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소개 30-2 / 연인, 마그리트 뒤라스

단 한명의 사랑이 살려낸 소녀

2025.01.01 | 조회 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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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의 고전 읽기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고전 문학 이야기

메일 수신 시 '웹에서 보기'로 읽으시면 포맷이 좀 더 눈에 잘 들어와요.

 

  • 금기의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의 원작으로 이미 유명한 소설, 하지만 사실은 가족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 연인이었던 남자는 소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던 단 한명의 어른이었어요. 
  • 불행한 가정 환경 속에서 단 한명의 사랑을 자양분 삼아 성장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 사실은 작가 자신의 성장기이죠. 
  • 영화 제작 때 작가는 결국 참여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글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와 영화가 많이 달랐나봐요. 

 


 

* 마그리트 뒤라스, '연인'에 대한 스포일러 없는 간략 소개는 ↓

연인, 마그리트 뒤라스 - 작가 및 책 소개

 


 

 

영화 때문에, 제대로 영화를 본 적이 없어도 한번 보면 잊기 힘든 그 영화 포스터 때문에, 책 표지 때문에, 도발적인 금기의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로맨스가 큰 줄기를 이룬다. 게다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니. 흥미로운 요소가 가득하다. 책을 펴는 순간 첫 페이지의 도입부는 독자를 바로 사로잡는다. 현재 노년에 접어든 화자에게 갑자기 모르는 낯선 남자가 다가와, 당신이 젊을 때 아름다웠다는 말들을 많이 하지만 자신은 지금 이미 ‘거칠어진’ (‘devasté’ / p.9 - Les éditions de minuit)’ 당신의 얼굴이 더 좋다는, 묘한 말을 건넨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는 화자의 어린 시절. 자신이 사실은 이미 애늙은이 같은 모습을 이미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던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쉽게 말하곤 하던 가난 때문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책에 빨려 드는 순간 우리는 화자의 어린 시절로 급하게 들어간다. 대부분의 독자가 기다리는 그 남자와의 만남은 아주 빨리 등장한다. 1950년대 프랑스 하에 있던 인도차이나반도, 현재 베트남 지역 메콩강을 건너는 여객선, 그리고 이상한 옷차림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백인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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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바라진 소녀의 로맨스를 가장한 이야기는 사실은 온전치 못한 가정환경 속에서 방치되어 외로움과 불안함 속에서 살아가는 막 사춘기에 들어선 불우한 화자의 삶을 조명한다. 이야기의 시작에는 가족이, 폭군과 같던 오빠가, 소녀에게 깊이를 알 수 없는 결핍을 안겨준 엄마가, 그렇게 자라온 소녀의 불행이 있다. 사춘기가 된 소녀의 요란한 옷차림을 덤덤하게 묘사하지만 구석구석 그런 행색의 이유를 알 수 있다. 꽤나 가슴이 깊이 파진 소매 없는 빛바랜 실크 원피스는 엄마에게 물려받았는데, 이미 헤질 대로 헤져 실크 원단이 거의 투명에 가까웠고 갈색빛이 돌자 엄마가 더 이상 자기가 입기 싫어 딸에게 준 것이고 – 이해할 수 있는가, 이 엄마라는 사람을 – 늘어진 원피스로 멋 내기 위해 허리에 두른 벨트는 오빠 것이었고, 눈에 튀는 금빛 굽 있는 구두와, 리본 달린 중절모는 자신이 골라 신었지만, 역시 딸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키운 엄마의 관심이 미치지 않은 탓이었다. 물론 화자는 모두가 다 자기는 마음에 들었고, 자발적으로 그런 차림새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물론 그 또한 맞는 말이다. 사춘기 소녀는 도발적인 옷차림을 좋아하니까. 그런 엄마의 무관심이 오히려 마음대로 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당시 프랑스 본국을 떠나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살던 가족은 경제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극도로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집에는 일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풍토병으로 일찍 세상을 뜬 남편을 대신하기 위해 소녀의 엄마는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사설 학교의 원장으로 지내기도 했고, 프랑스어 학원을 열기도 했다. 여러 이유로 직장이 자주 바뀌었고, 아이들은 이렇게 저렇게 적응하며 지내야 했다. 정부는 식민지 지역 토지 개발권을 팔았는데, 그중에는 제대로 검증 안 된, 개발에 부적합한 곳들도 부지기 수였고, 땅에 대해 큰 지식이 없는 엄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을 구매해 결국 모든 돈을 바다에 날린 셈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이런 경제적인 상황보다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엄마와 함께 지내는 것이 더 힘들었건 같다. 어떻게 던 생활을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지치고 지쳐 거의 반쯤 제정신이 아닌 채 조울증을 앓고 있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된 보살핌 없이 지낸다.

