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밤이 되면 냉장고는 자주 운다

🎼  류이치 사카모토 「Mizu no Naka no Bagatelle」, 2021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저는 그사이 비행기를 타고 더운 나라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눈을 뜨면 바다가 보이는 작은 펜션에서 지내며 낚시도 했습니다. 궁둥이 붙이고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마음이 조급하더라고요. 무리했더니 곧장 몸이 성을 냈습니다.

어느 날에는 제출할 서류가 있어서 한 문장을 쓰고 바닥에 눕고, 또 겨우 일어나 한 문장을 쓰고 바닥에 눕는 괴로운 밤을 보내기도 했어요. 몸이 파업을 하고나면, 그제야 내 몸이 격렬하게 읽기와 쓰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깨를 한껏 굽힌 채 자세를 바꾸지도 않고 하루종일 앉아 화면이나 종이를 들여다보는 일이 몸에 좋을 리 없지요. 지금은 유행이라는 감기 몸살과 함께 살고 있네요.

아프고 나면 욕심을 내려놓게 됩니다. 얼마나 대단한 인간이 되겠다고 말이죠?

적당히 하는 대신 부끄러움을 견디면 됩니다. 만사 부끄러움과의 대결입니다.

💧 장은진 - 울어 본다(2020) 

구독자 님은 소설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무언갈 좋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사라지고, 못 견디겠다거나, 싫어 죽겠다거나, 하는 건 자꾸 늘어가는데요. 그래도 아직 소설은 좋다고 말할 수 있어서 좋아요.

이유가 없이 좋기도 하고, 너무 많은 이유로 좋기도 해서 여러 번 읽은 소설을 구독자 님과 나눠보려고 합니다.

이미 읽으셨다면 반가운 마음이 들 것이고, 읽지 않으셨다면 읽고 싶은 소설 목록에 한 줄 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요.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이 편지만 가볍게 읽고 흘려도 괜찮고요.

처음으로 챙겨 온 소설은 장은진 작가의 ⌜울어 본다⌟입니다.

이 소설은 제가 부산에 지낼 때 종종 꺼내 읽던 작품입니다. 사람들이 북적이고 모르는 이들과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떠들던 책방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간 부산. 

부산은 정말 조용했어요.

제가 동거인이 다니던 회사의 사택에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모두가 출근하고 난 뒤의 작은 빌라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사람 소리가 사라지고 나면 사물이 온갖 소리를 낸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어요.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사택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이 썼던 냉장고와 세탁기의 거대한 울음을, 아프다고 외치는 듯한 소파와 침대의 삐그덕 소리를, 물을 똑똑 떨어뜨리는 벽걸이 에어컨의 흐느낌을 들으며 지냈습니다.

주인공 여자는 퇴근 후 쉽게 잠들지 못합니다. 주로 눈물이 나거나 허기를 느껴서, 가슴 속에서 열이 나서 그렇습니다. 냉장고의 울음을 들으며 함께 울거나, 냉장고 속의 음식으로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틀어막으며 지내고 있어요. 여자는 냉장고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주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뭘 먹고 한참 울다가, 냉장고 옆에 쓰러지듯 누워 잠을 청하곤 합니다.

여자의 유년 시절과, 여자를 차갑게 떠나간 남자 B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지만, 이 소설은 읽을 때마다 그런 부분은 자꾸 저 멀리 치우게 돼요. 그저 냉장고에 등을 대고 무언가와 치열하게 싸우는, 이름도 사는 곳도 알 수 없는 여자의 이미지에 사로잡히고 마는 이야기입니다. 얼음을 하나 꺼내어 입에 넣을 때마다 흐릿한 여자의 얼굴이 떠올라요. 그리고 저도 등 언저리에 고인 이상한 열기를 냉장고와 나누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책의 말미는 눈 오는 새해를 말하고 있는데도 제겐 남바완 여름 소설! 허기와 울음과 열기로 가득한 여름에 자꾸 생각나는 소설이에요.

5월부터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어요. 이 소설을 두고도 수강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소설 속의 냉장고에 관해 떠들다가, 집착하는 소비 품목과 사랑하는 물건, 추억이 깃든 사물 같은 것에 대해 글을 쓰기로 했어요. 그릇, 베개, 모아놓았던 영화 티켓, 신발... 여러 물건이 등장해서 무척 재미있었고요.

지난 봄에 이사를 마치고 난 뒤, 요즘 제가 가진 물건들을 들여다보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물건은 천천히 처분하고 있어요. 기능적으로든, 미적으로든, 심적으로든 의미 있는 것들만 곁에 두는 연습하는 중입니다. 아끼는 물건의 목록을 만드는 중입니다.

구독자 님 근처에 가까이 있는 물건은 무엇인가요? 잘살고 있느냐고 묻는 냉장고처럼, 자꾸만 질문을 던지는 물건은 없는지요?

한 해의 절반을 넘긴 시기가 되어서야 보내는 편지가 민망합니다.
여름엔 좀 더 자주 써보려고요.

2023.07.07.
오늘도 어지러운 방을 정리하며, 성은 드림.

P.S. 반가운 사람을 얼마 전 작은 서점에서 만났는데요. 제게 뉴스레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오늘의 레터를 적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