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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명을 28명으로 줄이고, 매각 광고를 낸 회사. 이바이트 이야기

이바이트 창업자 셀리나 토바코왈라의 Day 0

2025.03.06 | 조회 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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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며낸 성공 포르노가 아닌, 창업자의 좌절, 극복, 성공 순간의 솔직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최근 애플이 출시한 초대장 앱 ‘애플 인바이츠(Apple Invites)’를 아시나요? 아이폰 사용자들이 사진과 이모티콘을 활용해 초대장을 만들고, 참석 여부를 손쉽게 확인 및 관리할 수 있는 앱인데요. 오늘은 이런 디지털 초대장의 시초인 ‘이바이트(Evite)’의 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당근이세요?”가 중고 거래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미국에서는 초대를 보낼 때 “이바이트 보내줘”라고 할 정도로 널리 사용되고 있죠.

이바이트는 1998년,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만난 셀리나 토바코왈라(Selina Tobaccowala)와 알 리브(Al Lieb)가 소비자 중심의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공동 창업한 서비스입니다. 하지만 닷컴 버블 붕괴 이후, 승승장구하던 이바이트는 출시 3년 만에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 결국 직원 절반 이상을 해고한 뒤 애정을 쏟았던 회사를 매각해야 했는데요.

오늘은 공동 창업자 중 셀리나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으로 컴퓨터에 빠진 소녀가 컴퓨터 과학을 전공하고, 소비자 중심의 서비스를 만들며 ‘책임감’이라는 가치를 깨닫기까지. 오늘은 이바이트의 창업자 셀리나의 Day 0,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오늘의 인사이트 요약
1. 나만의 기준을 세우다: 사람, 제품과 목표, 그리고 배움
2.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확장성’: 소비자 중심의 제품을 만들자.
3. 리더십의 무게와 책임감: 이바이트를 떠나 새로운 챕터를 열기까지

 

 

1. 나만의 기준을 세우다: 사람, 제품과 목표, 그리고 배움

실리콘밸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자, 여성과 소녀들의 롤모델로 꼽히는 셀리나 토바코왈라는 인도에서 이민 온 부모님과 함께 미국 뉴저지주 램지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에 푹 빠져 있었던 그녀를 ‘손을 흔들며 정답을 말하고 싶어하는 적극적인 아이’였다고 회상하죠.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팀 스포츠를 좋아했던 셀리나는 고등학교 시절, 선수들의 슛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통계 프로그램을 개발해 농구부 주장까지 맡았다고 하는데요. 이처럼 컴퓨터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녀의 성장 배경에는 프로그래머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셀리나의 부모님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기술을 접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마련해 주었습니다. 10살 무렵, 아버지가 집에 컴퓨터를 들여놓자 셀리나는 본격적으로 코딩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어머니는 뉴저지 전역에서 열리는 코딩 캠프에 그녀를 데리고 다녔죠. 놀랍게도 그때는 1980년대 초중반이었고, 코딩이 지금처럼 대중적이지 않은 시기였는데요.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고등학교에서 컴퓨터과학 수업을 들었을 때 대부분 그녀가 반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컴퓨터를 좋아했던 셀리나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컴퓨터과학을 가장 잘 가르치는 곳은 어디일까?’를 기준으로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당시 닷컴 붐의 중심지였던 서부의 스탠포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1학년 때 이바이트의 공동 창업자인 알 리브(Al Lieb)를 만나게 되죠. 두 사람의 첫 프로젝트는 종이 졸업앨범 대신 CD에 담긴 디지털 졸업앨범을 만드는 작업이었다고 합니다.

한편 셀리나는 신입생 때 컴퓨터과학 수업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며 ‘이 길이 맞는 걸까?’라는 고민에 빠졌고, 여름방학 동안 데이터베이스 관련 경험을 쌓기 위해 쇼핑몰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녀에게 주어진 일은 고객들에게 “환영합니다”라고 인사하는 안내원 자리였죠.

