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소개 25-1 / 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오락소설 탐정물을 문학으로 끌어올린 작가 / 작가 및 책 소개

2023.02.16 | 조회 7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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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의 고전 읽기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고전 문학 이야기

메일 수신 시 '웹에서 보기'로 읽으시면 포맷이 좀 더 눈에 잘 들어와요.

 

1. 레이먼드 챈들러 (Raymond Chandler 1888.7.23~ 1959.3.26), 어떤 작가인가요?

 
 

 

 

한때 나는 뭐든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레이먼드 챈들러가 쓴 소설이 아니면 탐정 이야기는 읽지 못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작가에 대해 찾아보면 조금 낯선 용어를 먼저 접하게 됩니다. ‘펄프 매거진’, ‘펄프 픽션’. 지금처럼 다양한 오락거리나 매체가 존재하지 않던 과거에는, 흥미 위주의 온갖 이야기들을 수록한 잡지들이 인기 있는 상품이었어요. 유명 작가들의 글을 싣는 잡지들도 있었지만, 문학적, 예술적 수준보다는 독자들의 흥미를 잡아끌 수 있는 글 위주로 선정한 이야기를 수록하는 매체들도 있었고, 인쇄지도 값싼 질 낮은 종이인 ‘펄프’ 지를 사용했기에 이런 잡지들을 통상 ‘펄프 매거진’이라고 지칭했습니다. 가격이 저렴했고, 시간 때우기용으로 한번 보고 휙 버리는 잡지들이었겠죠. 지금의 용어로는 ‘장르 문학’이라고 하는 다양한 형태의 소설들이 이 펄프 픽션들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정도로, 탐정소설, 연애소설, SF, 호러 등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이 있었으나 독자의 재미 추구가 최우선이라는 유사성이 있었습니다. 전개 방식이나 형식이 아주 제한적이었고, 정해진 틀을 벗어나는 집필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잡지 표지는 대게 자극적, 선정적이었어요.

무명의 많은 작가들이 낮은 고료를 받으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글을 써대는 구조였는데,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 했던가요. 비록 생계를 위해 쓴 펄프 픽션들이지만 이를 통해 오히려 독보적인 역량을 보여줄 수 있게 된 무명작가들도 있었으며 레이먼드 챈들러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였습니다. 경쟁적으로 글을 쓰던 수많은 펄프지의 작가들 틈에서 뒤늦게 작가로 커리어를 쌓아간 레이먼드 챈들러는 51살이 되어서야 첫 장편을 발표합니다. 

그의 인생은 여러모로 흥미롭습니다. 그의 시그니처와 같은 인물, 산전수전 다 겪은듯한 고독한 탐정 ‘필립 말로’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 느껴진달까요.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주정뱅이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3살경에 어머니와 영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런던에서 교육을 받고, 18살경에 파리로 가서 프랑스어를 익히고, 그 이듬해에는 독일로 가서 언어 공부를 한 뒤 다시 영국에 돌아와 영국 국적을 취득합니다. 영국에서 스무 살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해군성에 취직하지만, 지나치게 안정적인 직장 생활에서 오히려 회의를 느끼게 되어 6개월 만에 그만두고 그 해 12월 여러 신문과 잡지에 시와 서평을 실으며 작가로서 작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이어서 그 이듬해에는 ‘데일리 익스프레스’에서 기자로 일하기도 했어요. 이 시기까지 그의 행적을 보면 이미 그의 영혼은 방황과 방랑 사이 어딘가에 자유롭게 자리했다는 것과 언어뿐 아니라 문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글쓰기’를 향해 인생의 방향을 어느 정도 이미 정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51세가 되어서야 첫 장편을 발표한 레이먼드 챈들러는, 의외로 약 30여 년 동안의 청년과 중년 시기에는 작가와는 전혀 무관한 생을 살아갑니다. 서른넷이 되었을 무렵 미국으로 돌아와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고 다양한 일을 전전하며 회계 공부를 하고, 유제품 회사에 경리로 취직해 3여 년 만에 20대 후반의 나이에 샌프란시스코 지사장이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1919의 기간 동안은 군인으로 참전했고, 돌아와서는 다시 예전 회사에 복직을 했어요. 그리고 3년 후에는 석유회사로 이직, 그곳에서 약 십 년 만에 40대 초반의 나이에 부사장으로 승진합니다. 사회의 분위기나 상황이 지금과 많이 다르다 하더라도, 한 회사에서 꾸준히 근무하여 임원으로 승진까지 했다는 걸 보면 꽤나 성실하게 일했음을, 그리고 그의 업무 성과도 좋았음을 짐작할 수 있고 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것 같은데, 오히려 위기는 이때야 찾아옵니다. 

