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등학생은 배고프다.
0교시부터 10교시까지, 웬종일 앉아 문제 풀이에 에너지를 쏟는 학생들은 끊임없이 배고프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매점이 있기는커녕 슈퍼 한 번 가는 데에도 경사가 아찔한 언덕을 넘어 10분을 걸어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일부 친구들은 그 험난한 여정을 돌파하는 투지까지 보였다. 그 모습에 감동한 학생주임 선생님은 그들을 몇 시간 내내 복도에 세워두기도…
급격히 온순해진 우리는 집에서 간식을 싸 오기 시작했다. 감자, 옥수수, 고구마 등 온갖 구황작물은 물론, 일부는 주먹밥, 닭강정과 같이 한 끼를 거뜬히 때울 음식까지 구비해왔다. 내 간식은 언제나 과일이었다. 딸기가 다른 과일보다 재배 기간이 긴 걸까? 많은 과일 중에서도 주로 딸기를 싸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우리 학교는 국・영・수 과목을 학업 수준별로 반을 나눠 수업했다. 다른 반에 갈 때면 난 늘 교과서, 필통, 그리고 내 책상에 올려뒀던 과일 통을 가져갔다. 혹여 나 없다고 누가 몰래 먹지 않을까 해서. 과일 통을 갖고 다니던 내가 퍽 인상 깊었던 걸까, 본인이 느낀 인상 곧이곧대로 나를 지칭하던 친구가 있었다. 수준별 수업 때마다 가운데 분단, 그것도 한가운데 줄에 앉던 A.
A는 날 ‘딸기’라고 불렀다. 여름엔 복숭아를, 가을엔 배를, 겨울에는 사과를 싸 와도 내 별명은 늘 딸기. 나와 A는 딱히 친하진 않았다. 복도에서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 웃음을 짓고, 가끔 나를 딸기야. 라고 부르며 스쳐 가던 정도.
그러다 다른 친구들도 A의 귀여운 애칭 놀이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우리 부모님이 딸기농장을 한다는 뜬소문까지 들렸다. 엄마가 카페를 운영하는 걸 알고 있던 내 친구마저 집 옥상에서 딸기를 재배하는 줄 알았다고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까지. 장난하니? 학교 내에서 나는 딸기농장 집 딸내미로 알려졌지만, 그마저도 귀여운 수준의 소문이 아닌가 싶었다. 오히려 그 소문을 활용해 어색한 친구들과도 쉽게 대화의 물꼬를 텄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A에게는 늘 고마웠다. 중학생 시절 따돌림을 당했던 기억에, 남들에게 선뜻 살갑게 다가가지 못했던 열일곱 살의 나. 그럼에도 내 존재를 확인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랬던 난 A가 불러준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 만인의 딸기로 존재했다.
혹시 A는 날 기억하려나. 나는 지금도 딸기를 보면 A가 생각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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