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5 vol.37 | view more | SUBSCRIBE
CRSH : 이야기
안녕하세요, 작가 정재경입니다. 요즘 가로수길의 잎들이 떨어져 숱이 줄었습니다. 낙엽을 보며 이별과 상실로 해석하고 슬퍼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덕분에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만났을 때, 이것이 바로 가을다운 장면이라고 느꼈습니다. 순간의 아름다움에 충실하는 감각, 그건 어디서나 가능해요. 디자인 마이애미 서울 VIP 오프닝에서도 느꼈습니다.
디자인 마이애미 서울, 함께 울리는 한국 디자인
디자인 마이애미 서울이 8월 31일~9월 6일 DDP 디자인랩에서 ‘함께, 울림(Resonance: Design in Dialogue)’을 주제로 열렸습니다. In Situ에는 한국·일본·대만의 작가 및 스튜디오 36팀이 참여해, 세계 각지의 디자인 갤러리와 국내외 작가들이 함께 참여해, 가구와 조명, 공예와 오브제를 통해 재료와 감각을 새롭게 보여 주었습니다.
전시장에는 손의 시간이 느껴지는 작업들이 많았습니다. 권중모는 겹겹의 한지와 월넛, 황동과 LED로 한옥의 창을 오늘의 빛으로 다시 만들었습니다. 전은지·이하린 작가가 이끄는 WKND Lab은 옻칠과 자개, 붉은 칠보 구체를 엮어 빛을 품은 조명 작업 〈Guseul〉을 선보였습니다.
프리미엄 소파 브랜드 알로소는 〈Layers of Resonance: 겹쳐진 시간, 이어지는 울림〉을 선보였습니다. 이는 알로소의 창작 프로젝트 Alloso DIALOGUES의 첫 결과물로, 완성된 소파를 국내 작가 6명에게 건네 각자의 재료와 작업 언어로 다시 해석하게 한 커미션 전시였습니다.
이 전시장에선 나무, 돌, 한지, 옻칠, 말총, 유리, 금속처럼 오래전부터 우리의 곁에 있던 재료들이 디자인의 언어로 세계와 만나고 있었습니다. 나무의 결, 유리 특유의 반짝거림, 옻칠 조명과 한지, 말총은 익숙한 재료이면서도 미래의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디자인 마이애미의 서울 전시는 한국 공예와 디자인을 전통의 재현을 넘어 동시대 컬렉터블 디자인의 언어로 보여 준 자리였습니다.

불꽃처럼 피는 꽃, 글로리오사
전시장 한 켠에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실버 트레이 위, 샴페인이 담긴 잔과 핑거 푸드 사이에서 꽃을 만났을 때 숨결을 품은 미감을 느꼈습니다. 글로리오사였습니다. 작가의 시간과 에너지로 탄생한 정제된 작품들 사이에서 자연이 피워낸 자유분방한 글로리오사의 생명력이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글로리오사의 꽃잎은 ‘꽃’을 생각하면 떠올리는 규칙적인 프렉탈 패턴과 다르게, 꽃잎이 뒤로 젖혀져 있고, 노랑과 붉은색이 섞인 가장자리는 불꽃처럼 위로 피어오릅니다. 단정하기보다 대담하고, 안정적이기보다 꿈틀거립니다. 뒤로 젖혀져 있는 꽃잎은 자기만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현대 무용가의 몸짓 같았습니다.
식물이 공간을 살아 있게 하는 이유
전시장에는 다양한 재료가 뿜어내는 빛의 움직임이 많았습니다. 조명이 유리의 표면에서 반짝였고, 금속은 차갑고 선명한 빛을 되돌려 주었으며, 나무와 흙은 빛을 머금었습니다. 재료마다 빛을 대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어떤 재료는 빛을 투과시켰고, 어떤 재료는 빛을 반사했고, 어떤 재료는 품었습니다.
붉고 노란 꽃잎은 조명 아래에서 작은 불꽃처럼 빛났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명이 만들어 낸 효과만은 아니었습니다. 꽃은 자기 안에 이미 빛을 가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글로리오사는 그날 디자인 오브제 사이에서 가장 살아 있는 방식으로 빛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공간에 식물이 놓이면, 공기가 달라집니다. 식물은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는 장식이 아닙니다. 단단한 가구와 차가운 금속, 정교하게 다듬어진 표면 사이에 살아있는 생명이 주는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을 불러옵니다. 잎 한 장의 기울기, 줄기의 휨, 꽃잎의 질감은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기 때문에, 공간에 팽팽한 긴장감을 줍니다.
