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순위는 유튜버라고 합니다. 궁금한게 생기면 검색엔진이 아니라 유튜브에 검색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죠. 바야흐로 ‘대 유튜브 시대’입니다. 하지만 유튜브가 처음 나왔던 2005년엔 누구도 유튜버를 꿈꾸지 않았죠.
여기 유튜브로 멀리 떨어져 사는 서로의 안부를 묻던 형제가 있습니다. 2007년 1월 1일부터 형과 동생이 하루씩 번갈아 가며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죠. 조회수도 구독자도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메신저로 하던 대화를 영상으로 대체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두 형제는 지금도 매일은 아니지만 번갈아가면서 영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구독자수는 389만명이고, 채널 뿐만 아니라 유튜버 컨퍼런스, 교육 콘텐츠, 크리에이터 굿즈 제작 사업 등 관련된 사업만 20개가 넘어가죠. 영상으로 서로 안부만 묻던 평범한 형제가 어떻게 유튜브 생태계 그 자체가 될 수 있었을까요?
창업자 존 그린(John Green)과 행크 그린(Hank Green) 형제의 Day 0, 1990년대로 돌아갑니다.
오늘의 인사이트 요약
1. 정말 달랐지만, 끈끈했던 형제
2. 시대의 변화를 목격하고 작게라도 도전한다면 분명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3. 튼튼한 커뮤니티는 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
4. 돈보다 소중한 가치를 좇는 것이 사업을 더 오래할 수 있는 원동력
1. 정말 달랐지만, 끈끈했던 형제
그린 형제는 정말 달랐습니다. 형인 존은 어렸을 때, 강박장애를 가지고 있어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중학교에서 심하게 따돌림을 당했고, 부모님께 기숙학교로 전학보내달라고 했죠. 기숙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존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나씩 하나씩 친절하게 알려줬습니다. ‘네가 다가 갔을 때, 상대가 물러난다면 둘이 너무 가깝다는 뜻이야.’ 같은 것부터 말이죠.
존은 이후 영문학으로 유명한 케년칼리지에 진학합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 존은 이야기를 잘쓰는 법을 배우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대학에 소설 창작 수업은 두개 밖에 없었고, 12명 정원이었죠. 수업 지원자 14명 중에 2명은 탈락했는데, 그 중 하나가 존이었습니다. 존은 상위 85%에도 못드는데 무슨 작가가 되냐고 생각하며, 복수전공했던 종교학을 따라 목사가 되기로 합니다.
존은 목사가 되기 전, 어린이 병원에서 종교상담사로 일했는데, 이 때, 자신은 성직자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많은 아이들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거든요. 너무 어리고, 많은 죽음들, 이토록 불공평한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었으니까요.
‘자비로운 신이 왜 세상에 고통을 허락하는가.’
이에 대한 답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주한 현실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존은 그 길로 성직자의 길을 벗어나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시카고에 있는 ‘북리스트’라는 잡지사에 ISBN(국제 표준 도서 번호) 코드를 입력하는 직무로 취업하게 되죠. 바코드 스캐너로 쉽게 대체될만큼 단순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명상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북리스트에서 일하는 몇 년이 존에게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새로운 전환을 할 수 있는 지점이 됐죠.
북리스트는 2주간 400여 권의 책을 출간하고 있었습니다. 작가가 꿈이었던 존은 ‘2주간 400여권이 출간되고, 개중엔 그닥 훌륭하지 않은 책들도 많이 있으니 이 정도면 나도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용기를 갖게 되죠. 그래서 편집자였던 아이린에게 점심을 사면서 ‘기숙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죄책감과 슬픔을 겪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라고 말했더니, 아이린은 ‘좋은 아이어다, 하지만 실제로 써야겠죠?’ 라고 했습니다. 존은 용기를 얻어 단락도 여백도 없는 40 페이지 원고를 써갔죠. 아이린은 ‘뭔가 있네요.’ 라고 해주시며 함께 2년반 동안 함께 원고를 다듬었습니다.
완성된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보냈고 한 곳과 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계약 후, 또 1년 반 수정을 거쳐 2005년, 『알래스카를 찾아서』를 출간합니다. 청소년 문학분야의 가장 권위있는 상인 ‘프린츠 상’도 수상했죠. 상위 2% 수준인 7000부의 판매량은 덤이었죠.
이후 존은 후에 아내가 되는 여성을 따라 뉴욕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동생인 행크는 존과 달리 과학과 수학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호수에 사는 동물들을 연구한 과제를 발표하기도 했죠. 대학도 환경학 석사까지 나올 정도로 환경에 관심이 많았어요. 대학원에서 지구의 미래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암울한 미래 때문에 우울해지곤했는데요. 그에 대한 해결책을 구글에서 찾아보고,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리거나 다른 매체에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NPR(미국의 비영리 공영방송)이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도 기고했죠.