아내와는 사실 얼마 전부터 별거 중이었고, 부사장으로 임명된 다음 해 작가는 음주벽을 문제로 해고당했으며, 건강도 썩 좋지 않았어요. 그리고 미국은 대공황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생계가 막막해졌고 잠을 쉽게 청할 수 없는 나날들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빈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읽기 시작한 싸구려 펄프지들은 아마도 이 정도 글은 나도 쓸 수 있겠다는 욕구를 자극했나 봅니다. 1920년대에는 펄프지에 단어당 1센트씩 하는 원고를 팔기 위해 글을 쓰던 작가들이 천여 명 있었다고 하는데, 레이먼드 챈들러는 이런 잡지에 글을 기고할 수 있다면 글쓰기 연습도 할 수 있고, 비록 적은 액수라도 고정 수입이 생길 거라는 생각에 그 경쟁의 대열에 뛰어들었어요. 그리고 <블랙 마스크>라는 펄프지에 1933년 12월, 첫 단편 <협박범은 쏘지 않는다>를 실으며 데뷔합니다. 막막하던 인생의 막다른 길이 결국 큰 전환점이 된 셈이죠. 

쓰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리 먼 길을 돌아와도 결국은 쓰게 되는 것일까요? 5년 동안 치열하게 <블랙 마스크>, <다임 디텍티브>, <애틀랜틱 먼슬리> 등의 여러 펄프지에 단편 및 에세이들을 기고하며 일종의 작가 수업을 받은 그는 결국 51세의 나이에 첫 장편 <빅 슬립>을 발표합니다. 단정한 문장들과 무법천지의 미국 뒷골목에서 통용될법한 거친 표현들의 조화는 헤밍웨이와 대실 해밋 계보를 잇는 무미건조하고 거친 ‘하드보일드’ 문체를 통해 세련된 또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어요. 웬만한 일에는 눈썹 까딱하지 않는 단단한 내공의 거칠고 고독하며 가난하지만 정직한 사설탐정 ‘필립 말로’는 그전까지 독자들에게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익숙했던 셜록 홈스와 같은 탐정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현대적 탐정의 인물상을 각인시킵니다. 필립 말로가 등장하는 7편의 장편 소설과 여러 편의 단편을 남겼고, 50대 중반에 들어선 1943년부터는 할리우드에서 극작가로도 활발히 활동해 다수의 누아르 영화들이 그의 손을 거쳤습니다. 인기를 끄는 탐정 소설은 어느 정도만 쓰고 좀 더 전통적인 문학 장르로 전향할 생각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가 뜻하는 대로 되지는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가 남긴 독보적이며 개성 있는 작품들을 통해 작가는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수사물, 범죄소설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질 정도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우리에게 친숙한 무라카미 하루키도 레이먼드 챈들러의 팬을 자처하며 스스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해왔고, 일어 판본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2. 펄프 매거진 <블랙 마스크>와 추리소설의 변화