자연이라는 오래된 디자이너
디자인은 재료를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나무를 깎아 의자를 만들고,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고, 금속을 구부려 빛을 담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날 전시장을 걸으며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디자인이란 재료가 지닌 성질과 시간을 수용하고 순응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나무는 나무의 결을 가지고 있고, 흙은 불을 지나며 예측할 수 없는 색을 얻습니다. 한지는 빛을 부드럽게 통과시키고, 말총은 한 올 한 올 엮이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형태가 됩니다. 식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글로리오사는 장미처럼 피지 않고, 백합처럼 고개를 숙이지도 않습니다. 그 꽃은 글로리오사만의 방식으로 꽃잎을 뒤로 젖힌 채 피어납니다.
자연은 오래전부터 가장 훌륭한 디자이너였습니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고, 같은 모양을 반복하지 않으며, 계절과 빛, 바람과 흙에 따라 형태를 바꿉니다. 식물이 보여 주는 예술성은 환경과 시간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모습으로 적응하고 균형을 잡는 데에서 나옵니다.
나만의 방향으로 피어난다는 것
우리는 ‘가장 보기 좋은 모습’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합니다. 일에서는 더 빠르고 선명한 성과를 내야 한다고 믿고, 관계에서는 더 다정하고 원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SNS 속에서는 단정하고 그럴듯한 형태의 삶을 보여 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나의 결, 내가 오래 지켜 온 속도,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고유한 부분을 조금씩 감추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꽃이 같은 방향으로 피어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꽃은 낮게 피고, 어떤 꽃은 덩굴을 타고 오르며, 어떤 꽃은 밤에 향기를 냅니다. 어떤 꽃은 화려한 색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어떤 꽃은 작고 여린 모습으로 계절의 가장자리를 지킵니다.
전시장을 나선 뒤에도 글로리오사의 꽃잎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뒤로 젖혀진 채 불꽃처럼 피어 있던 꽃. 완벽한 공예품 가운데서도 가장 자유로운 모습으로 공기의 흐름에 따라 춤을 추던 잎. 좋은 디자인이란 곁에 두고 있던 것을 새롭게 보게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계절 나는 어떤 모습으로 피어나고 싶은지 생각해 봅니다. 조금 더 자유롭게, 조금 더 멀리 뻗어나가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뒤로 젖혀진 꽃잎처럼 보일지라도, 생명이 가장 선명해지는 방향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요.
초록의 마음을 담아, 정재경 드림
PICK
책 읽기 좋은 계절, 가을. 고수리 작가를 추천합니다.
고수리 작가는 다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보통의 삶과 마음을 이야기해 온 에세이스트입니다. KBS 〈인간극장〉 취재 작가를 거쳐 휴먼다큐와 에세이를 써왔으며, 제1회 브런치북 프로젝트 금상을 수상했습니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마음 쓰는 밤》, 《선명한 사랑》은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되었고, 2024년에는 첫 장편소설 《까멜리아 싸롱》을 선보였습니다.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고수리 작가와 함께, 글을 통해 나를 만나고 삶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CRSH : 추천
영림홈앤리빙, 나성숙 작가 <옻칠전> 개최

영림홈앤리빙 인천갤러리 내 갤러리 압펠(apfel)에서 나성숙 작가의 옻칠전이 열린다. 영림홈앤리빙은 키친·바스·도어·중문·창호 등 주거 공간 전반을 제안하는 토탈 인테리어 브랜드로, 이번 전시를 통해 공간과 한국 전통 공예 문화가 만나는 경험을 선보인다.
나성숙 작가는 국립서울과학기술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출신으로, 오랜 시간 옻칠로 그림을 그려왔다. 옻나무 수액으로 만든 천연 도료인 옻칠과 나전, 삼베 등 전통 재료를 활용해 깊이 있는 질감과 현대적 조형미를 구현한다.
이번 '옻칠전'에서는 이번 ‘옻칠전’에서는 작가가 삶의 기억과 자연, 북촌의 풍경에서 길어 올린 작품 40여 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생활 공간 속에서 전통 공예의 아름다움과 오늘의 디자인 감각을 함께 발견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주소: 인천시 남동구 아암대로 1085
상설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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