실망한 그녀는 투자은행의 IT 부서에서 일하던 친구의 아버지에게 이를 하소연했고, 그의 제안으로 투자은행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웹사이트를 개발하고, 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Morning Meeting Notes’라는 앱을 만들기도 했죠. 이를 통해 셀리나는 컴퓨터과학이 실제로 세상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직접 경험하고,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구나, 그리고 정말 좋아하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후 컴퓨터 과학에 대한 열정을 되찾은 셀리나는 전공 공부에 몰두하며 2학년을 보낸 뒤, 3학년 때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겨울방학 인턴십을 하기 위해 회사를 찾던 도중, 그녀는 알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습니다. “회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네가 가장 먼저 떠올랐어. 같이 해볼래?”라는 내용이었죠.

이 이메일을 받고 셀리나는 깨닫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혁신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베를린에서 머무르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느낀 것이죠. 결국 그녀는 스탠포드로 돌아와 알과 함께 사업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시작합니다.

 

1999년 20대 초반 셀리나와 알의 모습(출처: https://medium.com/@sootle/second-time-on-the-merry-go-round-b96912d137e0)
1999년 20대 초반 셀리나와 알의 모습
(출처: https://medium.com/@sootle/second-time-on-the-merry-go-round-b96912d137e0)

 

셀리나가 스탠포드로 돌아온 그 해 겨울, 알과 함께 만든 첫 번째 창업 아이템의 이름은 ‘OOTL Works(Object-Oriented Template Language)’였습니다. 코딩의 민주화를 꿈꾸며, 그래픽을 사용해 사람들이 코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돕는 서비스였죠. 하지만 주변 친구들에게 일종의 초기 사용자 테스트를 해본 결과, 이 서비스가 별로 유용하지 않았고, 특히 개발자가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 코딩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분야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해당 아이템을 접게 됩니다.

 

비록 첫 아이템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잃을 것이 없었던 대학생인 셀리나와 알은 ‘계속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겠지’라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브레인스토밍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테스트해보던 중, 1997년 말 ‘콜라주(Collage)’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웹상의 방대한 정보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개인화된 맞춤형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이었죠.

그들은 곧바로 전자제품 매장에 가서 서버를 구매하고 ‘콜라주’에 대한 아이디어를 실행으로 옮겼습니다. 서버를 구매하기 위해 쓴 299달러가 그들이 투자한 유일한 비용이었죠. 나머지는 모두 ‘시간’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셀리나와 알은 주식 정보, 날씨, 지역 뉴스 등의 정보들을 하나로 모아 볼 수 있는 웹사이트 ‘콜라주’를 성공적으로 개발하게 됩니다.

 

콜라주가 점점 알려지기 시작할 즈음, 야후(Yahoo)나 익사이트(Excite)와 같은 비슷한 포털 사이트들을 본 셀리나는 이들과 콜라주의 차별점이 ‘개인화된 정보 제공’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직접 야후와 익사이트에 가서 자신의 제품을 팔아보기로 결심하죠.

네트워크의 힘을 활용해 익사이트 창업자인 스탠포드 동문 조 크라우스에게 연락을 취한 그녀는, “저는 스탠포드 대학교 4학년 학생인데, 저희가 만든 제품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고 싶어요.”라고 당차게 어필했습니다.

 

1990년대 당시 검색 엔진 ‘익사이트(Excite)’ 화면(출처: https://www.webdesignmuseum.org/gallery/excite-1996)
1990년대 당시 검색 엔진 ‘익사이트(Excite)’ 화면
(출처: https://www.webdesignmuseum.org/gallery/excite-1996)

 

한편 셀리나가 창업을 결심하고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채용 박람회가 열리던 날, 셀리나는 창업을 위해 빌린 작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던 중이었는데요. 중요한 문제는 항상 아버지와 상의하곤 했던 그녀는, 그날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채용 박람회에 참석해야 할지 고민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녀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알과 함께 일하는 게 좋니?”였습니다. 셀리나는 주저 없이 “네, 정말 좋아요. 알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고, 서로 도전하며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라고 답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네가 하고 있는 일을 즐기니?”였습니다. 그녀는 “네, 저희가 개발하는 것이 웹을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정말 좋아요. 현재의 제품도 만족스럽고, 목표도 분명해요.”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그 과정에서 배우고 있니?”라고 물었습니다. 셀리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럼요. 지금 배울 수 있는 속도가 그 어떤 상황보다도 빠르다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셀리나의 대답을 들은 아버지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게 무슨 해가 되겠니? 뒤돌아보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해 도전해보렴.”

