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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해변의 눈이 멀 듯한 강렬한 햇빛과 숨 막힐 것 같은 뜨거운 열기, 바다에서 불어오는 축축하고 미지근한 바람이 내내 짓누르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표현하지 않는 주인공 뫼르소가 화자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뫼르소의, 뫼르소를 위한, 뫼르소에 의한 작품으로, 그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따라가게 됩니다. 아무래도 조금은 이상한 그에게 자꾸만 의심이 들기도 하고 동시에 많은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먹먹함과 함께 아주 긴 생각이 남습니다.
출간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논쟁적인 작품이라는데,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나름의 방식으로 삶의 태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뫼르소에 대해 적어봅니다.
작가 알베르 카뮈와 이방인에 대한 간략 소개는↓
1. 이상한 사람들과 이방인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인생의 큰 사건이고, 이를 통해 일상에서는 많이 표출되지 않을 법한 행동과 속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사건의 중심에 있는 뫼르소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소화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다. 회사에 휴가를 내는 것부터 어쩐지 사장의 눈치가 보이고, 늘 가는 식당의 주인은 친절하지만 어쩐지 뫼르소의 감정보다 앞서 애도를 표하는 것 같다. 피곤하고 지치는 시골길을 지나 도착한 양로원에는 입관한 어머니를 보기 전에 양로 원장과 면담부터 해야 한다. 그렇게 어딘가에 등 떠밀리듯 장례를 치르는 장면은, 평범한 듯 조금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계속해서 마치 남의 일인 듯 자신의 일을 서술하고 으레 사람들이 기대할 법한 감정적 동요나 생전 어머니에 대한 추억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정신없이 치르고 집에 오는 길에는 슬픔보다는 이제 실컷 잘 수 있다는 해방감을 언급한다. 뒤이어 이어지는 일상 이야기 역시 무미건조하고 담담하다. 큰일을 겪었지만 감정의 기복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여러 번 반복 등장하는 ‘습관’이라는 표현, 대학을 다니며 야망을 품어본 적도 있었지만 학업을 외부의 어떤 이유로 그만두게 되며 사회적인 욕심을 내려놓게 되었고, 한때 파리에서 살았던 적도 있다는 과거에 대한 짧은 언급이 뫼르소에 대한 힌트처럼 주어진다. 익숙한 것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을 선호하고, 일상의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안정된 생활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하며 변화를 찾지 않는 것, 적극적으로 발을 내디뎌 여러 가지를 시도하기보다는 현재 자리 잡은 리듬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마도 어떤 과정을 지난 후,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방식, 또는 평온한 삶을 위해 나름 ‘터득한’ 방식 일 수도 있으리란 추측도 해보게 된다.
그는 일요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이 역시 습관 때문이리라.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주어진 일을 하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과 달리 일요일은 도통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비어있는 시간이다. 창밖으로 사람들을 관찰하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어머니가 생전 요양원에 계실 때, 차츰 방문을 덜 하게 되었던 상황에 대해, 그 역시 습관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휴일을 모두 써야 하는 일이라고도 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뫼르소의 과거나 어머니와의 친밀도에 대한 모든 맥락은 삭제하고 그저 무미건조하게 표하는 무감한 말들만 드러낸다. 독자는 불편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자문한다. 뫼르소는 이상한 사람인가? 그가 취하는 행동 방식이나 생각들이, 전혀 상상하기도 힘들 일이던가? 잘못된 생각인가? 그에게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하거나, 그의 행동에 서슴없이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정보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리고 때때로 뫼르소의 행동에 공감이 가기도 하기에, 우리 모두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 상황을 좀 더 알아야 판단할 수 있겠지. 그러면서도 내 스스로의 판단이 맞는지 끊임없이 의심스럽다. 1인칭 화법의 온전히 주관적인 서술을 따라가다 보니 쉽게 그에게 동화되는 것은 아닐까, 조심하게 된다.
