에서도 외딴섬이고 집에서도 외딴섬이 될까 두렵습니다. 마커스가 불안을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은 윌과 함께 할 때에요. 말로는 여분의 사람이 필요해서라지만 마커스는 보통의 아이들처럼 어른에게 보호받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항상 윌을 찾았던 걸지도 모릅니다. 얼핏 보면 꽉 채워져 보이는 윌의 삶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처럼 보이는 비어있는 구멍 같습니다. 그리고 마커스를 통해 텅 빈 구멍을 직시하게 되고, 그 속을 사람들로 채우는 법을 배우죠. 영화에서는 윌을 묘사할 때 ‘blank, nothing, nobody’ 같은 단어들로 표현하며 그의 삶이 비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윌이 도시의 군중 틈에서 홀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인물의 고립을 표현하며 윌의 삶이 텅 빈 구멍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하는데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윌처럼 인간은 섬이라고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염세적인 인간이 되어 ‘역시 인생은 혼자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인간은 무리생활을 통해 진화해왔고 미우나 고우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매번 영화를 볼 때마다 윌의 마지막 대사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돼요.

영화는 무위도식하며 인생을 소비하기 급급했던 싱글 남자와 보살핌이 필요한 열한 살 소년의 만남을 통해 ‘인간은 섬이지만 바다 밑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말합니다. 구독자님은 어느 쪽에 가까운가요? 저는 인간은 섬이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타인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줄 아는 섬이라고 생각해요. 섬과 섬을 이어주는 다리는 우정이 될 수도, 사랑이 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저마다의 섬이 존재할 수 있는 건 바다 아래 섬과 섬이 굳건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바웃 타임>, 리차드 커티슨, 2013년 개봉

모태 솔로인 팀은 성인이 되는 날, 아버지로부터 가문 대대로 남자들에게 전해오는 시간여행 능력에 대해 듣게 됩니다.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으로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다거나 억만장자가 될 수는 없지만, 모태 솔로는 탈출할 수 있으리! 꿈을 위해 런던으로 간 팀은 우연히 만난 사랑스러운 여인 메리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시간여행 능력을 발휘해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고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냅니다. 하지만 메리와의 사랑이 완벽해질수록 팀을 둘러싼 주변은 미묘하게 엇갈리고,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과연 팀은 완벽한 사랑을 이루고, 주변 사람들도 지켜낼 수 있을까요?

<어바웃 타임>은 국내에서 2013년 12월에 개봉, 연말 동안 3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는데요. 식상하다 해도 연말과 로맨스 조합은 진리임을 증명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연출은 리차드 커티스 감독이 맡았는데요. 개봉 이후 수많은 남성에게 고백 플랜카드를 쓰게 만들었던 <러브 액츄얼리>를 연출한 감독이기도 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찌질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팀을 연기한 돔놀 글리슨은 <어바웃 타임>을 통해 휴 그랜트의 뒤를 이을 배우로 꼽히기도 했다고 해요. 하지만 팀보다 더 눈길이 가는 인물은 메리 역을 맡은 로맨스 장인 레이첼 맥아덤스 였습니다. 감독은 “출연한 영화마다 항상 충만한 사랑과 편안한 감정으로 관객을 녹아내리게 만드는 배우”라 평했는데요. 정말로 레이첼 맥아덤스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인물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랑스러운 미소지만요.🙂

영화는 시간여행을 매개로 주인공 팀의 삶의 여정을 통해 현재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합니다. (주어진 길이는 다르겠지만)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 중 하나가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관건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할 것인가입니다. 영화는 SF적인 소재를 통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시간을 맞이하는 방식과 관련해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것은 팀의 아버지가 찾은 행복의 비밀 공식이기도 하고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똑같은 하루를 두 번 살아보는 것이죠. 첫날에는 짜증 나고 힘든 일투성이지만 두 번째는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주변을 살필 여유를 찾고, 바쁜 일상에 가려져 있던 찰나의 행복과 시간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팀에게 “인생은 누구나 비슷한 길을 걸어가고 결국엔 늙어서 지난날을 추억하는 것뿐”이란 조언을 남기는데요. 감독이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도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추억할 지난날을 조금 더 가치 있게 보내길 바란다는 조언이요.

<어바웃 타임>이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다른 영화들보다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졌던 건 주인공이 시간여행 능력을 아주 사소한 곳에 사용했기 때문이었어요. 어두운 곳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과거의 어느 시점을 생각하기만 하면 이뤄지는 초간편 시간여행을 팀은 사랑을 쟁취하는데, 팀의 아버지는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는 데에만 사용해요. 주인공이 시간여행을 통해 극적인 변화를 끌어내기보다 일상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장치로만 사용했다는 점이 다른 시간여행 영화와의 가장 큰 차이점 이자 식상할 수 있는 소재를 재치 있게 만들어 준 요소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특유의 영국식 유머를 곁들여 아기자기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건 덤이고요.

인생을 비유하는 대표적인 단어들이 있죠. 마라톤이나 여행처럼요. 저는 여행에 비유하는 걸 좋아합니다. 때로는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자유롭게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여행처럼, 인생 역시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만끽하다 보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일상의 사소한 것들도 지난날의 추억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어바웃 타임> 속 시간 여행에는 한 가지 규칙이 존재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이전으로는 갈 수 없다는 것이죠. 이것도 현재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 위한 설정의 일부이자 팀이 아버지의 교훈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더이상 시간여행을 하지 않고도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요소가 됩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 중 하나가 ‘시간’이라면 다른 하나는 ‘죽음’입니다. 누구도 영원불멸의 삶을 누리진 못하니까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시간과 죽음이기에 행복한 삶도 생각하기 나름이고, 마음먹기 나름 아닐까요. 어쩌면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아주 거창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지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냈던 모든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팀과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콘월 해변 산책 장면의 여운이 짙게 남는 영화였어요.

Epilogue

연말에 다시 보고 싶은 영화는 정말 많지만, <어바웃 어 보이>와 <어바웃 타임>은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어떤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보낼 것인지 생각하기 좋은 영화라 2022년의 마지막 레터에 소개했는데요. 두 편 모두 여러 번 감상했지만 볼 때마다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 대로 살아보겠다 다짐하고도 금세 잊어버리고 툴툴대며 살다 연말을 맞이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 함께보면 좋은 추천 콘텐츠: <어바웃 어 보이> & <어바웃 타임> OST

오직 엄마의 행복을 위해 교내 록 콘서트에 탬버린을 들고 나간 마커스와 그런 마커스를 구원(?)하려 기타를 둘러메고 무대에 오른 윌이 함께 불렀던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을 <어바웃 어 보이>의 추천곡으로 골라봤습니다. 당연히 더 잘 부른 것도 듣기 좋은 것도 원곡이겠지만! 눈까지 감고 열창하다 깡통을 맞고 장렬하게(?) 퇴장한 휴 그랜트 버전이 훨씬 강렬한 인상을 남겼음을 부정할 수 없네요.😂

리차드 커티스 감독은 음악을 잘 쓰는 감독 중 한 명이기도 한데요. <어바웃 타임> 역시 그의 다른 작품 못지않게 영화에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음악들이 많습니다. 그중 발행인이 무척 좋아하는 (특히 겨울만 되면 캐럴만큼 자주 듣기에 사심을 왕창 담아) ‘How Long Will I Love You’를 추천합니다.

🔗 소개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OTT

🔖 Reference (씨네아카이브 참고자료 출처 표기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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