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2023년 마지막 날

🎼  소수빈 「말해주라」, 2023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요?

(거기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거기 계시는지요?

정말 오랜만에 쓰는 편지인데요.

올해를 보내면서 마지막 날에 할 일 가운데 하나로, 메일리에 들어와 편지를 쓰는 것을 자연스럽게 떠올렸습니다. (왤까요?)

열심히 읽은 소설에 대해 뭐라도 적어 메일을 보내보자는 것이 코너테이블의 여름 계획이었는데요.

고작 한 편의 소설을 편지에 적고는 소리 없이 사라져 지냈습니다.

저는 그동안 몇 개의 글쓰기 수업을 운영했고요. 평소처럼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운동이나 식단 관리는 전혀 하지 못했고요. 석사 마지막 학기를 어영부영 마쳤어요.

일 년 내 쓴 다이어리를 찬찬히 넘겨보면, 대단하게 한 일도 없는데. 하루하루는 대체로 바쁘고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가만히 앉아 소설 생각을 하고 구독자 님께 보낼 말을 떠올리기엔 버거운 날들이었던 것 같아요. 아무 말 없이 약속을 어겨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집안을 쓸고 닦고, 환기도 하고, 밥도 지어 먹었습니다. 돈으로 가볍게 바꾼 식사가 아니라 갓 지은 밥과 뜨겁게 굽고 끓인 것들로 여유로운 식사를 한 일도 오랜만이었네요.

오래 즐겨 신었던 신발도 몇 켤레 버렸습니다. 앞굽이 입을 크게 벌린 검은색 구두 하나와, 갈라지다 못해 부스러기를 만들기 시작한 겨울 부츠 하나. 좋아했던 신발을 버리는 일은 쉽지 않아서, 현관에 꺼내둔 것이 한참이었어요. 아무래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은 이런 결단을 내리기에 좋은 날이지요.

최근 몇 년간은 새해를 목전에 두고 서면 도무지 어떻게 살게 될지 잘 모르겠다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계획 세우기를 즐겨 하고, 또 많은 걸 통제하고 싶은 사람이라서. 연말의 이런 마음이 굉장히 난감합니다. 내년도 이렇게 어렴풋한 느낌에만 의지해서 시작해야 하는 거라고?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싶습니다.

하지만 난감한 정도도 조금씩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불안해 어쩔 줄 몰랐던 연말들이 스쳐 가고, 오늘의 불안은 그럭저럭 견딜만하고요.

이렇게 편지에 제 얘기만 주절주절 적다 보면 문득 구독자 님이 궁금해집니다.

하반기는 어떻게 보내셨을지. 새해는 어떻게 보내시려는지. 저처럼 난감한지, 아니면 기대되는지 말이에요.

얼마 전 <회사 만들기 : Entrepreneurship>이라는 전시를 보고 왔어요. 어니스트 섀클턴이 이끌었던 남극 탐험대 이야기로 시작되는 전시였는데요. 목숨이 위험한 시기, "정해진 일과와 실현 가능한 작은 목표에 집중"했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새해의 단순한 일과와 아주 작은 체크리스트를 생각하며 한 해의 마지막 날을 흘려보냅니다.

구독자 님에게도 오늘이 그런 가벼운 날이기를 바라며.

2023.12.31.
많이 늦은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