작가가 데뷔할 당시 상황이 궁금해 <블랙 마스크>라는 펄프지에 대해서 살펴봤어요. 당대의 여러 펄프 매거진 들 중 수익 면에 있어서는 꽤 성공한 잡지로 창간자들은 8회 정도의 출간 이후 짭짤한 수익을 남기고 출판사에 판권을 판매합니다. 새롭게 편집장을 맡게 된 조셉 T. 쇼는 처음에는 블랙 마스크라는 이름도 못 들어봤다고 할 정도로 이 잡지를 낯설어 했지만 꽤나 진지한 소명의식과 확고한 자신만의 철학으로 임했어요. 쇼는 초반에는 호러물부터 선정적인 소설까지 온갖 이야기를 다루며 분명한 방향성이 없던 <블랙 마스크>를 다른 장르에 비해 좋은 글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던 탐정소설, 범죄 소설 위주로 만들어 나갑니다. 펄프 매거진이라 해도 질적으로도 괜찮은 글을 싣고자 했고, 불황 속에서 무법의 갱단이 판치던 암울한 미국 사회의 모습을 고발하는 것을 잡지의 편집 방침으로 세웠다고 해요. 그는 범죄 수사물이 사람들의 사회 정의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을 것이고, 범죄자들에게는 자신들의 비열한 악당의 모습을 보여주고, 법 집행에 대한 퇴색한 이미지를 되돌려 놓는 것에 일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에 시민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불신이 커졌던 분위기가 <블랙 마스크>에 수록된 많은 범죄 소설이 정의를 구현하는 인물로 경찰보다는 사설탐정을 내세우는 이유이기도 했는데, 레이먼드 챈들러 역시 사설탐정인 <필립 말로>를 주요 인물로 등장시킵니다. 미사여구나 장식적이고 감성적인 형용사들이나 설명을 철저히 배제한 ‘하드보일드’, 즉 강건체의 문체 역시 <블랙 마스크>에서 요구한 것에 따른 결과물이기도 했어요. 쇼는 작가들에게 폭력이 넘치는 이야기를 쓸 것, 육체적인 흥분과 관련 없는 것들은 다 삭제하고 입체적인 인물들을 그려내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런 방침 아래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는 어찌 보면 혹독하게 또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미리 정해진 틀을 따라 편안하게 작가 수업을 받게 된 셈이죠. 하지만 몇 년 사이 성장한 작가는 그 틀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때를 마주합니다. 좀 더 풍부한 문장을 넣고 싶었고 마침내 단행본으로 출간하게 되는 장편에서는 자신의 세계를 좀 더 펼쳐 보일 수 있게 됩니다.

 

 
 

이 시기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의 흐름도 잠시 살펴볼게요.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 (1809~1849)를 추리소설의 창시자라고 하지만, 막상 이 장르는 영국에서 크게 발전했어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셜록 홈스를 만들어낸 아서 코난 도일, 좀 더 이후로는 아가사 크리스티 등 대부분이 영국 작가들입니다. 차분하고 지적이며 사회적인 위치도 꽤 괜찮은 신분으로 경찰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설탐정이 다양한 실마리를 통해 퍼즐을 맞추듯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형태라고 한다면 미국에서 1920년대경 발전한 수사물, 탐정소설들은 사뭇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어요. 폭력적이고 암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앞서 언급한 전통적인 추리 소설의 탐정들과는 전혀 다른, 거친 생활을 하며 긴박한 상황에 처하는 탐정들이 등장합니다. 미국 작가 데실 해밋을 선두로 레이먼드 챈들러 역시 이런 현대적 탐정의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필립 말로라는, 현대식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권총을 다루는 탐정. 줄담배를 피우고, 시도 때도 없이 술을 마시며 경제적으로도 썩 부유하지 않은, 냉소적이지만 의리가 있는 사람으로 차가운 듯하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3. 어떤 책인가요?