존과 행크는 뉴욕과 몬타나에 떨어져 있었지만 (뉴욕은 미국 북동부, 몬타나는 북서부) 메신저로 연락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2. 시대의 변화를 목격했을 때 작게라도 도전한다면 분명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행크는 특히 존을 동경했기 때문에 존이 좋아하는 노래나 영화는 멋있다고 생각할 정도였기에 텍스트 메신저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죠.
마침 2006년, 존은 온라인 영상에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유튜브 초창기였기 때문에 이상한 영상도 정말 많았습니다. 가짜 브이로그, 냅다 소리만 지르는 영상들도 있었죠. 존은 이 영상들이 단순히 업로드에 그치는게 아니라는 걸 알게됐습니다. 실험적인 분위기 속에서 또래들에게 인정받고, 연결되면서 온라인 영상이 커뮤니티가 되어가는 것을 목격했죠.
존은 ‘우리도 할 수 있다’ 라고 행크에게 영상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행크는 마침 인터넷에서 잘된 경험이 있었거든요. 90년대에 화성에 대한 정보를 모아둔 웹사이트를 만들기도 했고, 대학원 진학 시기에 플로리다의 I-4 고속도로가 얼마나 나쁜지 분석하는 블로그 글이 관심을 끌기도 했거든요. 그 글 덕에 지역 방송사에서 집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200달러에 광고를 팔기도 했습니다.
존은 2007년 새해 첫 날을 기점으로 ‘1년간 매주 평일에 서로에게 보내는 영상을 번갈아가며 올리자’ 라고 제안했습니다. 월요일에 존이 올리면, 화요일에 행크가 답하는 영상을 올리는 형식이었죠. 특별한 형식은 없었고, ‘영상을 안올리면 벌칙이 있다’ 라는 규칙뿐이었습니다. 처음엔 서로에게만 보여주기 위한 영상이었지만 점점 보는 사람들도 고려하기 시작했죠. 해리포터 노래를 부르는 영상도 있었는데 이 영상 덕에 많은 사람들이 유입됐죠. 그 때는 유튜브 메인페이지가 알고리즘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큐레이션하던 시절이라 유행에 맞는 콘텐츠를 만들면 조회수를 확실히 올릴 수 있었거든요.
그 때까지만 해도 형제는 유튜브를 사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직업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죠. 하지만 형제는 이게 ‘중요한 일’이라고 나중에 엄청 큰 일이 될거라고 생각했어요. 케이블 TV가 어떻게 확산됐는지를 직접 목격했던터라 이 새로운 미디어는 더 큰 변화가 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죠. 심지어 일방향이 아닌 시청자의 존재를 알고, 반응을 받아들여 영상을 만드는 양방향 구조였으니까요.
( 출처: Vlogbrothers Youtube channel)
3. 튼튼한 커뮤니티는 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07~2008년쯤, 형제에게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생깁니다. 행크의 블로그를 사겠다는 회사가 나타났죠. 가격은 무려 6자리에 (십만달러 단위, 한화로 수억원) 작가로 계속 일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행크에게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였는데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인수는 무산되어버렸습니다.
이 일 덕분에 행크는 ‘유튜브를 어떻게든 사업으로 만들어볼까?’ 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물론 유튜브 광고 수익이 월 몇 천 달러 수준이 있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 ‘사업을 시작한다’는 아니었거든요. 행크는 유튜버였던 친구, Alan과 함께 굿즈회사를 세웠습니다. ‘DFTBA’, Don’t Forget To Be Awesome(멋지게 사는 걸 잊지 마) 라는 이름이었죠.
직접 만든 음악 CD(직접 부른 노래가 담겨 있는 CD) 를 해리포터 팬 행사 때 팔았었는데,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사간 경험에서 착안했습니다. 본인보다 훨씬 더 노래 잘하고, 인기 많은 유튜브 뮤지션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 CD를 만들고, 티셔츠와 포스터를 대신 팔아줬습니다. 매번 수익을 얻으면 재투자하고, 수익이 나면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키워나갔죠. 이 회사는 지금은 유튜버, 팟캐스터 뿐만 아니라 누구든 굿즈를 판매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발전했습니다.
형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합니다. 유튜버들을 위한 컨벤션*을 (이하, Vidcon) 열기로 하죠. 행크가 원래 컨벤션을 좋아해 애니메이션, 너드, 해리포터 컨벤션 등 많이 다니기도 했고, 공연자로도 참여했던 경험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 행사를 기획하시는 분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했구요.
*컨벤션: 회의가 중심이 되고 전시회와 행사(문화, 스포츠 이벤트)가 수반되는 모임
마침 비디오게임 컨벤션에 갔을 때, 유튜브도 이런 행사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유튜버와 팬 뿐만 아니라 유튜브직원도 오고, 광고 업계 직원도 오는 행사말이죠. 새옹지마일까요? 금융위기에서 회복중이었기 때문에 컨벤션이 많지 않았고, 저렴한 가격에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컨벤션을 여는게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유튜버들에게 ‘이런 행사를 열건데, 출연료는 못드려도 호텔 숙박과 항공료를 제공하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당장 줄 돈이 없었지만 우선 배짱으로 밀어붙였죠.