그리고 그날 이후, 셀리나는 자신의 비즈니스와 커리어를 결정할 때마다 항상 이 세 가지—함께 일하는 사람, 제품과 목표, 그리고 내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2.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확장성’: 소비자 중심의 제품을 만들자.

1998년, 셀리나와 알은 익사이트에게 5만 달러를 받고 콜라주의 기술과 제품을 독점적으로 라이선스해주는 비즈니스 계약을 체결합니다. 두 사람은 매일 익사이트 오피스를 방문해 담당자들과 협업하며 제품 개발에 매진했고, 공식적인 출시를 앞두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최종 리뷰 과정에서 법무팀으로부터 각기 다른 웹사이트에서 콘텐츠를 가져오는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다른 웹사이트의 콘텐츠를 사용하려면 라이선스를 획득해야 했고, 법적으로 해결해야 할 이슈도 많았기 때문에 결국 콜라주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죠.

 

그러나 셀리나와 알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익사이트와 협업하는 동안에도 콜라주 외에 다양한 제품 아이디어를 구상하며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해 여름,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 애비뉴에 있는 작은 사무실을 임대해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입주한 건물에는 주로 소규모 컨설팅 업체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셀리나와 알은 “컨설턴트들은 고객과 어떻게 회의 일정을 잡고 업무를 스케줄링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죠. 이 질문에서 출발해, 웹 기반 메일과 캘린더 서비스를 제공하는 ‘WebDo’와 ‘WebCal’이라는 제품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구글 메일과 캘린더가 보편화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서비스가 없었습니다. 셀리나와 알은 정장을 차려입고 컨설팅 회사를 직접 찾아다니며 제품을 판매하려 했죠. 하지만 인터넷이 아직 대중화되기 전이라 기업들은 온라인에서 일정을 관리하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고, 새로운 인터넷 환경에 대한 관심도도 낮았습니다. 수차례 설명을 시도했지만 설득이 쉽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죠.

 

📒 Editor’s Note: 캘린더 제품을 팔기 위해 컨설팅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한 셀리나와 알에게, 담당자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회의를 스케줄링하려면 이걸 보스턴으로 보내야 한다는 건가요? 우리 서버를 운영하는 컴퓨터가 보스턴에 있거든요.” “아니요, 인터넷을 통해 전송됩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아니, 인터넷으로 간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그건 안 될 거예요. 저희 서버는 보스턴에 있어요.”라며 그들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이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컨설팅 회사와의 미팅을 마친 후 녹초가 된 두 사람은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던 중, 기업이 아닌 일반 소비자를 위한 제품을 만들어 보기로 합니다. 기업을 대상으로 했던 웹 캘린더 서비스를 소비자가 직접 사용할 수 있도록 개선해, 친구들과 일정을 공유하며 소셜링할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이었죠.

이 과정에서 셀리나는 한 가지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녀가 기술을 사랑했던 이유는 수백만,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확장성’에 있었고, 그래서 언제나 소비자를 중심으로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사실을요.

 

그렇게 셀리나와 알은 디지털 초대장 서비스 ‘이바이트(Evite)’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바이트의 핵심 기능은 초대한 사람들의 참석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고, 여기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참석 비용을 결제하거나 선물을 주는 등의 부가 기능도 추가했죠. 또한 사용자가 이바이트 사이트에서 베이비 샤워, 스포츠 이벤트, 학교 기금 모금 등 원하는 테마의 초대장 템플릿을 선택하면, 그에 맞는 디자인 및 추가 기능을 설정해 손쉽게 디지털 초대장을 만들 수 있도록 했습니다.