 
 

뒤늦게 생계를 위해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레이먼드 챈들러가 펄프 매거진을 통해 데뷔한지 약 5년 만인 1939년 발표한 첫 장편 소설입니다. 비록 뒤늦은 나이에 작가로 데뷔했음에도 초반 몇 년 동안 치열하게 갈고닦은 실력으로 인해 완성도 높은 첫 작품을 내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펄프지 <블랙 마스크>와 <다임 디텍티브>등에 기고했던 단편들을 토대 삼아 집필했으며 그의 이름을 확실하게 대중에게 알리고 작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해준 그의 대표작입니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사는 한 노인이 자신이 받은 협박 편지건을 해결해달라고 의뢰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가 소유한 부만큼이나 많은 문제를 떠안은 두 딸, 석연치 않은 불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과 건달들, 강력계 형사들을 통해 1920년 미국 상류층과 사회의 음울한 이면과 거친 뒷골목 등 당시 현실의 어두운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박진감 있게 그려냅니다. 영화로도 두 번 제작되기도 했어요. 작가의 시그니처와 같은 주인공이자 범죄 수사물이라고 하면 연상하게 되는 사설탐정의 전형, 이 책의 화자이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필립 말로’가 등장하는 첫 작품이에요. 아서 도넌 코일의 소설을 통칭 ‘셜록 홈스 이야기’라고 하는 것처럼, <빅 슬립> 을 ‘필립 말로 소설’이라고 지칭하기도 하며, 필립 말로 이야기는 이 작품 외에도 6편이 더 있습니다. 제목 <빅 슬립>은 영어에서 죽음을 뜻하는 은유적 표현이기도 한데, 이 소설 이후에 그렇게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추측들이 있습니다.

 


* 작가와 작품에 대한 설명은 책에 수록된 역자들의 설명 및 작가 연보와 아래 링크들을 참고했습니다.

 

 

4. 분량과 난이도

제가 읽은 문학동네 판본은 270페이지가 좀 넘었어요. 장편으로 적당한 길이인데 책장이 금세 넘어가는 전혀 난이도 높지 않은 책입니다. 중간에 긴장감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몇 있으나 굳이 쉬어가며 읽어야 할 정도는 아니라서, 시간만 넉넉하다면 한 번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거예요.

 

 

5. 이 책의 매력

누아르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소설입니다. 첫 장면부터 필립 말로의 냉소적이면서도 내공 단단한 모습이 바로 드러나고, 의뢰인인 스턴우드 장군과의 만만치 않은 대화는 독자를 즉각적으로 이야기에 몰입하게 합니다. 무미건조한 하드보일드 문체로 에둘러 말하지 않는 직설적인 표현들과 대사들이 등장하고 총과 마약, 폭력 등이 이야기의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면서도 갑자기 아주 정적인 장면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담긴 문장들이 등장하면서 그 대비에서 느껴지는 리듬감 또한 세련되고 우아하며 흥미롭습니다. 장면 장면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시각적이면서도 문장의 아름다움 또한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습니다. 필립 말로의 매력을 따라가면 금세 사건의 끝에 도착할 거예요.

 

"선생은 어떤 분인지 말해보시오, 말로 씨. 나도 들어볼 자격쯤은 있지 않겠소?"

"물론 그렇지만 말씀드릴 게 별로 없습니다. 저는 서른세 살이고, 대학을 다녔고, 지금도 필요할 때마다 영어 정도는 할 줄 압니다. 말이 별로 필요 없는 직업이지만요. 한때는 와일드 지검장 밑에서 수사관으로 일했습니다. 그쪽 수사팀장 버니 올즈라는 사람이 연락해서 장군님이 저를 만나고 싶어하신다고 전해주더군요. 경찰 마누라들을 싫어해서 아직 미혼입니다."

딥 슬립, 문학동네. p.15


* 좀 더 긴 독후감은 며칠 후 업로드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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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한결같은 빛을 발하는 고전 문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어요.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작가의 작품, 너무 유명해서  마치 읽은 것 같지만 사실 들춰본 적도 없는 책, 어릴 때 아동용 요약본만 읽었던 책들, 그런 고전들 위주로 읽고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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