확실한 것은, 뫼르소는 지나치게 솔직하고 사회적인 관습에 무지할지 언정, 뻔뻔스럽지는 않다는 것이다. 요양원에서 원장과의 면담을 나눌 때, 또는 타인들과의 대화에서 차라리 좀 더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당당하게, 혹은 과장된 슬픔을 연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제 겨우 데이트를 시작하고 감정이 싹트는 여자 친구가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지만, 분위기에 취해 서슴없이 사랑한다는 빈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어딘가 수상쩍은 친구 레몽을 선의로 대하면서도 그가 물어보는 잘못된 방향의 질문에 과장된 동의를 하지는 않는다. 남들과 비슷한 인생을 추구한다거나, 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기답지 않은 일을 하는 법은 없다. 남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을 포장하는 법도 없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방식을 주장하거나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런 그를 누군가는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주변인들은 과묵한 그를 오히려 믿을만하다 여기고 주로 호감을 가진다. 그리고 때로는 실제 모습보다 좀 더 그를 좋은 쪽으로 과장해 생각하기도 한다. 결국 사회의 모든 것에서, 모든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 누구도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그런 성격임을 비추어 볼 때,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그가 드러내는 무미건조함,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구는 모든 행동은 사실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지, 도통 방향을 알 수 없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몇몇 대목에서 갑작스럽게 겪게 된 어머니의 상실을 사실은 감정적으로 온전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란스러운 안부 인사와 애도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지인들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막 데이트를 시작한 마리에게도 자신이 최근 겪은 일에 대해 먼저 알리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의 장례 전과 마찬가지의 일상을 살아가려 한다. 사실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늘 함께하던 반려견을 잃어버린 이웃 노인, 살라미노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 생각을 하게 되고, 식사때가 지났지만 밥을 챙겨 먹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입맛조차 없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다시 자문한다. 뫼르소가 과연 이상한 사람인가?
다시 돌아온 일상에서 마주치는 뫼르소의 주변인들은 어떠한가. 아름다운 외모에 잘 웃는 마리는, 이제 막 데이트를 하고 알아가는 뫼르소가 - 어쩌면 아주 당연하게도- 정확하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구애하며 결혼하고 싶어 한다. 불법적인 일을 하는 걸로 의심되는 같은 아파트 주민이자 친구가 된 레몽은 애인의 태도에 기분이 거슬려 막말을 하고 바람을 피운다며 의심하더니 애인이 떠나버리자 비열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복수를 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또 다른 이웃인 노인 살라마노는 매일 자신의 반려견을 거의 학대에 가까울 만큼 윽박지르며 데리고 다닌다. 오히려 뫼르소 보다 더 이상할 수도 있는 주변인들을 통해, 뫼르소라는 사람과 그가 살고 있는 사회를 바라본다. 여자친구에게 몹쓸 짓을 하는 레몽은 자기 자신의 모습은 인지하지 못한 채, 반려견을 함부로 대하는 살라마노를 역겨워 한다. 살라마노는 반려견에 대한 깊은 애정을 거의 증오와 구분되지 않을 만큼의 폭력성으로 표현한다. 이 두 사람이 각자의 애정의 상대를 잃어버렸을 때 드러내는 원초적인 감정들을 독자들은 오히려 더 쉽고 분명하게 이해한다. 잘못된 방법으로 표출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감정 어딘가에 애착과 애정이 있다는 것도 쉽게 알 수 있고, 그들 행위의 옳고 그름도 판단할 수 있다. 그들은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책의 배경이 되는 그 시대에, 뫼르소가 사는 동네에서 이런 이들은 어렵지 않게 마주칠만한 인물들인 듯싶다. 언제나 사람들은 ‘예상 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옳던 그르던 덜 놀라고 더 잘 받아들인다.
2. 나쁜 사람, 뫼르소
1부는 사회적 맥락 속 이방인의 모습을 한 뫼르소의 형태를 스케치처럼 보여준다면, 2부는 좀 더 깊숙이 들어가 그의 존재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이방인이지만, 이것이 잘못된 것인가, 그는 왜 이방인인가, 이방인이고자 하는 그의 선택을 사회는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그리고 그는 정말 자기 방식대로 자기 의지대로 온전히 존재했던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너무도 더운 열기와 압박감에 짓눌려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체포되고, 재판에 소환된다. 뫼르소는 언제나처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즉 충실하게 아주 확실한 것에 대해서만 답하며, 사람들이 기대하는 변명이나 이야깃거리를 주지 않는다. 지나치게 정직하고 타인이 원하는 반응을 할 줄 모르는 그는 이방인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로 시작된 재판은 범죄 행위만으로는 진행되기 힘들어 보인다. 신이 아닌, 범죄자와 동일한 ‘사람들’이 ‘사람’을 심판하는 이야기. 다들 뫼르소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려 한다. 변호인은 그의 정상 참작할 만할 상황을 끌어내고자 하고, 검사는 그가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를 알리고자 한다. 이 사건에 무심하던 사람들은 그 시기 다른 관심을 둘 만한 다른 일이 없던 지라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죄를 저지르고 심판을 기다리는 뫼르소는, 이 모든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뫼르소를 이해하지 못하며, 똑똑하고 정의감 넘치는 검사는 도통 알아듣기 힘든 화려한 수사로 배심원단에게 호소한다.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선과 관심이 주인공에게 몰리는 이때, 그 어느 때보다 그는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전혀 짐작조차 못한다는 것으로 뫼르소가 얼마나 외톨이인지,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있는지 더욱 알 수 있다.