1998년 여름, 마침내 이바이트의 웹 애플리케이션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첫 번째 이바이트는 셀리나가 본인의 실내 축구팀을 위해 만든 것이었는데, 팀원 중 한 명이 이바이트를 활용해 다른 초대장을 만들었고, 그걸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초대장을 만들며 서비스가 확산되기 시작했죠. 당시는 바이럴 마케팅이라는 개념조차 생기기 전이었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이바이트는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습니다.

 

이바이트(Evite)의 초기 웹 사이트(출처: https://marcos.kirsch.mx/2008/04/15/the-science-of-evitecom/)
이바이트(Evite)의 초기 웹 사이트
(출처: https://marcos.kirsch.mx/2008/04/15/the-science-of-evitecom/)
📒 Editor’s Note: 이바이트를 출시한 후 어느 날,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셀리나가 책상 밑 서버에 연결된 케이블 선에 걸려 넘어지며 케이블이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때 전화가 울렸고, 어떤 사람이 “이바이트가 왜 안 되나요?”라고 물었다고. 그래서 다시 케이블을 꽂고 서버를 켰는데, 그 순간 이바이트가 이미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셀리나와 알은 머지않아 모든 것이 디지털화될 것이라고 믿었고, 종이 초대장은 곧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2000년도에는 “종이 초대장은 90년대 방식(Paper invitations are so 90s.)”이라는 슬로건이 적힌 브랜드 티셔츠를 만들기도 했죠.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두 사람은 이바이트를 무료로 배포하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이바이트가 자연스럽게 바이럴되며 점점 성장해가던 중, 셀리나와 알은 스탠퍼드 비즈니스 스쿨 출신의 조시 실버만을 만나게 됩니다. 사업을 더욱 키우기 위해 비즈니스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조시를 이바이트의 CEO로 영입했고, 그는 이바이트의 투자 유치를 담당하게 되었죠.

 

조시가 합류한 이후, 이바이트는 첫 번째 투자 라운드에서 570만 달러를 유치하며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총 3,700만 달러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했는데, 셀리나는 지금 돌이켜보면 이것이 말도 안 되는 금액이지만 닷컴 붐 시기였기에 가능했다고 말하는데요.

당시 무료 웹 서비스들의 핵심 비즈니스 모델은 ‘광고’였고, 많은 트래픽을 확보해 광고주들에게 매력적인 플랫폼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벤처캐피털에서는 제품의 매출보다는 사이트 방문자 수를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삼았죠.

이바이트는 출시 첫해에 이미 100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확보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바이트의 가치는 약 1억 5천만 달러로 평가되었고, 불과 20대 초반이었던 셀리나는 무료 디지털 초대장 서비스로 엄청난 가치를 가진 회사를 만들어낸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3. 리더십의 무게와 책임감: 이바이트를 떠나 새로운 챕터를 열기까지

1억 5천만 달러 가치의 회사를 만들어냈지만, 셀리나의 생활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네 명의 룸메이트와 함께 살았고, 주 6~7일 근무하며 사무실에서 잠을 자는 일상이 계속됐죠. 매일같이 회사와 서비스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했고, 성장할 수 있는 팀을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투자 자금을 확보한 후, 셀리나와 알은 샌프란시스코에 큰 규모의 오피스를 마련했고, 엔지니어링, 디자인, 마케팅 등 다양한 부서의 직원들을 채용하며 본격적인 확장에 나섰습니다. 2000년 초, 이바이트는 하루 백만 건 이상의 방문자를 기록할 만큼 성장했고, 광고주들에게도 매우 매력적인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죠.

이에 따라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며 수익 창출을 위해 노력했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디지털 광고 시장이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상황이라, TV나 라디오 광고와 비교했을 때 그 가치를 설명하고 가격을 책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합니다.

 

직원 수가 70명을 넘어가고, 3,700만 달러의 투자금이 오히려 부담이 될 만큼 압박감이 커졌지만, 당시 닷컴 붐 속에서 대부분의 기업들은 ‘수익’보다 ‘성장’과 ‘트래픽’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 중반,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되는데요.

