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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년의 짧은 생에 동안 약 10년에 걸쳐 구상하고 결국 마지막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아내에게 구술로 마무리를 했다는 소설. 작가가 살던 시대에 대한 사회 풍자를 돌직구로 날리지만 무겁거나 경직된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활기차다. 심각한 사건들이 줄을 잇지만 이야기 자체는 그저 밝고 유쾌하다. 시간을 많이 들였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지는 어마한 스케일과 수많은 등장인물들, 그리고 끊임없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각종 사건 사고들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작가가 아주 세밀하게 계획하고 배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대한 스포일러 없는 간략 소개는 ↓
거장과 마르가리타, 미하일 불가코프 - 작가 및 책소개
20세기 최고의 러시아 소설이라고 평할 만큼 이야기의 조밀한 짜임새와 내포하고 있는 풍부한 사색 거리 덕에 매력적인 작품이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지만 문장들이 밀도 있고 세밀하며 등장인물도 많기 때문에 - 즉,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길고 어려운 러시아 이름들의 무한 등장-, 쉬지 않고 따라가려면 독자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 편집되는데 첫 번째 이야기는 작가가 집필하던 시기, 그 당시 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진행되고, 또 다른 이야기는 예수 – 소설 속에서는 ‘예수아’로 등장 - 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처형 날에 대한 이야기이다.
만약 독자가 나처럼 무신론자이고 종교라는 것에 큰 기대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읽기 위해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와 당시 시대 사회적 배경에 대해 조금은 알 필요가 있다. 작가는 한창 혼란스러운 시기에 청년기를 지냈고 글을 쓰기 시작한 이십 대 무렵, 구소련은 스탈린 체제에 들어간다. 오랜 세월에 걸쳐 러시아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종교를 비과학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무신론을 앞세웠으며 적극적으로 예수의 존재라던가 신의 존재, 성경의 오류 등에 대해, 정치적 방향에 부합되도록 부정적으로 선전하는 작업을 한다. 그 시기에 종교, 또는 신을 믿는 것은 온전한 개인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는 하필 대대로 신학자인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사회가 한창 혼란스러운 시기에 청년기를 맞은, 젊고 지적이며 에너지 넘치는 작가가 어떤 심경으로 당시 사회를 바라봤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이런 배경 속에서 태어난다. 눈에 보이지 않고 현재 시대에 정확히 보여줄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오래된 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썩 실력이 출중하지 않은 시인에게 예수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시를 쓰도록 했고, 그 시에 대해 평가하며 자신만만하게 설교를 늘어놓는 문학협회장이 등장하는 걸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신을 부정하고 따라서 악마도 부정하는 그의 앞에 악마가 등장하고, 엉뚱하며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잔인하고 가차 없이, 문학협회장을 처형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에 가까운 악마 볼란드의 존재가 흥미롭다. 책 앞 제사로 인용해둔 괴테의 파우스트의 한 구절을 통해, 여기 등장하는 악마는 절대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빛과 어둠이 있다면, 빛을 드러내는 어둠을 담당하는 역할임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인 거장과 마르가리타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온화한 존재이나,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파괴적인 능력을 거침없이 발휘하는 존재. 사실 그 정도의 절대적 전지전능함과 무자비함이 아니면, 그 당시 시대에서 이런 선량한 주인공들을 도울 방도는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다시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두 가지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 둘은 마치 액자형 구성에 가깝게 전개된다 -완전히 그런 것은 또 아니지만-. 현재 모스크바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당시 러시아 사회를 거침없이 풍자한다. 신나고 기묘하며 몽환적이면서 때로는 잔인하지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짧은 며칠 사이에 끊임없이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수많은 사람이 모욕과 수치를 겪거나 살해당하는데, 그 모든 것은 볼란드, 즉 악마의 소행이기에 모든 사건들은 항상 대범하며, 응징은 가차없고 잔인하다. 볼란드와 그 일당에게 농락당하는 피해자들은 당시 사회에서 ‘기득권’이라고 여겨지는, 혹은 정치적인 상황에 기대어 안일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문학적인 방식으로 당시 독자들이 속 시원하다 못해 어쩌면 이렇게 좋아해도 되나 하고 민망해할법할 정도로 사회에 큰 응징을 가한다. 그것도 아주 구석구석.