그리고 호텔과 서류를 썼습니다. “컨벤션을 할 장소를 빌려주세요. 대신 객실을 약속한 만큼 채우겠습니다. 채우지 못하면 위약금을 물겠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렇게 공간을 확보하고, 행사운영은 해리포터 컨벤션을 만들었던 팀과 협력해 운영했습니다. 입장료로 60달러를 받았고, 입장료를 한 푼 두푼 모아 초청유튜버들의 호텔비와 비행기값을 낼 수 있었죠.
유튜버 여비는 메웠지만 행사 비용을 전부 메우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폰서를 모집했죠. 처음엔 유튜브에 스폰서 요청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잡한 행사엔 스폰서 안해요.’ 라는 답을 받았죠.
행크는 브이로그브라더스영상에서 “온라인 영상 컨퍼런스에 스폰서하고 싶은 분 계시면 이메일 주세요”라고 올렸고, 이 영상을 ‘시스코’ 임원의 딸이 보고는 시스코*에 소개해줬습니다. 2만 달러를 후원받아 흑자를 낼 수 있었죠.
*시스코: 미국의 통신장비회사. 당시 플립 카메라도 판매하고 있었다.
이 행사는 유튜브 업계의 정말 의미있는 행사가 되었는데요. 화면과 숫자로만 인식하던 사람들이 실제로 눈 앞에 있다는걸 대중들이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산업이 ‘진짜 산업’이라는 것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출처: VidCon Youtube Channel)
4. 돈보다 소중한 가치를 좇는 것이 사업을 더 오래할 수 있는 원동력
2011년, 형제는 유튜브와 함께 ‘크래시 코스(Crash Course)’ 라는 프로젝트를 함께합니다. 고퀄리티 애니메이션과 정확한 팩트체크에 기반한 교육용 영상을 만드는 프로젝트였죠. 존이 인문학을 담당하고, 행크가 과학을 맡았죠. 형제는 줄곧 배움이란게 얼마나 흥미롭고 경이로운지 느낄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유튜버로서 가지고 있는 ‘관심 붙들기’ 노하우를 교육콘텐츠에 접목해서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유튜브에서 45만달러를 후원받아 전담 프로듀서도 고용할 수 있었죠.
(출처: PBS)
존과 행크는 일부 사업을 매각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영상만드는 것을 멈추지 않아요. 초반에도 말씀드렸지만 지금도 3,4일 간격으로 영상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돈이 아니라 이 일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콘텐츠 제작을 넘어, 여러 비즈니스와 제작사로 이어지죠.
돈이 주요 목적이 아니라는 건 형제의 콘텐츠가 무료라는 점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회사처럼 프리미엄 모델이나, 구독제를 도입하지 않고 광고 수익만으로 운영하고 있죠. 자극적인 영상으로 큰 돈을 벌 순 있겠지만, 돈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치에 더 집중하고자 이런 모델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대신 광고, 후원, 크라우드 펀딩처럼 사람들이 콘텐츠에 자발적으로 후원할 수 있고, 창작자는 시청자들에게 돈이 목적이 아닌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에 더 집중할 수 있는 문화가 더 커지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일 자발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서버블(Subbable)이라는 플랫폼도 만들었죠.
그린 형제는 지금까지의 성공에 있어 노력과 운 중에 운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말은 그들의 성공이 순전히 운이었다는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작은 행운들이 있었고, 그 덕에 잘 되는 방향으로 계속 좇아 갈 수 있었다는 것이었죠. 실제로 행크는 대학원 시절에 궤양성 대장염을 진단 받았고, 월 5,600달러의 약값을 지불해야했었는데요. 가족의 지원 덕에 약값에 대한 걱정없이 브이로그 브라더스 영상을 계속 찍을 수 있었다라고 했죠.
그린 형제는 언제까지 할진 모르겠지만 계속 영상을 찍어올리겠다고 말합니다. 에디터는 그린형제의 성공기를 접하고는 마치 스티브 잡스의 Connecting the dots 연설과 맥이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래는 알 수 없으니 언젠가는 이어질 거라 생각하고 인생에 경험이라는 점을 찍으라는 말이었었죠.
여러분은 인생에 경험이라는 점을 찍고 계신가요? 찍어온 점들을 이어보면 어떨까요? 그린 형제가 올린 영상은 구독자를 쌓아왔고, 행크의 컨벤션 경험이 vidcon으로 이어졌고, 그들의 영상과 vidcon이 만나 cisco의 스폰서로 이어진 것처럼요.
💬 “이 산업이 ‘진짜 산업’이라는 걸 모두가 인식하게 된 계기였죠. ” - 행크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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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크가 컨벤션을 많이 다녀 기획자들과 친하게 지낸 것과 같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경험자산은 어떤게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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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김미진
글 천수승
편집 천수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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