갑자기 모든 투자자들이 ‘수익성’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이바이트의 미래에 대한 의문도 커졌습니다.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지, 수익성을 어떻게 확보할지, 비즈니스 모델이 지속 가능할지 등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고, 결국 회사들은 성장보다 비용 절감에 집중하며 몸집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우리 주변의 전체 생태계와 환경이 그런 상황이었어요. 다른 창업자나 CEO들과 함께 모이는 식사 자리에서도 모두가 ‘어떻게 해야 하지?’하며 엄청난 파도를 느끼고 있었어요. 벤처캐피털(VC)들은 이제 ‘수익성’과 ‘투자 회수’에만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고요. 저에게는 이 변화가 엄청난 깨달음이었어요.” - 셀리나

 

셀리나와 알은 비용을 줄이고, 비즈니스 모델을 전환해 수익화를 추진하면서 점진적으로 이바이트를 성장시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VC들은 더 이상 장기적인 성장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투자금 회수에만 몰두했죠. 결국 이 위기 속에서 그들은 직원 절반 이상을 해고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셀리나와 알은 작은 팀으로라도 계속 이바이트를 운영하고 싶었지만, 회사의 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하며 VC들은 회사를 매각하길 원했고, 사실상 통제권이 없었던 그들은 결국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2000년 11월, 그들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이바이트 매각 광고를 내며 공개적으로 인수자를 찾기 시작합니다.

 

많은 기업이 관심을 보였고, 결국 2001년 4월 티켓마스터(Ticketmaster)의 자회사인 시티서치(CitySearch)에 2,500만 달러에 회사를 매각하게 되는데요. 티켓마스터가 대형 공연과 스포츠 경기 티켓을 판매하는 플랫폼이었다면, 시티서치는 지역 이벤트를, 이바이트는 개인 이벤트를 담당하며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조합이었죠.

“이바이트를 사업적으로 계속 운영하는 것이 어렵다는 게 명확해지자, 저는 정말 좋은 곳에 회사를 넘기는 데 집중했어요. 제품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중요했거든요. 이곳에서 일했던 73명의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이 제품을 디자인하고, 마케팅하고, 성장 전략을 고민하는 데 시간을 쏟았으니까요. 그래서 제품이 계속 살아남길 바랐어요.” - 셀리나

 

시티서치(CitySearch)에 인수된 후의 이바이트 화면(출처: https://www.wsj.com/articles/SB106313095421774400)
시티서치(CitySearch)에 인수된 후의 이바이트 화면
(출처: https://www.wsj.com/articles/SB106313095421774400)
📒 Editor’s Note: 닷컴 버블이 붕괴된 후 이바이트는 73명이었던 직원 수를 28명으로 줄여야 했는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셀리나는 이 숫자를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직원들은 그저 회사의 성장을 위해 열정을 쏟아왔고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당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사회와의 논의를 통해 그들을 잘 대우해줄 수 있는 적절한 퇴직 패키지를 마련하는 것 뿐이었다고.

 

이바이트 매각 후, 셀리나는 티켓마스터에서 약 5년 동안 일하며 라이브 이벤트 티켓 판매 비즈니스를 담당했습니다. 당시 유럽 시장을 책임지며 250여 명의 팀원을 관리했고, 전체 업무의 60~70%를 해외 출장으로 보낼 만큼 바쁜 나날을 보냈죠. 그러던 중, 문득 ‘이제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무렵 셀리나는 서베이몽키(SurveyMonkey)의 CEO 데이브 골드버그(Dave Goldberg)를 만나고 합류 제안을 받게 되는데요. 당시 임신 초기였던 그녀가 이 사실을 데이브에게 이야기하자, 데이브는 그녀와 함께 서베이몽키에서 가족 친화적인 문화를 만들 것이며, 동시에 정말 큰 비즈니스를 구축할 것이라 답하죠.