소녀는 오빠가 둘 있었는데, 첫째 오빠는 엄마의 맹목적인 사랑을 등에 업은 폭군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무렵의 소녀는, 단 하나, 아주 확실한 제대로 된 이유 하나만 생긴다면 오빠를 죽일 거라고 결심했을 만큼 큰오빠의 존재가 끔찍했다. 극도로 이기적이며 악한 큰오빠는 소녀와 순한 둘째 남동생 위에 군림했으며 집에 늘 공포감을 조성한다. 엄마는 공부에 영 취미가 없는 큰아들이 직업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프랑스로 보낸다. 프랑스에서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도 않았으나 엄마는 큰아들을 두 동생들과 분리 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 계속 방치해 둔다. 그런 가족 안에서 소녀는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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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결핍, 불안함이 일상이던 생활 속에서 마주치게 된 남자는, 사실상 소녀에게 헌신적이며 안정적인 사랑을 베풀어준 첫 번째 어른이었다. 모든 상황이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용납되지 않을 만한 조건이었기에 언젠가는 끝날 것을 알고 이어간 관계였지만, 소녀는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을 받아주고 보호하는 애정을 경험하게 된다. 욕망하고 원하는 것, 변덕스러움을 그저 다 받아주는 사람. 경제적인 부유함 역시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결핍과 불안함이 가득했던 집, 수많은 학생들과 같이 지내야 했던 기숙사를 벗어나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독립된 공간에서 몇 시간씩 단둘이 지낼 수 있게 되고, 좋은 곳에서 맛있는 걸 먹기도 한다. 자신의 치부와 같은 가족도 소개한다. 자신의 이상한 가족들에게 고급 식사를 대접하면서도 가족들의 멸시 어린 시선을 감내하는 남자는 소녀를 사랑해서 언제나 조심스럽고 항상 모든 요청에 응해주는 사람이었다.

둘의 관계는 결국 소녀가 프랑스로 떠나며 끝난다.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이별이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헤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둘의 이별을 수월하게 해주었지만, 비로소 소녀는 떠나는 배에서 자기가 그 사람을 사랑했었다는 것을,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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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로 장식된 소설의 속을 들여다보면, 그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결국 내면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적으로 원 가정에서 독립하게 되는 소녀의 성장이 보인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단 한 명의 사람 덕분에, 그 사랑을 양분 삼아 내면의 힘을 무럭무럭 키워 나간다. 가장 힘들고 불안한 시기에 만나 이상한 관계를 맺었던 남자는 이렇게 그녀가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소설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러 시기의 가족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가장 마음이 갔던 작은오빠는 따로 살게 된 이후 다정한 편지를 한번 보내준 것이 다였는데, 결국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자신의 아들이 죽었을 때보다 더 큰 상실감을 경험한 화자는 더 이상 자신의 원 가족과는 이어진 끈이 전혀 없다고 느낀 듯하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큰오빠는 여전히 사람답지 못한 삶을 살고 있고, 엄마는 그 오빠와 살며 모든 재산을 다 뜯긴다. 이미 인연은 끊겼으나 어머니가 말년에 이르렀을 때 한번 찾아가 만나보게 되고, 큰오빠의 사망 소식은 시간이 지나 남을 통해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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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쓸 때 70대에 들어선 작가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이 전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도 여러 번 자신의 유년 시절,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살던 시기를 배경 삼아 여러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대체적으로 그 시기의 빛나고 선명한 부분 (claire, éclairé / p.14 - Les éditions de minuit)에 대해 적었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어린 시절 중 숨겨져 있던 부분을 드러내기로 한다. 어떤 사실들, 감정들, 사건들을 뒤져내어 적는다. 그 메콩강을 건너는 순간, 사진 한 장 찍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때, 그 남자를 만나게 된 결정적인 순간. 당시에는 의미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그 짧은 파편에 대한 이야기.

노년에 접어든 작가는 언젠가 자신의 자양분이 무엇이었던가 생각을 해봤을 수도 있겠다. 자신이 이렇게 자아를 드러내며 날개를 펼칠 수 있게 된 것은 아마도 그 만남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글로 이런 삶을 들여다보는 독자는, 수많은 힘든 시기를 자양분 삼아 끝내 훌륭한 글을 써내고, 세상에서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게 된 작가를 보게 된다. 누군가는 진흙 속에서 끝끝내 살아나 연꽃을 피운다.

난해한 문장 때문에 소설 자체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겨우 한번 읽은 뒤 재독을 했고, 감상을 정리하기 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미 여러 달이 지나, 내용을 거의 다 잊다시피 해, 다시 한번 책을 들춰보았다. 한참 문장과 단어 속에만 빠져 있던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사춘기 소녀가 가질 법 한 세상에 대한 욕구, 이성에 대한 욕망, 성적 매력에 대한 인식이 한참 발현되기 시작할 때 우연히 만난 한 사람의 사랑을 통해 생존한 소녀, 작가가 보인다.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은 우리를 결국에는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준다. 방향을 모르는 욕구는 불안한 여행을 권하기도 하고, 함정에 빠뜨리기도 할 텐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누구도 알려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제대로 된 단 한 명의 사랑 만으로도 내면의 힘을 키울 수 있다. 세상에 소외된, 막막한 어둠 속에서 헤매는 소년 소녀들이, 포기하지 않고 누군가의 사랑을 자양분 삼아 그렇게 살아날 수 있기를.

 


 

한국 번역본의 번역이 썩 매끄럽지 못하다는 후기를 들었다. 원문은 아무리 봐도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두고두고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인데. 여전히 제대로 읽지 못한 느낌이라 계속해서 갈증이 난다. 뒤라스를 이렇게 만나게 되어 좋았고, 작가의 문장에 대한 갈증과 욕망이 나를 어딘가로 이끌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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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 제인 마치의 눈빛과 양가휘의 멋진 자태는 글로 접하며 상상하는 이미지에 비춰 전혀 실망스럽지 않다. 제작 때 뒤라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중간에 참여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건 자신의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으니, 소설과 결이 꽤 다르다고 생각하고 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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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한결같은 빛을 발하는 고전 문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어요.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작가의 작품, 너무 유명해서  마치 읽은 것 같지만 사실 들춰본 적도 없는 책, 어릴 때 아동용 요약본만 읽었던 책들, 그런 고전들 위주로 읽고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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