그리고 난장판 같은 현실 속에서 악마 볼란드는, ‘거장’을 구해낸다.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거장’은, 이 책의 또 다른 큰 줄거리를 이루는 두 번째 이야기인, 무고하게 사형당한 ‘예수아’가 등장하는 소설을 쓴 작가이다. 그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예수아’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사형 집행을 중지하지 않은 총독 ‘본디오 빌라도’이다. 권력과 판단력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비겁하게 당시 사회 분위기에 수긍했고, 결국 그 댓가로 자책과 괴로움에 이천년 가까이 잠들지 못하는 벌을 받게 되며, 그런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헌신적인 개 한 마리가 곁에서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우리 식으로 생각해 보자면, 한이 서린 영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는 셈이랄까. 아무튼 거장의 소설 속 예수아는 본디오 빌라도를 통해 사람들의 업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역할을 할 뿐, 처형 이후 더 이상 출연하지 않는 조연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조연에 머무는 예수아의 존재는, 어쩌면 기독교인들이 믿는 종교의 예수의 역할과도 동일할 것이다. 현재 삶의 주인공은 나이지만, 그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이고, 혹시라도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면, 본디오 빌라도처럼 영원히 안식을 얻지 못하며 지내게 될 테니까.
이 작품 속에서 거장이 썼다는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소설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야기 정도로 해석될 법도 했으나 여러모로 민감한 사회에서는 누구도 선뜻 출판하려 하지 않는다. 검토를 한다는 명목하에 원고는 어느 출판사와 편집위원회의 거의 검열과 같은 과정을 거쳐 오랜 시간이 지나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되돌아오고, 결국 세상의 빛은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제대로 출판도 된 적이 없는 이 소설이, 갑자기 비평가에 의해 신랄하게 난도질당하게 되고, 일파만파 신문에 계속해서 화젯거리가 돼버린다. 이에 심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 거장은 아예 펜을 놓을 지경까지 다다라 생의 막다른 곳에서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간다. 이 거장의 삶은 사실 미하일 불가코프 자신의 생과 아주 흡사하다. 이 책을 처음 구상했던 때가 바로 작가가 대단한 유명세와 함께 엄청남 혹평도 함께했던 시기였고 이때 시작된 그에 대한 비판은 오랫동안 이어져 결국은 생전에는 제대로 작품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인 거장의 소설은, 그저 픽션으로 끝나지 않는다. 좌절한 거장은 원고를 불태우기까지 했지만, 결국 모든 이야기는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모호한 뫼비우스의 띠처럼 본디오 빌라도의 이야기가 거장과 악마인 볼란드, 그리고 현실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마치 역사의 한 단편처럼 여러 번 회자되며,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현실 세계와 본디오 빌라도의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져 마무리된다. 이런 결말은 마치 신과 악마, 그리고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의 존재 여부에 대해 증거를 제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종교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신념을 간직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 같기도 하다.
당시 사회에 대해 빗대어 이해하지 않아도 여전히 흥미롭게 생각해 볼 요소들도 많다. 거장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마르가리타라는 인물 또한 인상적이다. 고상한 집안에 정략적으로 결혼한 자신의 처지를 거침없이 벗어던지는 주인공을 그려내기 위해, 작가는 ‘마녀’라는 위치를 부여한다. 이 또한 볼란드의 악마적 능력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당시 ‘마녀’가 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또 이 외에도 내 경우에는 종교라는 것이 우리가 속한 사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 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무신론자에 가까운 내 입장에서, 신이 없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차 없이 응징을 받는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추상적인 개념, 신에 대한 믿음은 개개인이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으며, 신을 믿지 않는 내 주변 가까운 이들은 신을 믿으며 충실한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사회에서만이,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철학적인 사색 거리에 머물 수 있는 것이리라. 사람이 살아가며 자신의 행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는 추상적인 관념을, 사회에서 하나의 방향으로만 정의 내리려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방식으로 단순화하는 시대라면, 종교는 단순히 신을 믿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 작품의 내용에 대해 이런저런 사색을 즐기고 나면, 그 어떤 것보다도 미하일 불가코프가 이 소설을 약 10여 년간 놓지 않고 집필하고 퇴고하던 그 마음은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이미 이제는 한참 지난 스탈린 시기에 대해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현대 독자로서 이 작품을 보면 사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신랄해 작가의 용기가 놀랍게 느껴진다. 물론 황당무계할 정도의 초현실적인 전개와 희극적인 장면들로 무거움이 희석되기는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고난을 유머로 승화시켜 보기도 하고, 한 번씩은 치밀어 오르는 복수심을 담아내기도 했으려나.
사회의 제재 속에서 제대로 글을 발표할 수도 없는 시기를 아주 오래 보냈지만, 작품의 완성도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있어서 전혀 타협하지 않은 이 결과물을 보면, 결국은 평생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가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 속 거장은 스스로 정신 병동에 들어가 자신의 연인 마르가리타에게 구원받지만, 작가는 그보다는 그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 했던 것 같다.
작가의 결과물이 책으로 나오는 것까지가 모든 과정의 마무리라면, 작가의 사후에야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애쓴 아내 옐레나 세르게예브나가, 이 책 속의 마르가리타처럼 그에게는 스스로 마녀를 자처한 여신인 셈이다. 자신의 책 속 본디오 빌라도가 결국 거장의 소설 마무리로 영원한 안식을 얻었듯, 미하일 불가코프도 이제는 평안을 얻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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