 

그렇게 2009년 10월, 셀리나는 서베이몽키의 사장 겸 CTO로 합류했고, 데이브는 그녀에게 단순한 상사가 아니라 인생의 멘토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데이브는 성과 리뷰나 HR 면담보다 ‘진짜 리더가 되는 법’에 대한 대화를 더 중요하게 여겼고, 셀리나와 점심을 함께하며 CEO로 성장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2015년, 데이브는 그녀에게 말했죠. “이제 네가 CEO가 될 준비가 됐어. 그건 네 선택이야.” 그런 데이브에게 셀리나는 그의 2인자로 있는 것이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셀리나는 오랫동안 데이브와 함께 서베이몽키에서 함께 일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화를 나눈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브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셀리나는 서베이몽키에서 계속 일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리더십의 변화는 곧 조직 문화와 방향성의 변화로 이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은 더 이상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죠.

데이브의 죽음을 계기로 건강과 웰니스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던 셀리나는 2016년, 1998년 이바이트 창업 이후 20년 만에 알과 다시 힘을 합쳐 '긱소(Gixo)'를 창업했습니다. 긱소는 모바일을 통해 실시간 그룹 피트니스 수업을 제공하는 앱으로, 사람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서비스였죠. 출시 후 좋은 반응을 얻으며 높은 사용자 참여율을 기록했고, 2019년 오픈핏(Openfit)에 매각되었습니다.

 

긱소(Gixo) 운영 당시 셀리나와 알의 모습(출처: https://news.greylock.com/our-investment-in-gixo-dc83138a03ac)
긱소(Gixo) 운영 당시 셀리나와 알의 모습
(출처: https://news.greylock.com/our-investment-in-gixo-dc83138a03ac)
📒 Editor’s Note: 지금까지의 성공이 운과 노력 중 무엇 덕분이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셀리나는 “운을 ‘특권(privilege)’이라고 본다면, 저는 그런 특권을 정말 많이 가졌다”고 답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신 부모님 덕분에 스탠포드에 다니면서 한 푼의 빚도 지지 않았고, 이것은 정말 큰 특권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기반 위에서 더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다고.

 

이바이트, 서베이몽키, 그리고 긱소에서의 경험은 셀리나에게 리더로서의 책임감을 깊이 깨닫게 해준 과정이었다고 합니다. 이바이트에서는 직원 해고라는 가슴 아픈 결정을 통해 책임의 무게를 실감했고, 서베이몽키에서는 데이브를 통해 좋은 리더가 갖춰야 할 자세를 배웠죠. 그리고 긱소에서는 직접 CEO가 되어 리더십을 온전히 책임지며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2023년, 셀리나는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주택 소유자들이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며, 환경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돕는 ‘홈부스트(HomeBoost)’를 창업한 것인데요. 이렇게 또 다른 챕터를 열어가고 있는 그녀는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바이트를 매각했던 경험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순간 중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한편, 2020년 현재의 CEO인 데이빗 염(David Yeom)이 이바이트를 인수한 후, 이바이트는 비즈니스 모델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며 변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마존의 최대 기프트 제휴 업체로 자리 잡으며 초대장뿐만 아니라 선물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했죠. 또한 일부 초대장 기능을 유료화하며 안정적인 수익 모델을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이바이트는 그녀의 삶 한편에 자리한 추억이 되었지만, ‘이바이트 보내줘’라는 말이 일상적인 표현이 될 정도로 그녀가 만든 제품은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죠. 셀리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만든 서비스가 세상에 혁신을 가져오고 사람들의 일상 언어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 “정말로 하룻밤 사이였어요. “돈 써, 돈 써”에서 갑자기 “팀을 해고해야 해”로 바뀌었어요.” - 셀리나 토바코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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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리어를 결정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나만의 기준’이 있나요? 그 기준은 어떤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나요?

❓ 리더로서 책임감의 무게를 온전히 실감했던 순간이 있나요? 내가 생각하는 ‘책임감 있는 리더’란 어떤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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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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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이

    0
    4 months 전

    순식간에 읽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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