3. 끝과 시작
가장 극형인 사형이 선고된다. 받아들이기 힘든 판결. 살인을 저지를 때부터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한 번도 그 과정을 함께했다는 의식이 없는 뫼르소는, 갑자기 자신의 생을 끝내게 되는 것에 격렬한 거부감을 느낀다. 이 작품은 죄와 벌, 사형이라는 법 제도가 아닌, 그 앞에 선 고독한 주인공을 드러낸다. 자신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진행되는 모든 것이 납득하기 어렵고, 이때까지 자신의 삶에 대해 의식을 가시고 생각해 본 적 없던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격렬하게 존재를 인식하며, 역설적으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생을 갈구한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뫼르소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고,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이 밀려오는 지금 역시 그 입장은 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결국 신에 귀의하고, 초월적 존재로부터 삶의 불안함,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평온을 찾으려 하지만, 이런 방법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그가 늘 즐겨 찾는 방식 ‘습관’을 통해 평정심을 찾는다. 그는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결국 이르게 된 평온의 상태. 뫼르소에게는 이전에도, 이미 평온해지는 방법을 터득한 지금도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닌 ‘신’. 신부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뫼르소의 말을 납득하기 힘들어하며 좌절하고 계속해서 그에게 신을 강요한다. 이제는 독자도 일상 속에서 답답하고 우둔할 정도로 사회성이 없어 보이던 이방인의 모습을 오히려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서야 답답한 삶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제대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제발 뫼르소를 내버려 두라고, 자기 방식대로 남은 삶을 정리할 수 있게 제발 놔두고 떠나달라고.
4. 이방인의 삶
마지막에 이르면 뫼르소의 선택이 오히려 분명히 와닿고 공감도 가지만, 과연 그가 처음부터 격렬하게 자기 방식대로 살았던가 하는 질문을 떨쳐낼 수 없다. 한 명의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태도이기를, 일관된 생각이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의 정답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다. 이야기를 처음부터 되짚어본다. 뫼르소는 어떤 부분에서는 일관적이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스스로 성장해 나간다. 남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지만, 삶에 대해서는 비로소 죽음이 도래하자 인식한다. 과거를 후회하기보다는, 현재 자기 앞에 짧게 남은 유한한 삶, 형이 집행될 때까지의 그 시간을 이제야 온전히 적극적으로 살아간다. 이때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란 것을 해보게 된다. 신부에게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말하고,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순수하게 드러낸다. 이 전까지는 수동적인 이방인으로 살아왔다면, 남은 짧은 시간은,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만큼은 온전히 자기 방식대로 이방인의 모습을 고수하며 살아내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뫼르소의 모습을 독자 역시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5. 글을 닫으며
순수한 아이 같기도 하고, 그저 사회성이 부족한 외톨기 같기도 한 뫼르소를 관찰하면서 그에게서 때때로 내 모습을 발견하고, 그가 말하는 무심한 듯한 심정이 이해 가고 동화되기도 한다. 현실 세계에서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하고 단정 짓는 일들도 이 작품 속에서 뫼르소의 모습으로 만나면 그리 분명하지 않다. 뫼르소가 어떤 인물인지, 그가 살아낸 삶에 대해 여전히 남아있는 많은 질문들을 뒤로하고, 방향을 조금 틀어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뫼르소를 보면 ‘이방인’이라는 삶의 형태조차도 얼마나 주체적인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고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일부분 주인공의 성장소설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혹시 젊은 시절의 뫼르소가 아닌지 돌아보게 되고, 이왕이면 생의 끝에 이르기 전에 스스로 삶을 인식하고 좀 더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게 중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커다란 개연성 없이 ‘아랍인’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사람에게 총을 굳이 몇 발 더 쏜 행위에 대해서는 지금 시각으로는 논란의 여지도 있으며, 여전히 분명한 해석을 찾아내고 싶어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적이지 않은 죽음’이라는 상황에 반드시 이르게 하기 위한 설정임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주인공의 행동거지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현실적인 요소들을 만나는 초반에 비해 후반부로 갈수록 문학적인 장치들이 많아진다. 특히 가장 마지막 주인공이 방백처럼 내뱉는 문장들은 긴 여운과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겨 여러 번 읽게 된다.
실존주의라는 화두를 던지는 세세하고 치밀하게 구성한 이야기, 카뮈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이유를, 작가적 역량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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